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천적(天敵) (3)
찌이이익!
명천이 신경질적으로 서신을 찢어발겼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극도로 화가 난 것이다.
명우산은 침을 삼켰다.
근래 수명 문제로 워낙 초조해했던 가주다. 자그마한 일에도 벌컥 화를 내곤 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한 적은 없었다.
“연위,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개자식이!”
연가주가 아니라 연위란다.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명우산이 빠르게 말했다.
“하나만 잡으면 됩니다.”
“뭐라?!”
“이 정보 하나만 없는 일로 만들면 됩니다. 대회의가 오늘입니다. 모용가주가 연가 쪽 일을 폭로하면, 며칠 내로 연가주를 소환할 겁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병력을 보내야 합니다.”
“뭐라?!”
“본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고수들을 파견해야 합니다. 해서 강소성 무역상들을 찾아 없애 버리고, 연가주를 억류해야만 합니다.”
명천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화르르륵!
불처럼 타오르는 살기다. 실제로 명천의 몸 곳곳에서 붉은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명우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더 강해지셨다.’
며칠 전의 가주님과 지금의 가주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氣)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의 증가가 무조건 실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기운을 무의식중에 뿜을 정도면 무공 수위도 높아졌다고 봐야 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일단 진정하셔야 합니다.”
욕 들어 먹을 걸 각오하고 한 말이었다.
놀랍게도, 한참을 씨근덕거리던 명천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진 일이지만, 이 산만 넘으면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네. 흥분해서 대처할 일이 아니지.”
명우산이 고개를 숙였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연호정은 아직이라고?”
기습처럼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명우산에게는 그러했다.
“그렇습니다.”
명천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 개자식의 아들놈답게 제법 짖을 줄도 안다 이거지?”
“저희의 상상 이상으로 강합니다. 마음 같아선 병력을 동원해 쓸어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이지. 나도 아네. 굳이 어린놈 하나 잡자고 힘 뺄 이유는 없어.”
다행이었다.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지만 냉정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오늘만 지나면 연가는 무림공적(武林公敵)이 된다. 하지만 연위가 그걸 알아채서는 안 돼. 놈도 대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하니, 서신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겠군.”
“그렇습니다.”
“즉, 놈의 시선을 돌릴 결정적인 한 수가 필요하다는 게지?”
“명민하신 판단입니다.”
명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가의 사검(死劍)을 전부 보내면 연가를 멸문시킬 수 있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그렇습니다. 게다가 연가 내에 심어 두었던 모용가의 세작도 뽑힌 마당입니다. 사검의 피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그럼 굳이 사검을 파견할 이유가 없겠구먼.”
“예?”
명천이 포악한 미소를 지었다.
“놈은 칠대세가의 가주야. 연가를 압도할 만한 병력을 보내도, 가주를 없애 버릴 수는 없어. 명분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명분을 만들면 연위도 없애 버릴 수 있지.”
“예?!”
“내가 갈 것이네.”
명우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천의 두 눈이 기이한 쾌락과 무서운 야망으로 이글거렸다.
“천하제일가의 가주가, 칠대세가의 가주를 징치하러 가는 걸세. 대화?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아. 무슨 구실이든 씌워 싸움을 일으키고, 연위를 죽일 걸세.”
“가, 가주님! 그것은……!”
“수장인 내가 직접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 만들 것이야.”
가장 확실한 방법인 동시에 가장 무모한 방법이기도 했다.
명우산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모용가주가 대회의에서 연가를 무너트릴 것입니다! 굳이 가주님께서 가실 필요가……!”
“내가 아니면 누가 적임자란 말인가!”
쩌렁쩌렁한 외침에 명우산의 입이 저절로 닫혔다.
명천이 살기를 뿜어냈다.
“그곳에 본가의 치부가 있어. 그 사실이 임시 무림맹에 들어가면, 연가는 물론 우리에게도 극심한 타격이 올 거야.”
“그,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네. 이 기회에 우리가 강소성을 잡아먹으면, 진정한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야.”
명우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기실, 명천이 연가로 가도 상관은 없다. 아니, 그 말마따나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왜일까? 불안했다.
하남 무림에 흐르고 있는 묘한 전운(戰雲)이 강소성까지도 번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전운이 감도는 곳으로 가주가 직접 간다고 한다.
“그리고.”
화르르륵!
명천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무서운 기세를 뿜었다.
그의 얼굴에선 황홀함이 피어올랐다.
“선조께서 남기신 이 천하제일무(天下第一武)를 시험키에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
“……!”
“자네가 전에 그랬지? 십 년 후에는 성천십삼좌에 오를 만한 고수가 연위라고.”
“그것은 그저 저자에 도는 소문…….”
“확인해 보세나.”
명천이 살기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놈에게 정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구주명가의 주인인 내가 직접 시험할 것이다.”
* * *
“지금 당장 명가의 남문(南門)과 동문(東門)을 주시하시오. 하남에 있는 개방도를 전부 모으시오. 무조건 명가를 주시해야 하오.”
“가, 갑자기 왜?!”
“명가주가 강소성으로 갈 가능성이 크오.”
“뭐? 직접?!”
“놈들은 대회의에서 본가가 무림공적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소. 말하자면, 이제 처리할 일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요.”
“아, 아무리 그래도 명가주가 간다고는…….”
“명가주든 명가주가 아니든! 최소한 본가를 압도하는 전력을 보낼 거요! 놈들이 하남을 벗어나게 놔둬선 안 된단 말이오!”
“제기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당신 그거 확신할 수 있어?”
“경우의 수가 많은 게 아니라, 그것 하나밖에 없소! 임시 무림맹이 세워지면 무림맹 대표가 본가로 향할 거요! 명가 측에선 지금이 아니면 본인들의 치부를 없앨 방법이 없소!”
“치잇! 좋아! 이번에도 당신을 믿어 보…… 억?!”
“또 무슨 일이오?”
“놈들을 하남에서 내보내면 안 된다고?”
“당연하지 않소?!”
“우리만으로 부족하잖아? 어떻게든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오?”
“되든 안 되든, 지금은 부딪치는 수밖에 없소.”
“아니, 그래선 안 되지. 당신 지금 너무 급해.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만으로는 절대 명가 병력을 막을 수 없어.”
“일단 먼저 가겠소.”
“반나절만 기다립시다.”
“왜 그러는 거요, 대체?!”
“내가 묻고 싶다, 이 미친 인간아! 반나절만 기다려. 함께 갈 사람들이 있으니까.”
“뭐……?!”
“명가가 움직인다 해도 남하 속도에 한계가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중원 전역의 샛길은 개방이 꽉 쥐고 있으니까. 반드시 명가를 앞지를 수 있을 거야.”
“…….”
“한 번 믿고, 두 번 믿고, 세 번 믿어 봐.”
쿠구궁!
명가의 남문이 열렸다.
“가자!”
히히힝!
수십 필의 건장한 말이 경쾌하게 달려 나갔다.
전신이 금빛 털로 반짝이는 명마(名馬)들이었다. 다리는 평범한 말보다 더 길고 가늘었으며, 뛰쳐나가는 속도는 능히 두 배는 됨 직했다.
한혈마(汗血馬)였다. 소위 천리마(千里馬)라 불리는 명마로, 값을 따지기 힘든 최고급 품종이었다.
그런 말이 무려 수십 필이다.
두두두두!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는 한혈마들 뒤.
한혈마보다 체고는 조금 낮지만, 훨씬 건장하고 단단한 체구의 말 여섯 마리가 거대한 마차를 끌고 있었다.
마차의 외양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면 황제가 타고 다니는 가마라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 널찍한 마차 안에는 명천이 타고 있었다.
오로지 천하제일가의 가주를 위해 만들어진 마차였다. 의자도 없이 거대한 비단 침상으로 꾸며져 편안한 이동이 가능했다.
“후후, 든든하구나.”
마차 전방에 작게 뚫린 창으로 수십 필의 한혈마를 모는 가문의 무사들이 보였다.
후우웅.
바람도 놀라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았다.
오십이 넘는 고수들이 제각기 한혈마를 타고 있었다. 한데, 그들의 자세에는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한혈마의 역동적인 움직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썩 괜찮군.’
저들 모두가 사검(死劍)으로 기른 방계 출신 고수들이었다.
사령(四靈)의 사대신공을 익히기 전에도 하나하나가 명학 형제 이상의 경지를 구축한 고수들이다. 그런 그들이 기존 무공에 어울리는 사대신공을 하나씩 골라 익혔다.
그런 고수가 무려 오십이 넘었다. 게다가 마차 뒤에는 적룡군(赤龍軍) 삼백이 뒤따르고 있었다.
백룡군처럼 그들 역시 내원의 병력으로, 사룡군(四龍軍) 중 가장 강한 이들이었다.
게다가 자신.
구주명가 역사상 최강의 가주가 될 자신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세(勢)가 작은 연가 정도는 손쉽게 쓸어 버릴 전력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게 아쉽긴 하지만.’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오십 고수들은 자신만큼 신공에 숙달하지 못했다. 적어도 일 년은 연성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연위부터 잡으면 돼.’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싸움을 걸 생각이었다. 연위는 결코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가는 끝장이다. 동시에 명가의 치부도 날려 버릴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책략이지 않은가.
본디 수장은 근엄해야 하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하지만 그 상식을 뒤엎어 예측 못 한 일격을 가하는 게 전략이란 것이다.
“크큭!”
기분이 좋다. 아주 좋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이 예전보다 더 튼튼해진 것 같았다. 봉황기(鳳凰氣) 덕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낮이 되었을 때.
히히히힝!
명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방의 한혈마들이 서서히 속도를 멈추는가 싶더니, 단체로 투레질을 했다.
‘뭐야?’
그때였다.
‘……?!’
명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우우웅.
저 멀리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무서운 살기가 담겼다.
보통 살기가 아니었다. 천하의 구주명가 가주인 자신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명천이 입을 열었다.
“어떤 놈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냐?”
“가, 가주님!”
목소리에 당황이 깃들어 있었다.
“뭐냐?”
“연호정입니다.”
“……뭐?”
“연가의 장남, 연호정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명천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호정? 그놈이 어떻게 알고?!”
“그, 그것은 저도 잘…….”
덜컹!
명천이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투우웅.
땅을 박찬다 싶은 순간, 이미 그의 몸은 마차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명천의 눈이 흔들렸다.
“여어.”
저 멀리 좌우로 나뉘는 길목 가운데.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도끼를 견봉에 걸친 호리호리한 청년이 서 있었다.
피 묻은 백색 장포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압권이었다. 전신에서 신비로운 기파를 발산해 내는데, 존재감이 어찌나 대단한지 절로 눈이 갔다.
“네놈이……?!”
“그렇게 오라고 소리를 질러 대도 안 기어 나오니, 뭐 어쩌겠어? 직접 찾아올 수밖에.”
명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삼십 장 밖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굉장한 내공이었다.
연호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잡았다, 이 도둑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