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00)
800화. 흑제(黑帝) (5)
그리 바람 잘 날 없는 세상이었고, 근래 대형 사고들이 많이 터지는 바람에 천하가 몹시 뒤숭숭한 시기였다.
그중 흑도 무림에 한 줄기 충격적인 소문이 들이닥쳤다.
성천의 신흥강자 패왕이 묵룡부주 양천의 제자로 들어갔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이 자그마한 소문은 겨울의 삭풍을 따라 흐르며 이곳저곳으로 번져 나갔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런 헛소문은 예전에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연호정의 존재는 처음부터 흑도 무림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으로서 온갖 악랄한 흑도 문파를 깨부순 것도 모자라 세작이 되어 묵룡부에 침투했고, 그 이후 양천과 부드러운 관계를 쌓아 여러 일을 처리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도 연호정이 양천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많이 돌았다. 심지어 백도 명문의 자제인 연호정을 어릴 때부터 비밀리 가르친 양천이 지금에야 그를 제대로 활용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 양천의 제자가 될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걸.
심지어 연호정은 최연소로 성천에 등극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어쩌면 고금에서 가장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난 무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재를 백도 측에서 나 몰라라 내버려 뒀을 리 없다. 연호정이 양천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것저것 따져 봐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묵룡부 휘하에 새로이 정립된 흑도의 다섯 문파의 수장들이 묵룡부로 소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설마 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후, 장강수로채와 녹림십팔채의 총채주는 물론 묵룡부와 거래 중인 남부의 거상들까지 호남으로 모여들었다.
그야말로 흑도 거물들의 대대적인 집결이었다. 이 정도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 그런 소문이 돌기도 했다.
흑도 무림은 물론 백도 무림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묵룡부의 행보.
며칠 후, 묵룡부주 양천의 폭탄 발언이 전 무림을 강타했다.
“차기 흑도 무림의 주인, 묵룡부의 후계자 즉위식을 거행한다.”
후계자 즉위식.
그것은 곧 다음 세대 흑도의 주인이 될 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묵룡부의 후계자는 여럿 있던 제자 중 홀로 남은 부선이라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흑도인들은 안심하면서도 흥분했고, 그중 많은 사람은 불만을 품었다.
부선의 실력이 뛰어나고 재능 역시 대단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여자가 차기 묵룡부주가 된다는 사실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불만을 밖으로 터트리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양천이 직접 정한 일이었다. 지금껏 누구도 이뤄 내지 못했던 흑도의 통합을 이룬 거인인 만큼, 그의 안목과 판단은 지극히 뛰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흑도인들의 불만은 그저 막연한 거부감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이유가 없는 만큼, 그들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백도 무림에도 들어갔다.
중원 천지에 수천, 수만 마리의 전서구들이 하늘을 날았다. 묵룡부의 갑작스러운 후계자 내정에 천하가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놀라서 묵룡부를 주시하는 상황에서.
후계자 즉위식 준비는 하나하나 착실히, 그리고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묵룡부의 광장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흑도 무림 다섯 명문의 수장들은 물론 수로채와 녹림채의 총채주, 남부 거상들, 묵룡부의 십이지신과 각 부대의 단주, 평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장로들까지 집결했다.
도열한 그들 뒤로는 수많은 무사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즉위식이었지만 직책이 있는 이들은 줄을 세웠고, 마땅한 직책이 없는 이들은 주위에 늘어서서 식(式)을 구경케 하였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라지만 결국은 엄청나게 넓고 큰 동굴이었다. 야명주와 예술품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조그마한 웅성거림도 크게 들렸다.
“허! 이런 시국에 갑자기 후계자 즉위식이라니.”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봐. 괜한 분란 안 터지게 빨리 정해 버리는 게 낫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갑작스러운데.”
“우리 입장에서나 갑작스러운 거지, 이미 후계자 내정 준비는 다 끝나지 않았을까?”
“정파 놈들 반응이 엄청 궁금하구만.”
제어되지 않는 목소리가 동혈을 사정없이 울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어수선했지만, 중앙에 도열한 간부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시끄럽다고 소리치지도, 눈총을 주지도, 살기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 긴장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부주님께서 행차하십니다!”
천 마디 말보다 효력이 강한 흑도 무림 총수의 등장이다. 웅성거리던 무사들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광장까지 이어지는 어두운 회랑 안쪽에서, 마침내 양천이 등장했다.
저벅저벅.
양천은 언제나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정식 행사랍시고 가마를 타고 오거나, 화려한 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시커먼 무복 위에 제법 두꺼운 장포를 걸친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의상도,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로 인해 천자(天子)의 비단옷처럼 보였다.
옷이나 예법보다 앞서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자아내는 당당함이었다.
훅!
마치 거대한 동혈의 천장이 조금씩 낮아지며 수천의 군웅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양천의 기도는 도도한 호수와 같았고, 동시에 파도치는 바다와 같았다. 상반되는 두 가지의 기도가 끊임없이 사방을 자극하니, 간부와 무사들 모두가 경외의 시선으로 양천을 보았다.
그 엄청난 압력과 막강한 위엄을 이기지 못했을까.
도열한 간부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흑도 무림의 주인을 뵙습니다!”
사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흑도 무림 최강자들의 경배였다.
동시에 수천 군웅들 역시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흑도 무림의 주인을 뵙습니다!”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 무시무시한 진동이 일었다. 어떤 발경보다도 충격적이고 요란한 목소리였다.
스륵.
바닥을 끄는 장포 소리가 무사들의 귓가를 울렸다.
말없이 중앙에 놓인 태사의까지 걸어가는 양천의 모습은 마치 하늘을 걷는 무신의 자태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듯했다.
“음.”
태사의에 앉은 양천이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흑도 총수가 등장할 때, 그의 뒤를 따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홀로 싸워 왔다. 밑바닥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흑도 무림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지금껏 그를 지켜 주었던 것은 자신의 두 주먹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이곳에 있는 모든 무사의 심장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양천이 입을 열었다.
“고개들 들라.”
스르륵.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간부들과 무사들이 동시에 몸을 세웠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편안히 웃는데도 그의 위엄은 스러지지 않았다.
“일견 쓸데없어 보일 수 있지만, 어떤 조직이라도 그에 맞는 예법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
묵직한 목소리에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오늘, 본부의 후계자를 임명하는 자리에서만큼은 예법을 세우지 않겠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럴듯한 예법을 세운 적이 없다. 필요성은 알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천의 목소리는 마치 요술과도 같았다. 그 강렬한 존재감을 전달하는 목소리는 모두의 귓속에 파고들어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낮은 곳을 거닐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주먹, 그리고 칼 한 자루뿐이었다. 이전까지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다.”
왜일까?
위엄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양천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아련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익숙한 것에 속아 변화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고,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우리 역시 생존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눈을 돌려야 한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그것이 싫다면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나는 그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세상을 변화시켰지만, 결국 나 또한 변해 버렸음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지난날 그가 겪었던 인생의 역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었다.
양천이 눈을 떴다.
“나는 또 한 번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내 후계자는 나 이상의 변화를 이끌어 줄 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또한 확신한다.”
두근두근!
모두의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 시대의 주인이 될 자는 이만 모습을 드러내거라.”
쿠구구궁!
양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천과 마주한 곳에 있던 돌벽이 움직였다.
간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의 무사들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큰 키의 훤칠한 차림새를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바로 부선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계단 밑까지 걸어온 부선이 고개를 숙였다.
‘……!’
무사들은 환호할 준비를 했다. 모두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
양천에게 인사를 건넨 부선은 이내 한옆으로 물러나 양손을 모은 채 섰다.
무사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간부들의 표정은 여전히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악!
열린 돌문 안쪽에서 일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폭풍처럼 강렬한 기운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패기 넘치는 기운의 농도는 양천이 자아내는 위엄에 비해도 큰 모자람이 없었다.
양천의 기운이 무겁고 차갑다면, 돌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뜨겁고 사나웠다. 너무나도 상반되었기에 도리어 양천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돌문에서,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청년의 차림은 양천과 비슷했다.
어떠한 화려한 치장도 없이, 그저 시커먼 무복 위로 장포 하나만 걸쳤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이, 흔들림 없는 위풍당당한 눈빛이 그를 치장하는 비단옷이 되어 주었다.
아니, 달리 보면 실제로 그를 치장해 주는 무언가가 있기도 했다.
우우우우우웅!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반투명한 사색(四色)의 기운이 몹시 성스러워 보였다. 흑도에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새 시대의 주인이 될 자로서 넘치도록 훌륭한 자태였다.
“……!!”
그의 존재를 확인한 수천 명의 무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기운을 느낀 간부들의 굳은 얼굴 위로는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들을 뒤로한 채, 붉게 이어진 융단을 걸어 계단 앞에 선 청년이 양천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구 얽혀 들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강동의 연호정이 사부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