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13)
813화. 굴에 살지 않는 범 (7)
새로운 성의 이름.
바쁜 생활을 이어 가면서도 매 순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던 연호정도, 그 질문 앞에서는 순간적으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의 이름 말씀입니까?”
“그렇다.”
“묵룡부라는 이름이 있는데, 또 다른 이름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도 굳이 바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바뀌어 갈 새로운 세상은 지금까지와 너무나도 달라. 그 변화의 폭이 몹시 크기에, 새 이름을 달고 새로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 좋을 듯싶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 이름도 함부로 바꾸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묵룡부처럼 거대한 조직의 명칭을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바꾼다면, 많은 사람의 믿음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 정도 일에 믿음이 흔들리는 놈들이 이상한 게지.”
“소심하고 의심 많은 사람 중에도 유능한 인재는 있습니다. 곁에 두고 쓸 순 없어도, 다 함께 품고 갈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다만.”
“묵룡부로 시작했다면, 묵룡성(墨龍城)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지요. 흑도 무림의 분위기가 한창 어수선한 지금, 괜히 이름까지 바꿔 가며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정론 중의 정론이었다.
오히려 연호정의 말에 안심한 것은 백서였다. 백서 역시 연호정의 발언에 동감했던 것이다.
가만히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맞다. 그래도 나는 새로운 역사에 새길 이름을, 묵룡이라는 텁텁한 것으로 남겨 두고 싶지는 않다.”
쉽게 물러나지 않는 그였다. 아마 이전에도 한 번씩 조직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해 왔을 것이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시간이 꽤 남아 있으니, 그 부분은 더 고민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그게 낫겠군.”
지금 당장 고민한다고 나올 답이 아니라면 나중으로 미뤄 두는 게 좋다.
“백서.”
“예, 부주님.”
우우우웅.
양천이 날린 조직 개편도가 백서의 앞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읽어 보게나.”
백서가 놀란 눈으로 양천을 올려다보았다.
양천이 맑게 웃었다.
“그간 저 녀석과 함께 앞날을 계획하면서 자네 생각을 많이 했네. 말이야 바른말이지, 자네가 지닌 능력을 봤을 때 단순한 조언가나 충신으로만 남기는 아깝지 않은가?”
“……?!”
“이제부터 자네도 함께일세. 어떤 의미로는 우리 둘보다 자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 자네는 나를 보필함과 동시에 소부주와의 관계에서 다리 역할도 해 줘야 하고, 나아가 몇몇 조직을 통솔하는 책임자도 되어 주어야 하네.”
“부, 부주님!”
“괜히 바쁘게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네가 필요해.”
양천이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충신(忠臣) 백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세작으로 침투했을 적, 상황을 분석하고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인상적이었으며, 나아가 상관으로서의 위엄 역시 누구 못지않아 보였습니다.”
백서는 당황했다.
“소, 소부주.”
“그런 이와 함께한다면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네 녀석이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내가 이렇게나 대단한 스승이니라.”
“이런 사람을 지금껏 제대로 써먹질 못하셨으니, 역시 사부님도 사람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꼭 한 마디를 더하는구나.”
투덜대던 양천이 백서에게 말했다.
“자네도 자네지만, 다른 십이지신들에게도 각자의 능력에 걸맞은 직책과 업무를 줄 것이네.”
격동 어린 눈으로 양천을 보던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과 흑도 무림을 위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허허허, 지금껏 그래 왔잖나?”
호탕한 웃음을 짓던 양천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달리 또 보고할 것은 없느냐?”
“없습니다.”
“다음 할 일은 무엇이냐?”
“각 문파에서 불러온 차기 후계자들의 보고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힘으로 밀고 싶어도 문파마다 사정이 있을 테니, 그것을 듣고 분석하여 최적의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야겠지요.”
“흠, 오늘 하루는 쉬는 것이 어떠하냐?”
“오늘까지 보고 준비를 마치라고 했으니,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보고까지 받고 쉬겠습니다.”
“알겠다. 하면 그사이에 십이지신들을 불러 조직 개편도를 보여 줄 터이니, 밤에 시간이 나거든 다 같이 술이나 한잔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전에서 나온 연호정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더럽게 바쁘군.”
바쁘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열이 나서 더 빨리 움직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우우웅.
광명신단이 기지개를 켜며 달아오른 머리를 살짝 식혀 주었다.
양천 앞에서는 급하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 급한 면이 없지는 않았다. 단순히 흑도를 재통합하는 목적만 있다면 모를까, 무림맹과 황궁까지도 신경을 써야 했다.
게다가 황궁에도 서신을 보냈으니, 곧 답이 올 터였다. 혼사가 금방 이루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날을 잡기 전까지는 흑도 무림을 휘어잡아야만 했다.
“적당히라는 게 없구만.”
자조 섞인 자평임과 동시에 흑도 무림을 향한 애증 섞인 촌평이었다.
“자,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자신의 뺨을 톡톡 치며 걸어가던 연호정은 순간 느껴지는 기세에 걸음을 멈추었다.
“…….”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열정 가득한 눈빛에서 신중함을 품은 차가운 눈빛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보이는 특유의 눈빛이었다. 상대의 무공, 성격, 움직임, 습관 등을 분석할 때, 그는 이런 눈빛을 보여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틀.
연호정의 왼손 엄지가 까딱거렸다.
‘이십 보(二十步).’
후웅.
저 멀리 몇몇 동굴이 열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인부들과 무사들이 활기차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사이.
‘십 보(十步).’
그 잠깐 사이에 이십 보 거리가 십 보 거리로 줄어 버렸다.
다가오는 누군가.
감각을 집중해 보면 딱히 기척을 줄이려는 것 같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기척을 읽기가 어렵다. 자신의 생기와 호흡마저 지우는 은신술이 아닌, 자연과 동화(同化)하는 기술이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말 대단하구나.’
엄청나다.
고수의 발전은 쉽지 않다. 연호정은 근 몇 년 새에 타인이 상상도 못 할 발전을 이룩했지만, 한 번 도달해 보았던 경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체는 심하지만, 한 번에 발전하는 정도가 하수보다 크다. 대신 까딱 잘못하면 퇴보할 수도 있다. 고수의 발전은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은밀히 다가오는 이 사람의 발전은, 제아무리 고수의 폭발적인 발전 정도를 고려해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제는 거의가 아니야. 완벽 그 이상이다.’
무공 하나를 창안하겠다고 날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그 완벽해진 무공을 발판 삼아 일대 종사급의 무력을 손에 넣은 고수로 재탄생하였다.
‘무극에 이른 나의 호흡까지 읽을 정도면…….’
물론 전투 의지를 불태우지 않았기에 실제로 생사전이 벌어진다면 진즉 반격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옆에서 웃고 떠들다가 배신을 하려 한다면, 호흡을 읽고 들어오는 그 치명적인 일격을 쉽게 피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삼 보(三步) 뒤!’
번쩍!
한 줄기 광채가 연호정의 뒤통수를 꿰뚫었다.
후우우웅.
사방으로 밀려간 바람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푸스스.
어느새 고개를 옆으로 틀어 단창 일격을 피한 연호정.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피했고, 진기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는데도 머리카락이 잘려 나간 것이다.
“이러다가 스님처럼 머리를 죄다 밀고 다니게 생겼습니다. 안 그래도 짧은 머리, 사각사각 잘도 잘려 나가네요.”
담담한 말과 함께 손으로 단창을 밀어 낸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패율이 있었다.
“역시 피하는군.”
“당연하지요.”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오랜만에 만나서 그게 할 말입니까?”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그 이상으로 발전한 것 같다. 무극에서의 성장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때와는 또 달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외관상의 변화라면 선배가 더합니다.”
마침내 폐관을 깨고 나와 모습을 드러낸 패율.
묵은 때를 벗기고 깔끔한 옷을 잘 차려입었지만, 헐렁한 옷으로도 바뀐 몸매를 숨길 수가 없다.
폐관 전보다 훨씬 더 마른 그였다. 당연히 골격은 그대로였지만, 드러난 팔과 가슴팍은 대나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당연히 볼도 쑥 패었고, 눈도 한층 더 깊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강단 넘치던 외모가 훨씬 더 사납게 보였다.
‘하지만.’
몸은 수분기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변해 버렸지만, 기(氣)는 그렇지 않다.
‘광활하다.’
점창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단단한 진기가 몸의 터럭 하나까지 꽉 들어차 있다.
말 그대로 온몸이 단전인 것처럼 풍성하고도 빈틈없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이전보다 한결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중심을 지키는 단단함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굳이 표현을 덧붙이자면, 이전의 진기가 관리 잘 된 장검 같았다면 지금의 진기는 천하 명공이 주조한 거대 보검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외기(外氣)와 내기(內氣)의 순환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굳이 은신술을 펼치지 않아도 주변과 자연스러운 동화를 이뤄 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지독스러운 폐관이었던 모양입니다.”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다행히 성과는 있었어.”
“성과 수준이 아닌데요. 이 정도 무력, 명문 수장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뵌 구파 장문인, 종남 장문인보다도 더 강해 보입니다.”
“그거야 붙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고.”
한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전과 달리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시간 이후, 폐관을 끝내면 가장 먼저 명주에 고기 요리를 먹고 싶었지.”
“다들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배신감 때문에 허기도 달아나 버렸거든.”
“배신감이라니요?”
패율이 단창으로 연호정을 겨누었다.
“사고 잘 치는 놈이라는 거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양천의 꼬랑이 밑으로 기어들어 갈 줄은 몰랐다.”
꽤 거친 말이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왕이면 듣기 좋게 전략적 동업 관계라고 해 주시지요.”
“목표를 위해 이것저것 다 해 보는 건 좋지.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 철들고 넘어 본 적 없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들었군.”
“그거야 선배 마음대로 생각하시고.”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대놓고 등을 보이는데도, 일말의 긴장도 하지 않는다.
“바쁘니까 할 말 있으면 따라오면서 하십시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보고 들을 게 많습니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안 좋은 것만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그 싸가지 같은 거 말이야.”
“안 들립니다.”
순식간에 연호정에게 따라붙은 패율이 물었다.
어느새 단창을 등에 멘 그의 몸은 홀가분해 보였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연호정을 향한 적의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 너만 사냐? 넌 뭐 맨날 바쁘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뭔 일인데 그래?”
“흑도 문파 후계자들을 우리 입맛대로 조종하려고요.”
“넌 참 낯부끄러운 말을 잘해. 조종이 뭐냐, 조종이.”
“나오신 김에 도와주시겠습니까?”
“내 도움이 필요는 하겠냐?”
“무공 잘 다듬고 오셨으니, 실전에서 통할지 시험해 봐야지요?”
“…….”
“선배는 참 알기 쉬운 사람입니다.”
“닥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