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20)
820화. 다시, 무림맹으로 (6)
“후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김을 후후 부는 모용군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소박했다.
“실력이 이렇게 나빠졌구만. 그까짓 폐관을 얼마나 오래 했다고 물 온도도 못 맞추나. 쯧, 나도 늙긴 늙었어.”
실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차를 한 모금 마신 모용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간 잘 지냈느냐?”
“……예, 형님.”
모용우는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기색이었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하다.”
“예?”
“그간 각자 일이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고, 분연히 폐관에 들어 또 보지 못했다. 네 생각이 항상 났지만, 나에게도 할 일이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많이 집중했더랬지.”
“아, 예.”
“오랜만에 보는 동생에 대한 반가움도 크지만, 너의 성취는 더더욱 큰 놀라움이다.”
진정 놀랐다는 듯 모용군의 얼굴에 생생한 감탄이 어렸다. 자신의 감정을 완연하게 드러내는 그였다.
“바짝 날이 서 있던 검기(劍氣)가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워졌구나. 하지만 마냥 부드러운 것은 아니야. 필요에 따라 강철도 꿰뚫을 수 있을 듯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모용군답지 않게 풍부한 감성이 깃든 표현이었다.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결코 과찬이 아니야. 본가의 비전 무공을 연성하기 전에도 대단했지만, 무공을 전수한 후의 발전은 기가 막힐 정도다. 지금 너의 성취, 당장 몇 년 전의 나와 큰 차이가 없어.”
상고의 절학, 뇌정공(雷霆功)과 무정천뢰식(無情天雷式)을 연성하기 전을 말함이었다.
모용군 역시 육가의 가주인 만큼, 무공에 대한 재능이 탁월했다. 그런 그의 성취를 십 년 더 앞당겼으니, 모용우도 희대의 천재라 불릴 만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본가의 가주로서 손색이 없는 무력이라 할 만하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형님.”
“음? 설마 잊었느냐?”
“…….”
“허허, 나를 무림맹주로 만들고 너는 본가의 가주가 되어 천하제일가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랬지요.”
“잘 성장하고 있다. 너의 그 발전, 이 우형(愚兄)에게 얼마나 큰 자극과 힘이 되는지 모를 것이다.”
바뀌었다.
모용우는 생각했다. 폐관에서 나온 모용군이, 이전과 많이 바뀌었다고.
모용군은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유는 단련된 여유였다. 위정자는 언제, 어떤 순간에도 흔들려선 안 된다는 신조로 인해 연마된 강철처럼 단단한 가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용군은 달랐다.
진심으로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무림맹의 공기가 이전과 같지 않음을 단번에 꿰뚫어 봤을 텐데도,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느슨하면서도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용우는 알 수 있었다.
‘강해지셨다.’
모용군이 모용우의 발전에 놀랐다면, 모용우 역시 모용군의 발전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강력한 뇌기(雷氣)가 단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아.’
뇌기는 천지 만물의 기운 중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힘이다.
그 강력한 힘을 완전히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내공심법을 익힌 사람이긴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예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셨다. 분명 잘 갈무리하고 계셨지만, 한 번씩 드러나는 존재감에서 형님의 무공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모르겠다.
피부와 눈빛을 보면 더 젊어지신 것 같다. 당연히 무공을 잃은 것은 아니리라.
한데도 느껴지는 것이 전무하다. 만지려 들면 잡히는 것이 없지만 떨어져 보면 존재하는 구름처럼 부드럽고 허허롭다.
“얼마나…….”
“음?”
“대체 얼마나 강해지신 겁니까?”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그리 물었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강해지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느냐? 폐관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는 이 영역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폐관에 들어가기 전의 모용군 역시 성천의 강자를 제외하면 맞상대할 이를 찾기 어려운 강자였다. 당장 소림의 공공대사와도 승부를 논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니, 모용군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럼 지금은?
“다만 욕심이 많았지.”
“예?”
“옆에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괴물들이 있으니, 나 또한 뒤처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발전하였다. 그때는 그랬지.”
무리해서 발전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발전이라는 것이 의도한 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세상에 고수 아닌 이가 없을 것이다.
“폐관에 들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내 경쟁자들은 얼마나 더 성장했을까, 더 강한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을까,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번민으로 나 자신을 갉아먹었지.”
“형님.”
“하지만 어느 순간,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허허허, 남들과 같은 무대 위에서 뛰어논다고 정상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 내가 내 무대를 완성한 후, 그 무대를 세상으로 확장시켜야 진정 천하제일을 노려 볼 수 있는 것이야.”
얼핏 이해가 되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그저 쓸데없는 걱정과 잡념을 버렸다는 말이다. 나는 내 그릇에 비해 너무 빨리 발전했다. 발전한 것 자체는 기특한 일이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많았다.”
“하면 지금은…….”
“다 안고 왔다.”
“……!”
“그간 놓쳤던 것들, 그간 애써 무시해 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왔다. 무극을 향한 욕망도 버렸다. 지금 내게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아도, 그 걱정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애써 마음을 놓아도 귀신처럼 걱정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번뇌요, 집착이다. 그리고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야 진정 빛나는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법이다.
모용군은 그 당연하면서도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이제 내 눈에는 빛이 보인다.”
“……!”
“도달하지 못했지만,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빛에 도달한다.
그 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용우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소름이 돋았다.
“형님……!”
“허허허, 고생이야 많았다만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그 영역에 도달하리란 확신은 젊을 때도 했어. 언제 도달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지.”
“그랬군요.”
“그 마음가짐이 틀렸던 것이다. 언제 도달하느냐를 따질 게 아니라, 어떻게 도달할지를 고민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더 빨리 빛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나는 지금의 내 수준에 만족한다.”
무서워졌다.
모용우는 모용군이 폐관에 들기 전보다 훨씬 더 무서워졌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모용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사흘 전에 나오셨다고요.”
“음? 어, 그랬지.”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찾아뵈었을 텐데.”
“허허, 군병들 훈련시키랴, 개인 훈련하랴 바쁜 녀석에게 뭐 하러 그걸 알리겠느냐. 다만 네가 섭섭했다면 미안하다.”
“아닙니다.”
“나오자마자 군사부터 찾아갔다. 근래 무림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세상이 어찌 변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어.”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들을 얘기는, 다 들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러셨군요.”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손바람으로 날리며, 모용군이 말했다.
“그 녀석이 성천에 이름을 올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비왕을 죽였다고?”
“예. 비왕 공손백룡은 삼교의 끄나풀이었다고 합니다.”
“그래, 들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패왕이라…… 거창하고도 화려한 별호로군. 녀석과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묵룡부의 작은 주인에게도 참으로 어울리는 별호가 아니더냐.”
역시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이.”
“아니다.”
“예?”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연호정의 행보가 바뀐 것이다.”
“……?!”
“연호정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천하를 뒤흔들 정도지. 분명 이전까지는 그러했다.”
“지금도 충분히…….”
“흑도에서는 그렇지. 하지만 이제 이곳에서는 아니다. 놈이 양천의 제자로 들어간 순간, 백도 무림을 쥐고 흔들 만한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용군이 웃으며 허공에 원을 두 개 그렸다.
두 개의 원이 교차하는 영역이 무척 컸다.
“녀석은 이 정도 힘을 바랐겠지만.”
다시 두 개의 원을 그리는 모용군. 두 원이 교차하는 영역이 눈곱만큼으로 줄어들었다.
“그 반대가 되었다. 흑도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지만, 이쪽에서의 힘을 상실했어.”
“하지만 그에게는…….”
“연가주가 있지. 제갈 군사도 있고,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도 있으며,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도 많다.”
“…….”
“그러나 그 안에, 그놈은 없지.”
왜일까?
모용군의 말에, 모용우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황궁에서의 일도 잘 들었다. 양천에게 부마도위 자리를 제안했다…… 참으로 그다운 발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선수를 치는 파격은 여전해. 내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를 것이다.”
“그렇습니다. 묵룡부의 소부주는 황제 폐하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건 아니지.”
“예?”
“황제는 우리 모두가 등에 업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양천이 황제의 부마가 되었으니, 우리는 흑도를 건드릴 수 없다. 더 이상 양천은 흑도 무림의 총수 따위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반대로, 흑도 무림 역시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연호정이 그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야.”
“……?!”
“백도와 흑도를 통합하여 외세에 대응하겠다. 연호정의 판단은 옳다. 녀석은 오직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어.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지.”
“…….”
“황제의 부마도위라는 자리는 백도로부터 흑도를 지키는 방벽임과 동시에, 백도를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족쇄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족쇄를 잡고 있는 건 연호정이지.”
“……!!”
“이름뿐인 동맹에서, 강제적인 평화가 체결되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겠지만, 그 보이지 않는 사슬은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아.”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그놈 수완은 못 당하겠구나.”
넓고 깊다.
모용우는 새삼스레 느꼈다. 모용군의 시선이, 그 안목이 자신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서 묶였는지, 어떻게 풀릴지까지를 모용군은 전부 내다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대 효웅(梟雄) 소리를 들었던 능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그 날카로운 안목에 더 강해진 무공, 이전에 없었던 여유까지 갖게 된 모용군은 전보다 훨씬 더 까다로워졌다.
모용우가 말했다.
“그 말씀도 들으셨습니까? 조만간 무림맹주…….”
“아직 군장이더구나.”
“예?”
“너의 직책 말이다.”
“아, 예.”
“그래선 안 되지. 연호정이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 되었으니 대수 자리도 애매해졌다. 그 자리를 애먼 놈에게 넘겨서는 아니 될 일이야.”
모용군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수 자리부터 차지하러 가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