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83)
783화. 제국의 피 (8)
예상대로 황제는 연호정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다만 죄인은 철저히 뇌옥에서 만나야 하며, 그와의 대담에 최측근을 붙이겠다는 조항을 달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처사였다. 그 도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혈옥마군 곽준을 도와 황궁을 좀먹던 대역죄인이었다. 만에 하나 무림인들이 도사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뇌옥으로 향할 때였다.
“어이.”
일행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냉담한 얼굴의 곡경이 팔짱을 낀 채 반파된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
화진천과 가득상, 팽무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들 모두가 강호를 대표해도 무방할 일대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남자가 입을 열 때까지, 누구도 그의 존재를 몰랐다.
다만, 팽무강은 단숨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전투 도중 스치듯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곡경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말투가 달라졌는데? 꼴에 어른들 앞이라고 예의라도 차리는 거냐?”
순간 가득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듣고 넘어가 주기에는 상대의 말투가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가득상은 그저 고요히 곡경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사람에서 전우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름대로 대우해 드리는 겁니다.”
“지랄 났군. 항상 이런 식이냐? 상대방 가지고 놀다가 흥미 떨어지면 웃으면서 떨쳐 내는 거 말이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내가 언제 선배를 가지고 놀았습니까?”
“하여간 웃기는 놈이야. 폐하께서 왜 너 같은 놈에게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어.”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제 폐하의 안목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곡경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정말 건방진 놈이라니까. 호부 밑에 견자가 나는 법은 없다지만, 너처럼 음흉한 늑대는 태어나는 모양이지?”
“나를 어떻게 보시든 상관 안 합니다. 그래서, 애써 기척까지 숨겨 가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행을 슥 둘러본 곡경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그 말이 끝이었다. 당연히 따라올 거라 확신하는 듯, 그는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폐하께서 윤허하신 사항이니, 뇌옥 쪽에도 진즉 연락이 갔을 겁니다.”
화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
가득상이 물었다.
“누구길래 태도가 저리 딱딱한 거요?”
팽무강이 연호정 대신 답해 주었다.
“광혼귀군.”
“……시벌, 도끼눈 안 뜬 게 다행이었군.”
화진천이 혀를 찼다.
“사적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여긴 황궁이야. 밖에서 하던 대로 설쳤다가는 십만개방도 전체를 끌고 와도 너 못 살린다.”
“아니까 험한 말 안 뱉은 거 아닙니까.”
“잘한다, 아주.”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따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럼세. 몸조심하게.”
“뭐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연호정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곡경의 뒤를 따랐다.
곡경의 걸음은 빨랐다. 의식하지 않고 걸어도 그의 보행 속도는 범부의 달음박질만큼이나 빨랐다. 연호정의 보행 역시 곡경에 뒤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아아아아.
휘몰아치는 삭풍이 헐벗은 나무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황궁 외성에서도 꽤 외진 곳이었다. 이번 전투에서도 멀쩡한 공간이었는데, 워낙 구석진 곳이라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벗었지만, 나무는 많았다. 작은 숲이었다.
그리고 그 숲의 중앙에는 큼직한 공터가 있었다.
스르륵.
그제야 걸음을 멈춘 곡경이 유독 커다란 나무 밑을 파냈다.
‘음?’
퍽퍽 파헤친 땅속에서 나온 것은 꽤 큼직한 상자였다.
곡경은 상자 위에 흩어진 흙을 대충 털어 내곤 평평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았다.
“앉아라.”
연호정은 순순히 그가 시킨 대로 맞은편에 앉았다.
끼이익.
상자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는 곡경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뭘까, 하고 구경하던 연호정은 이내 김샌 웃음을 지었다. 곡경이 꺼낸 것은 질 좋은 자기로 만든 술병 두 개였다.
곡경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웃기냐?”
“웃기지요. 뭐 얼마나 귀한 술을 담았길래 천하의 귀군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렇게 조심스럽습니까?”
“그냥 술이 아니다. 평범한 자기로 보이는 이 술병도 백년한옥(百年寒玉)이야.”
“뭔지 모릅니다.”
“무식해서 좋겠다.”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곡경이 술병 하나를 연호정에게 건넸다.
“잔은 없다. 마셔 봐.”
연호정이 마개를 열었다.
‘호오.’
병에서 고아하고 묵직한 향이 흘러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가죽 냄새가 섞인 듯한 묘한 주향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간 마셨던 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술이지만, 쉽게 찾아보기 힘든 명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의 주둥이를 입에 대고 천천히 술을 흘려보낸 연호정이 깜짝 놀랐다.
“허어, 이거 상당히 독한데요?”
언제 마셨는지, 캬! 하는 감탄사를 토해 낸 곡경이 말했다.
“서역에서 넘어온 물건이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중원의 술과는 전혀 다르지.”
“이거에 비하면 우리 술은 상당히 화려하군요.”
“그렇지.”
한 모금 더 마셔 본 연호정이 웃으며 병을 내려놓았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온통 타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그려.”
“빈속이냐?”
“그만큼 독하다는 겁니다. 물론 빈속이기도 합니다.”
“술은 원래 빈속에 마시는 거다.”
“그 되지도 않는 지론으로 몇 사람이나 술독에 빠트려 죽였습니까?”
“건방진 놈.”
곡경 역시 상자 위에 병을 놓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작건대 상당히 애지중지하시는 술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네놈 주둥이에 넣어 주긴 아까운 술인 건 확실하지.”
“그 좋은 술을 이 요망한 주둥이에 넣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달리 할 얘기가 있으십니까?”
스르륵.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상당히 방만한 자세로 연호정을 바라보던 곡경이 툭 던지듯 물었다.
“폐하의 제안을 거절했다면서?”
김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는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피로가 어렸다.
“역시 그거였습니까?”
“뭐 다른 이유라도 있을 것 같았냐?”
“짐작은 했습니다.”
연호정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해서, 나를 설득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설득? 우스운 말이로군. 내가 왜 널 설득하겠냐?”
“에?”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었습니까?”
“설득할 필요도 없지. 당연히 혼례를 치러야 할 테니까.”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씁니까?”
“황제 폐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 이유를 아느냐?”
곡경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나른했다. 적어도 연호정보다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제안이라고 했지만, 기실 그것은 황명과 다르지 않아. 네놈이 사람이길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이 중원이라는 대지에서 산다면 절대 황명을 거역해서는 안 돼.”
“황명이 아니라 제안이었습니다. 그건 분명히 해 두지요.”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든, 천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명령이고 운명이야. 네놈 간덩이가 큰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경우 없는 놈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래, 솔직히 경우 없다는 생각도 종종 했지. 하지만 그건 대상이 나였을 때의 얘기야.”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곡경이 말을 이었다.
“네놈의 생각을 안다. 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아. 너는 삼교의 손에서 중원을 구하는 것 이상을 원하지.”
구하는 건 당연하고,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릴 생각이다.
연호정의 생각은 언제나 그랬고,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변함이 없었다. 곡경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네놈도 알겠지만, 지금 와서 그건 무림의 힘만으로 불가능해. 어떤 조직이 우위에 있느냐를 떠나, 황궁의 도움 없이는 네놈이 원하는 결과를 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궁 역시 삼교를 무너트리고 싶을 텐데요.”
“그래서 폐하께서는 네놈에게 그런 제안을 하신 것이지.”
“윗사람의 마음을 읽어 보려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황제 폐하신데요.”
“이런저런 쓸모없는 격식 따위 내던지는 대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곡경은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약간은 말장난에 가까운 연호정의 대답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폐하께서 보내서 오신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당연하지. 폐하께서는 그리 옹졸하신 분이 아니야.”
격식을 내던지고 얘기하자고는 했지만,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건 하겠다.”
“선배의 과거나 어떻게 황제 폐하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도대체 왜 나를 그리도 신경 쓰시냐는 겁니다.”
곡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황제 폐하께서 네놈을 원하시는데, 그럼 널 신경 쓰지 누굴 신경 쓰겠냐? 본 적도 없는 네놈 동생을 신경 써야 하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라기에는 너무 집착적으로 보여서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까놓고 말해 봅시다. 그래, 분명 나는 남들이 보기에 놀랄 만한 위치에 도달했습니다. 이립 전에 무극을 열었으니, 이는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곡경의 눈이 깊어졌다.
화통하고 날카로우며, 가끔은 과격하고, 때로는 악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호정은 한 번도 자신의 이름값이나 이룬 위치를 자랑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축소하기 바빴다. 연호정에게 중요한 것은 무공이지, 남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호정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은 뛰어난 사람이라고.
얼핏 들으면 자랑 같지만, 연호정은 자랑이나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나아가 선배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택하는 게 나을 겁니다. 아니, 그게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바쁩니다. 바쁜 걸 넘어 언제나 사선 위에 서 있지요. 무림은 무공이 강한 자가 대우받는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초고수를 끌어들이려는 것은 대국적으로 볼 때 결코 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무공, 영향력, 가문의 이름값 등등.
여러 면에서 연호정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주목받는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연호정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저보다 무공의 경지는 낮더라도 가능성 있고 협의가 넘치면서도 안목 역시 탁월한, 심지어 가문도 좋은 젊은이들은 많습니다.”
“대답에 앞서 나도 하나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곡경의 눈도 연호정처럼, 아니 그보다 더 진지해졌다.
“너, 단순히 혼사가 싫은 거냐? 아니면 황실 사람과 연을 맺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냐? 그도 아니면, 마음에 둔 처자라도 있냐?”
“…….”
“도대체 왜 이 혼사를 거부하는 거냐?”
연호정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내가 너무 잘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