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93)
793화. 흑도의 패권 (4)
씻고 배를 채웠으며, 옷까지 새로 갈아입은 일행은 빠르게 묵룡부로 향했다.
묵룡부로 향할수록 일행을 주시하는 눈이 많아졌다. 보이지 않는 눈, 흑도 무림의 정보원들이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 수많은 시선 속에서, 연호정은 처음 묵룡부로 왔을 때를 떠올렸다.
무종문의 후예를 자처하며 왔던 길, 호남 어디에서나 그들을 주시하는 눈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당장 정보원들의 시선에서 묻어 나오는 분위기가 달랐다.
과거엔 새로운 존재를 향한 경계와 냉정함만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익숙한 존재를 향한 여유와 무림 최강자 반열에 오른 고수를 보는 동경이 느껴졌다.
그 너무나도 달라진 시선에서, 연호정은 낯익은 반가움을 느꼈다.
강자를 동경하는, 순수하게 불타는 시선들.
백도 정파의 무림인들에게선 보기 힘든, 힘을 향한 맹목적인 갈망이 내재되어 있는 짐승들의 눈.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거세어졌다.
긴장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이, 회귀 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익숙한 흥분이 연호정의 심박수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타지에 나가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연호정은 묵룡부에 입성했다.
* * *
연호정이 무극에 오른 후 돌아와 만났던 그때 그 야산 언덕에, 양천은 있었다.
평평한 바위 위에 여섯 병의 술병과 몇 가지 요리가 놓여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자연이 만들어 준 술상은 그 자체로 운치가 있었다.
멀리서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왜일까?
평소라면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겠다고 말했을 묵비가 물끄러미 연호정을 주시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못생김.”
“……야.”
묵비가 강량과 진양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한 발 나서는 진양을 강량이 막았다.
“그러지요. 술 한잔하고 돌아오십쇼.”
강량은 투덜거리는 진양을 데리고 묵룡부 입구로 향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너는 왜 안 돌아가?”
“왜요? 나 있으면 안 돼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부관이 있으면 안 될 자리가 어디 있겠어.”
묵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가요.”
두 사람이 양천에게 다가갔다.
예전처럼 양천은 연호정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이 왔음을 알고 있었지만, 안주를 집어 먹으며 술을 마실 뿐이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사람 왔는데 돌아보지도 않으십니까?”
그제야 양천이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
가만히 그를 보는 양천의 얼굴에 반가움과 떨떠름함이 번갈아 떠올랐다.
“영약 먹었나?”
“갑자기요?”
“또 늘었는데?”
“사람은 세상에 나가야 성장하는 법입니다.”
“……그래도 이건 도를 넘은 것 같은데? 어째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기만 하면 한 수, 한 수 강해져서 와?”
“신나게 싸우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영약 먹었나?”
“영약으로 상승할 만한 경지가 아니라는 거, 부주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만년온액(萬年溫液)이나 공청석유(空淸石乳) 같은 거면 얘기가 다르지.”
“그거 진짜 있는 겁니까? 구경은커녕 어디에 누가 한 방울이라도 마셨다는 말조차 못 들어 봤는데요.”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있어. 내가 공청석유 한 방울 마셔 봤지.”
뜬금없이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연호정과 묵비도 그 말에는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요?”
“내가 자네한테 거짓말해서 뭐 하게? 이십 년 전이었나? 감숙성 인근에서 한 번 먹어 봤지.”
연호정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운이지, 뭐. 약장수가 팔더라고. 몸에 좋은 약이라면서 은자 오십 냥에 내놓았어.”
연호정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은자 오십 냥이요? 한 방울만 해도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을요?”
“가치를 모르더군.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긴 했겠지. 하지만 딱 봐도 뭔지를 모르는 것 같더군. 하긴, 알았으면 그 돈에 내놨겠나?”
“허어.”
“솔직히 나도 긴가민가했어. 그런 거에 워낙 흥미가 있다 보니 젊었을 적에 문헌도 뒤져 보고 향, 색, 기타 특성들을 줄줄 외우고 있었기에 알아봤지. 그래도 설마 정말로 발견할 줄은 몰랐어.”
연호정은 양천의 표정과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은자 오십 냥 주고 그 귀한 걸 구매한 겁니까?”
“아니.”
“예?”
“아득바득 깎아서 은자 마흔 냥에 샀지.”
“……그걸 또 깎았습니까?”
“당연하지. 무림 정세에 밝거나 강한 무림인이라는 티를 내지 말아야 했어.”
“아?”
“물론 그때도 난 강했지만, 나보다 강한 인간들이 많았어.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아무리 강해도 우르르 몰려와서 두들겨 대면 뉘라서 버틸 수 있겠나?”
연호정이나 양천이나, 지금은 각자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지만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그렇지 않다.
무림에서 실력의 삼 푼을 숨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면, 상황에 따라 언제든 스스로를 감출 줄 알아야만 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생기더라고.”
“그래서, 무공이 상승하긴 했습니까?”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혈도가 깨끗해지더군. 약 자체에 영성(靈性)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지. 순간적으로 상단전까지 완전하게 개방되는 그 감각, 처음이었어. 운기는커녕 마시고 앉기만 했는데도 이미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놨더군.”
“허어.”
“재미있는 일이지. 묵룡부를 일구기 전까지, 평생에 그런 영약은 입에도 못 댈 줄 알았는데 용케도 인연이 닿았어.”
양천은 인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것은 인연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 사이에만 인연이 있는 게 아니다. 보검에도, 영약에도, 그리고 무공 비급에도 다 인연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인연이 선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는 전적으로 인연의 시험대 위에 오른 사람의 몫일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되었구만. 문제는 이게 아니겠지.”
양천의 눈이 빛났다.
“황궁의 일은 들었네.”
“예.”
“비왕 건도 들었고.”
“예.”
“하나의 목적을 갖고 나갔지만, 역시나 여러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군.”
“한 번 나갈 때 잡스러운 일까지 다 처리해야 속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그래서 이런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자네의 무공이 얼마나 강하냐를 떠나서 말이야.”
양천이 턱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한잔하지.”
“좋지요.”
“활쟁이 소저는?”
묵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왜? 내가 술 취해서 자네 상관 때려죽일까 봐 그러나?”
묵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연호정의 등 뒤에 설 뿐이었다.
양천이 투덜거렸다.
“좋은 수하를 둬서 좋겠군.”
“수하라기보다는 친구입니다.”
“나도 몇 명 데리고 올 걸 그랬나 보이.”
연호정이 양천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보고는 다 받으셨겠지만, 따로 말씀드릴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현장에서 뛰는 사람이 직접 보고 들은 걸 말하는 건 보고서와 차원이 달라.”
연호정은 묵룡부를 떠나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말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비왕이 광혈교의 사제장이었다…… 원래는 황궁의 무장이었고?”
“그런 모양입니다.”
“귀군이 부리던 수하들의 신법도 그렇게 대단했다면, 비왕이 황궁 무고에서 얻었던 신법을 기반으로 삼교 놈들을 가르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 질려 버릴 것만 같군. 도대체 그놈들이 없는 곳이 어딘가? 삼교 놈들이 황궁에 암약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세상에 이 정도일 줄이야 뉘라서 상상이나 했을까.”
“바퀴벌레 같은 놈들입니다. 다만, 용두방주의 말로는 개방의 정보력 밖은 몰라도 그 안에서만큼은 삼교의 끄나풀이 없다고 합니다.”
“있겠지, 여전히. 굳이 캐낼 정도의 병력이 존재하지 않을 뿐. 그래도 그 정도면 얼추 청소는 잘되었다고 할 수 있겠어.”
“맞습니다.”
“고생 많았네. 한잔 들게.”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싸늘한 바람에 안주는 진즉 다 식어 버렸다. 그래도 한 점 씹으니 맛은 좋았다.
이번에는 양천이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벌써 삼군(三君)은 다 만나 본 셈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군은 여기에 있고, 귀군은 황제의 휘하에 있고, 마군은…… 그렇게 망가져 버렸군.”
“…….”
“마군 놈, 권신과 한바탕 붙었었다고?”
“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만, 땡중이라고 하는 걸 봐선 무허대사가 맞을 겁니다. 천하의 어떤 무승이 마군을 압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긴, 그렇겠군.”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 말했나? 혈옥마군의 재능이 엄청나다고. 십 년 후면 중원에서 첫손에 꼽히는 강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부주님 아는 분이 그렇게 평가했다고 하셨었지요.”
“그 녀석이 그리 말했다면, 마군 놈의 재능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을 거다. 그런 놈을 기어이 이겼다니, 자네도 정말 대단하구만.”
“제힘으로 이긴 게 아닙니다. 끝까지 버티기만 했을 뿐, 귀군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제가 졌을 겁니다.”
“……그래?”
“확실히 강하더군요. 상성 이전에 실력에서 졌습니다. 저도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양천은 연호정의 이런 면이 정말 무섭다고 생각했다.
무공 성장의 때를 안다? 적의 약점을 간파해 낸다? 신에 이른 안목과 통찰력으로 상황을 읽는다?
다 무서운 능력이다.
하지만 진짜 대단한 것은 서른도 전에 성천에 이름을 올렸으면서도 스스로가 약하다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냉정함이었다.
연호정에게는 모두가 경탄해 마지않는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자만하거나 오만하게 굴지 않는 장점이 있다. 백도 정파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흑도 무림에서 이런 성격을 가진 놈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아까운 일이야.’
연호정을 보는 양천의 눈빛은 유독 복잡했다.
‘이놈이 내 제자였다면, 진정 천하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을 텐데.’
냉정하게 보면 연호정은 절대 흑도로 넘어올 수 없다.
당연하다. 이놈은 백도 무림의 명문인 벽산연가 소속이었다. 심지어 장남이기까지 했다.
제아무리 막 나가는 성격이라도, 뿌리를 명문가에 둔 이상 흑도로 넘어올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연호정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가 보여 주는 모습들이 도무지 백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걸 넘어 영락없는 흑도다. 연호정의 태생이 흑도였다면, 수천 년 무림사에 드디어 최고의 걸물이 등장했다며 모두가 손뼉을 쳤을 것이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양천은 연호정을 놓지 못했다. 절대 백도로 넘어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이놈 실력이라면 세상을 크게 바꿀 수 있을 텐데.’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입을 열었다.
“어디…….”
“말씀 전에.”
“……?”
“부주님께 드릴 말이 있습니다.”
“보고는 끝난 게 아니었나?”
“공적인 보고는 끝났고, 공과 사가 잔뜩 버무려진 위험천만한 내용이 남았습니다.”
훅.
연호정의 기도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자리에서 생사결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