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81)
781화. 제국의 피 (6)
어전에서 나온 연호정은 곧장 연위를 찾았다.
쌕…… 쌕…….
침상에 누운 연위의 숨소리는 오늘 새벽보다 한층 더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여전히 얼굴에 핏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차도는 빨랐다. 들끓는 내공도 꽤 잠잠해진 것으로 보아 며칠 내로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아버지.’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연위의 손목을 잡았다.
우우우웅.
광명신단의 기운이 연위의 몸을 휘돌았다.
순리를 따르는 정종의 기운은 더 순도 높은 기를 만나면 그 안으로 스며들어 상생을 이룬다.
연호정은 광명신단의 기운으로 연위의 원기를 부드럽게 끌어 올림과 동시에, 탁기를 불사르고 남은 내공을 단전에 얹어 두었다.
우우우우웅.
광명신단의 기운이 연위의 단전에 머물며 들끓는 내공을 더더욱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그 기운을 회수하지 않고 연위의 단전에 고정시켜 두었다.
극소량이지만 무극을 돌파한 무신의 기운이었다. 연위의 단전에 남은 기운들이 광명신단의 기운으로 녹아들며 그 크기를 불렸다.
움찔! 움찔!
연위의 손끝이 연신 떨려 왔다.
푸스스스스.
놀랍게도, 점점 불어 가는 광명신단의 기운을 연위의 전신에 뻗어 있던 검극사기가 몰려와 감싸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빛처럼 순수한 진기가 점차 연위의 검극사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공을 집어넣었다면, 광명신기(光明神氣)가 검극사기를 온통 삼켜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극소량의 기운은 검극사기를 빨아들이다가 그 기세를 못 이기고 도리어 검극사기로 화하였다.
광명신기로 물들었던 기운이 다시 검극사기로 변하였으니, 그 기운은 이전보다 한 차원 높은 질을 갖게 될 터다. 곧바로 무극의 기운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공의 성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더는 주입하지 않아도 괜찮겠군.’
연호정의 이러한 기술은 격체전력(隔體傳力)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일반 격체전력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진기가 품은 성향과 밀도, 그리고 상대의 몸 상태와 진기의 성질을 모조리 꿰뚫어 봐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연위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그로 인해 진기의 성질과 움직임을 수월하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연위가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연호정의 이와 같은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아버지.”
연호정이 연위의 손을 잡았다.
연위의 손은 연호정보다 더 거칠었다. 그토록 무거운 중병을 휘두르는 손보다 더 단단한 굳은살이 박였다는 건, 연위의 수련이 연호정의 실전보다도 가혹했다는 증거였다.
“…….”
아버지라 불러 보았지만, 그 뒷말은 잇지 못했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서신 이유를 압니다.’
자신이 살기를 불태울까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위가 나선 진짜 이유는, 피를 빨아들이며 성장할 마귀의 힘을 억제하기 위함인 동시에 무의미한 학살극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차피 상대해 죽일 놈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적으로서 죽는 것과 짐승에게 물어뜯겨 죽는 것은 분명 다르다.
연위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연호정은 그것을 알았다.
“참…….”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참, 어렵게도 사십니다.”
기분 탓일까?
연호정의 눈에, 왠지 연위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새벽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몇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연호정은 연위의 거처를 나섰다.
“어수선하군.”
밖으로 나오니 사방에서 공사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발 빠르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와중에 수많은 금군이 곳곳에 배치되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이름 모를 관리들은 파괴된 건물의 잔해 속, 흩어진 책자나 죽간들을 살폈다. 그 옆에는 입궁 허가를 받은 하북의 무림인들 몇몇이 휴식 중인 무장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참 희한한 광경이군.’
검증되지 않은 사람의 입궁을 불허하는 황궁이 이토록 소란스럽다. 연호정은 자신이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저 멀리서 제갈아연이 뛰어왔다.
“폐하의 존안은 뵈었어?”
“응.”
“뭐라고 하셔?”
“그냥 이런저런 얘기 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
“애들은 몰라도 돼.”
“야!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은 거 잊었어?!”
제갈아연의 말을 무시한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애들은 어디 있어?”
제갈아연이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무슨 애들?”
“묵비, 강량, 진양 등등.”
혈옥마군과 싸울 때, 묵비는 한참 뒤로 물러나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개방의 거지들과 함께 움직였다. 어차피 황궁 안에서의 전투에 끼어들어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강량과 진양은 뒤늦게 도착해 폐허가 된 황궁을 돌보는 데에 힘을 쏟았다. 두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인부들 틈에 섞여 큰 힘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기우희는 개방의 거지들과 묵룡대의 보호 아래 있었다.
“묵 언니는 개방도들하고 있을 거고, 강 씨랑 진 씨는 모르겠네. 외궁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겠지.”
“그렇군.”
“아, 그리고.”
“왜?”
제갈아연이 엄지로 남쪽을 가리켰다.
“황궁 밖에 용두방주님이랑 후개가 와 있어.”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 * *
“그랬…… 으음?”
팽무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허,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니, 그 주인공이 알아서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렇구먼.”
땅바닥에 앉아 호리병에 든 술을 홀짝이던 화진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 일로 일어나신답니까?”
화진천이 콧방귀를 뀌었다.
“성천의 반열에 오른 고수가 오는데, 일문의 수장으로서 나름의 예를 갖춰야 하지 않겠냐?”
가득상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성천의 고수라도 배분이 다른데요.”
화진천이 뜨악한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정신이냐?”
“뭐가요.”
“협의니 의리니 해도, 강호 무림은 강자가 인정받는 세상이다. 그중 성천이라면 무림인 모두에게 경의를 받아도 부족하지 않을 존재지. 거기에 배분은 왜 따지는 거야?”
“……그런가?”
“무림인에게 무공은 수단이자 목적이고, 나아가 삶 그 자체다. 나이가 어리든 배분이 낮든, 지닌바 재능을 갈고닦아 중원 최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면 응당 예를 취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여태 한 번도 그런 적 없으셨던 양반이.”
“어중이떠중이랑 성천이랑 같냐?”
“듣는 어중이떠중이들 다 화병 걸려 죽겠는데요?”
두 사제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
훅!
외성 성벽을 단숨에 뛰어넘은 연호정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팽무강이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셨는가.”
“예. 방주님과 후개가 오셨다고 들어서요.”
연호정이 화진천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권을 취했다.
“용두방주님을 뵙습니다.”
“연 대수를 뵙네.”
당연히도 연호정은 당황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성천의 위에 오른 강호의 최고수에게 격식을 차리는 건 당연한 일일세.”
“안 그러셔도 됩니다. 남사스럽게 무슨…….”
연호정의 말을 그대로 무시한 화진천이 가득상의 뒤통수를 때렸다.
“인사해, 인마.”
가득상이 투덜거리며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이오.”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빨리 뵙게 되었소.”
퍽!
화진천이 다시 한번 가득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가득상이 억울한 눈으로 화진천을 바라보았다.
“또 왜요!”
“이 새끼야, 예를 갖추라니까 그게 뭐야? 아는 사람이다, 이거냐?”
“그럼 아는 사람이니까 오랜만이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아, 뒤통수야. 친구 앞에서 쪽팔리게.”
“이놈 새끼야! 너도 곧 한 방파의 주인이 될 몸이다! 공사 구분 정도는 해!”
가득상이 투덜거렸다.
“알았다고요. 어색해서 그러는 걸 참나.”
“하이고, 이놈 방주직 맡으면 십만 개방의 위상에 똥칠을 하겠구만.”
“안 그래도 더럽다고 소문이 자자한 방파인데 똥칠 정도야 뭐.”
“진짜 뒈지고 싶냐?”
“……죄송합니다.”
호랑이처럼 눈을 부라리는 스승 앞에서는 제아무리 강단 넘치는 가득상이라도 자라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화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자네도 자네 위치를 분명하게 자각해야 할 거야.”
“그러고 있습니다.”
“강호에도 강호 나름의 예의라는 게 있네. 그런 걸 무시하다가는 안 좋은 소문이 돌거나, 최악의 경우 별일도 아닌데 원한을 사게 돼.”
“…….”
“누가 있어 성천의 고수와 원한 관계를 맺고 싶겠느냐마는, 자네에게는 딸린 식구도 많잖나? 자네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본인의 위치를 떨어트리는 발언은 삼가는 게 좋아.”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황제에게 들었던 얘기와 비슷한 말이었다.
화진천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성천에 올랐다고 예전보다 한결 낫구먼. 사람이 제법 부드러워진 것 같아.”
가득상의 방정맞은 주둥이가 또 한 번 주인의 의지를 거슬렀다.
“저 귀신 같은 인간 때문에 독으로 고생했던 분이 속도 좋으셔.”
퍼억!
가득상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맞았는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바닥에서 바르작거렸다.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그때 그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화진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 덕분에 당가의 원한을 사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지난날의 일은 다 잊자고.”
“그래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지요.”
“앉게. 의자도 뭣도 없지만.”
“예.”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팽무강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한데 독이라니? 무슨 독?”
화진천이 손을 저었다.
“들어서 좋을 것 없네. 앞날 얘기나 하자고.”
“……흐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팽무강의 게슴츠레한 눈빛을 무시한 화진천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자네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네.”
“저 역시 이것저것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뜻이 맞았군. 일단 자네 얘기부터 먼저 듣겠네.”
연호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용두방주님께서 아시는 한도 내에서, 더 이상 중원에 삼교의 끄나풀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대뜸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
화진천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간 받았던 정보들을 다시 한번 검토하는 것이다.
잠시 후.
“개방의 정보만 보면, 이번 황궁 전투로 삼교의 끄나풀들은 전부 정리되었네.”
연호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팽무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중원은 넓어. 본방의 방도들이 천하에 뻗어 있다지만, 스스로를 숨기고 있다면 잡아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개방의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라면 최소한 큼직한 덩어리들은 치워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
“다행입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을 하겠습니다.”
“말씀하시게.”
“통천진인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화진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나도 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