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96)
796화. 흑제(黑帝) (1)
왜일까?
양천은 생각했다. 연호정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고 냉정한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덜 충격적이라고.
이상한 일이었다.
말에 담긴 공격성과 냉정함, 그리고 현실은 점점 독해지는데 받는 충격은 약해지고 있다니.
‘왜?’
알 수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속을 찔러 대는 녀석 앞에서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조금씩 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희한한 상황이었다.
산불처럼 불타올랐던 자신의 기파는 어느덧 완전히 갈무리되어 있었다. 잠잠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왜지?’
냉정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왜 이토록 냉정해졌을까.
‘아니, 냉정하지는 않군.’
양천의 이성은 자신의 상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렇다. 마냥 냉정하지는 않다. 그의 가슴은 강렬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양천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 후 크게 놀랐다.
파도치는 자신의 감정 속에는 후련함과 기쁨, 그리고 미련이라는 단어가 뒤섞여 있었다.
‘후련하다?’
도대체 무엇이?
‘기쁨?’
뭐가 좋다는 것이지?
‘미련이라…….’
난 어떤 것에 목을 매달고 있나.
연호정을 보는 양천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일통(一統)이라는 건 유화(宥和)이자 결합이오.”
“…….”
“힘으로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란 말이오. 그건 당신도 알고 있잖소?”
“…….”
“설령 무력으로 일통했다 한들, 일통 이후의 체제와 분명한 미래를 설계해 놓은 게 아닌 이상 그 세상은 십 년도 못 가 무너져 버릴 것이오.”
“…….”
“내가 무림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시오?”
양천의 눈이 조금씩 충혈되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내가 무림을 배신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오.”
“그게 뭐지?”
양천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꽤 놀랐다. 갈라지고 둔탁한 그 목소리는 도통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림과 황궁이 다른 영역이라는 것.”
“……?!”
“관무불침? 말장난이오. 무림은 언제나 제국 소속이었소. 그저 관무불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조약으로 서로를 모른 척했을 뿐, 무림인 역시 제국의 신민이란 말이오.”
냉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무림 역시 제국에 포함된 세상이라는 걸 양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법이다.
양천은 무림이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 무림의 구성원은 제국의 신민이다. 고로, 무림은 제국의 일부다.
“나는 무림을 배신한 것이 아니오. 과거와 달라진 지금의 상황에서, 천하를 이루는 백성들 대다수가 조금이라도 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를 바랄 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모르오. 다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무림인들 때문이오.”
“뭐?”
“무림인은 자유를 갈망하오. 강호에 풍류와 낭만이 있다고들 하지. 그러나 세상은 마냥 밝고 아름답지만은 않소.”
“그건 나도 안다.”
“알지만 실감하지 못했을 거요. 무림인은 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이들이오.”
“……!”
“차라리 이름난 강자들에게는 명성이라는, 직접적인 제재는 아니더라도 체면이라는 정신적 구속구가 존재하오. 그러나 이름을 알리지 못한 어중간한 무림인들은 백성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소.”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일류도 안 되는 무림인들 셋이 모이면 어지간한 마을 하나를 잡아먹소. 살인, 폭행, 강간 등 마음 내키는 대로 백성을 유린하며 그곳의 왕으로 군림하지.”
“…….”
“그들은 누가 관리하오? 백도 정파가? 물론 그런 놈들을 발견하는 족족 잡아 죽이고는 있소. 하지만 그걸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는 거요?”
“…….”
“그도 아니면 당신이 할 거요? 천하를 안정시켜야 하니 그런 도적놈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찢어 죽이겠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소?”
“…….”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각성하게 되는 때가 오지 않는다면 분란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오.”
“법은 자유를 침해하기도 한다.”
“법 없는 자유는 방종이요, 자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법은 폭력이오.”
“…….”
“법은 완전한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외다. 한 꺼풀, 한 꺼풀 쌓이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오.”
“권력자들에게 통할 얘기는 아니구나.”
“설마 법을 이용해 제 배 속을 채우는 권력자들은 어쩔 거냐는 말로 법의 폐해를 논하려는 거요?”
“…….”
“법에는 죄가 없소. 법을 악용하는 놈들이 죽일 놈들이지.”
“…….”
“법을 농락하는 자들이 있다 해도 법은 존재해야 하오. 물론 법만 따로 존재해도 한계가 있소. 법과 도덕, 둘이 함께 공존해야 그나마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할 수 있을 거요.”
양천이 코웃음을 쳤다.
“희대의 열사 나셨구만. 언제부터 그리 세상을 걱정했지?”
“삼교 놈들을 없애 버릴 생각을 하면서부터.”
“……?”
“놈들을 놔두면, 언젠가 내 가족과 친구들을 죽일 거요. 당장 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천하를 생각했소.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 온 지금, 나는 이곳에 있소.”
양천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연호정이 착잡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일통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오. 나는 철학(哲學)을 모르오.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오. 법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만, 행정 능력은 없소.”
“…….”
“그저 내가 살아오며 겪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가…… 그 고뇌에 대한 답이 이것일 뿐이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네놈이 천하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과 같이, 나는 나의 야망을 풀어헤칠 미래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네 말마따나 황궁과 무림이 합쳐져 새로운 제국으로 통일되기 위해선 일단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삼교가 없어지는 것.”
“그렇소.”
“그렇다면 네놈의 그 꿈 역시, 나의 야망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는 공상에 불과한 것이야.”
“그래서 나는 새 세상의 관리자는 될 수 없소.”
“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일은 황제 폐하와 휘하의 똑똑한 사람들이 맡아야 할 일이오. 나는 그저 삼교를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오.”
“무슨 헛소리냐? 그렇다면 결국 달라지는 게 없지 않느냐?”
“있소.”
“대체 뭐가 달라진단 말이냐?”
“백도 무림 명문가의 자손으로서가 아니라, 무림인 연호정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다르오.”
“……?!”
“그래서 당신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발상이 나왔소. 백도 무림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도, 나는 새 시대를 위해 우리 세상을 침공한 악마들을 제거할 것이오.”
“……!!”
“그리고 나의 이 다짐을…… 내 부친께서도 용인하실 거라고 믿소.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와 가문이 무척 힘들어지리란 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소.”
또 한 번, 양천은 침을 삼켰다.
연호정의 눈이 불을 뿜었다.
“나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살아왔소. 나에겐 뒤가 없었소. 내 목적은 언제나 하나였소.”
“…….”
“그런 내게 또 다른 바람이 생겼소. 천하인들의 안녕이 그것이오.”
“…….”
“그리고 그 바람이 생긴 이유는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능력 좋은 위정자 덕분이오.”
“그가 황제냐?”
“그렇소.”
“네가 보기에 황제의 능력이 출중했다, 이 말이군.”
“그래도 나는 목숨을 걸어야 하오. 지금까지와 같이, 언제나처럼.”
왜일까?
양천은 연호정의 눈이 유독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손가락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듯 목젖도 꿈틀거렸다.
‘……떤다고?’
그렇다. 연호정은 지금 떨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이 희대의 천재가, 그 어떤 순간에도 해결책을 척척 제시하는 괴물이 왜 떨고 있는 것일까?
“나는 말이오.”
연호정은 짧은 기침으로 목을 긁었다. 울컥 올라오는 뭔가를 진정시키는 듯,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잠시 세상을 생각한 적은 있어도, 언제나 나의 목표가 우선이었소.”
“…….”
“하지만 나의 목표를 발판 삼아 훨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나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소.”
“…….”
“이제 이 싸움은 전쟁의 결과만을 따지는 싸움이 아닌, 진짜 미래를 건 싸움이 되었소. 적어도 내게는 그렇소.”
양천은 말없이 연호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오.”
“…….”
“결과가 명명백백하다 한들, 한 사람이 품은 일생의 꿈을 부정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소. 당신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는 상상할 수 없소. 누군가 내게 삼교를 없앨 수 없다는 확정적인 미래를 들려줬다면, 나 역시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오.”
“…….”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소.”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은 것도 아니고 그저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양천이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구나.”
“…….”
“네놈이 내 미래를 두고 왈가왈부한들, 아직 미래는 도래하지 않았다. 어떤 미래를 만드는가는 나의 문제지 너의 문제가 아니야.”
“모두의 문제요.”
“모두에게라면 그렇지. 하지만 다른 세상을 원하는 나에게는 아니다.”
“명백한 계획도 없이 일통 자체가 꿈이자 목표가 되어 버린 사람의 미래는 모두의 미래와 똑같소. 결국 많은 ‘자신’의 삶이 뒤틀릴 테니까.”
“…….”
“하나 묻겠소. 당신이 무림을 일통하면, 그 세상을 좋게 이끌어 갈 생각이오? 아니면 당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세상을 마음껏 유린할 생각이오?”
“……!!”
양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오늘 두 번째로 큰 충격을 받는 그였다. 연호정의 질문은 그토록 날카로웠다.
‘일통 이후……?’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연호정 말마따나, 어느새 그의 꿈은 일통 이후의 세상보다 일통 그 자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만히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당신은 세상을 유린할 만한 사람이 아니오.”
“……!”
“하지만 마땅한 통치 체제도, 계획도 없는 당신이 천하를 일통해 봤자 세상은 또 다른 난세를 맞이하게 될 것이오.”
“…….”
“나아가, 지금 상황에서 당신이 무림을 일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소.”
양천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당신이 지닌 목표를 향한 현실성과 당위성은 어디로 갔소?”
“…….”
“당신, 진정 무림을 일통하고 싶기는 하오? 아니면…… 흑도의 총수로서 그만한 야망도 없이 살면 안 될 것 같아 명확한 계획도, 불같은 열정도 없는 꿈이라는 이름의 미련을 붙들고 있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