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22)
822화. 다시, 무림맹으로 (8)
권한 축소, 혹은 말소.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의 내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모용군의 발언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다만, 연위만은 담담한 얼굴을 고수했다.
지금껏 침묵했던 승현진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모용가주. 그것은 너무…….”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 의도는 연가를 무림맹에서 축출하자는 것도, 허수아비로 만들자는 것도 아니니까요.”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는 황궁을 신경 써야 합니다. 연호정 소부주가 있어 안심이지만, 그렇다고 흑도 무림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지요.”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이들은 우리를 지지하는 백도 무림의 무수히 많은 군중입니다.”
좌중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이곳, 무림맹 봉공과 장로 자리는 모두 구대문파와 육대세가의 수장들, 그리고 군소 문파 수뇌부들 몇몇이 차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두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문파들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정파 무림의 진짜 힘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문파의 일치된 힘에서 나온다.
거대 문파의 힘이 막강한 건 분명하지만, 정파라는 큰 틀에서 보면 개개인이 지닌 힘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로 뭉쳐지지 않은 힘은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는바, 그들이 무림맹이라는 초거대 연맹체를 이끌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많은 문파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쉽게 말해 황궁과 흑도 무림은 외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도 무림 내 여론은 철저한 내부의 문제이자, 그들의 존재 가치를 뒤흔드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의 중요도에 있어서, 황궁이나 흑도 무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지혜로워도 군중 심리에 휩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도 지나치게 여론에 휩쓸릴 필요는 없지만, 그들을 달래 줄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승현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연가의 권한 축소, 혹은 말소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물론 영구적 박탈이 아닌 일시적 박탈이라고 선을 그어야겠지요. 연가는 지금껏 무수한 협행으로 지역 민생을 살린 명가이고, 당대 천하의 판도를 바꾼 가문입니다. 그 정도는 사람들도 이해해 줄 것입니다.”
“허어.”
승현진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용가주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서로를 보는 봉공과 장로들의 얼굴에 약간의 찝찝함이 어렸다. 하지만 대다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순우가 말했다.
“본도는 그리 생각지 않소. 아무리 여론을 신경 써야 한다고는 하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연가에 이런 모욕까지 줄 필요는 없잖소?”
무림맹 수뇌부에게는 성난 여론을 가라앉히고 한숨을 돌릴 한 수가 될 테지만, 연가에는 나름의 오점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것은 화합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격해져 있고, 누군가는 이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겠지요.”
“하지만……!”
“종남 장문인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이 방법이 연가주의 마음도 편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우가 저도 모르게 연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연위가 입을 열었다.
“본가 때문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복호사태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연가가 천하제일을 논하는 협가라는 사실은 모두가 압니다. 상황이 고약하여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지만, 이곳의 누구도 연가를 비난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좌중을 훑었다.
복호사태의 말에 절반이 넘는 수뇌부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복호사태보다 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와 보길 잘했군.’
폐관에 들어가기 전에도 연가의 위상은 상당했다. 연위의 올바른 심성과 연호정의 크나큰 공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하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연위를 보는 수뇌부들의 눈에는 깊은 동정과 동경, 심지어 죄책감마저 보이고 있었다. 이 혼란한 시대에 앞장서서 분란을 막아 낸 연가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목숨 걸고 올바름을 좇았다 이건가.’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저의 잘못이 분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께서 이해해 주셨기에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 사실상 무림맹에서 축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흑도 무림과 동맹 관계라서 축출로 끝나는 것이다. 만약 동맹조차 맺지 않았다면, 연가라는 가문 자체가 끝장날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뇌부들은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을 막기 위해, 미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뛰는 연씨 부자의 행위가 얼마나 치열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라, 그리도 큰 공을 세운 연호정에게 ‘혹시?’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적지는 않았다.
그들이 대놓고 연위를 두둔해 주지 못하는 이유였다. 만에 하나 연호정이 정말 백도를 버리고 흑도를 위해 살아간다면, 백도 무림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저는 모용가주의 제안에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큰 책임을 느끼는바, 그저 여러분들의 판단에 따라 거취를 정할 것입니다.”
연위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공공대사가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군사의 생각은 어떠시오?”
처음 회의에서의 몇 마디 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그였다.
제갈문호가 연위를 보았다.
연위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갈문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감시를 붙이는 것으로 하지요.”
“음? 그게 무슨 말이오?”
“일시적인 직책 박탈, 그리고 권한 박탈은 물론 연가 인사들에게 대대적인 감시를 붙이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순간 순우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감시라니?!”
복호사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시적인 권한 박탈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감시까지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조용히 있던 팽무강마저 강한 어조로 그 의견에 반대했다.
“권한 박탈까지는 동의하는 바이나, 감시는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공과(功過)의 무게가 다르다고 해도, 천자(天子)를 구한 공로만큼은 어떤 죄를 지어도 사면받을 만한 공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아가, 연가주는 천라제국검까지 하사받은 희대의 무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감시를 붙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황궁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
“여론도 중요하지만, 황궁이 보는 눈 또한 중요합니다. 그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천하를 위해 목숨 걸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연가 일족에게 감시까지 붙인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일입니다.”
“팽가주님.”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무림맹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백도 무림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요.”
제갈문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이룬 공을 치하하기보다는 당장의 현실을 지키는 것. 우리가 일 순위로 두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이 두려워 저마다의 기준을 들이대다 보면, 그 조직은 반드시 붕괴합니다.”
“……!”
“우리 살림부터 잘 건사한 후, 주변을 둘러보도록 합시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팽무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제갈문호를 보았다.
연위와 제갈문호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제갈문호가 공사에 엄격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굳이 먼저 나서서 연가에 피해가 갈 일을 얹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제갈문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작 감시 인원을 붙이는 것 정도로 연가의 위상이 추락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 정도 조치까지 취했으니 여론도 잠잠해질 것입니다.”
“…….”
“그 어떤 친분을 떠나, 일을 행함에 있어 엄격히 하는 것이 맞습니다. 친분과 이득을 따져 가며 일을 처리하라고 그 많은 사람이 우리를 지지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복호사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당키 힘든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은 마치…….”
“애초에 청문회를 이렇게까지 끌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갈문호가 연위를 보며 말했다.
“이런 자리가 길어질수록 고통받는 것은 연가주입니다. 왜 그걸 모르십니까?”
“……!”
“내, 군사로서 이 자리가 길어지는 것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연가주에게는 죄송한 일이나,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 봉공과 장로들의 일 처리가 얼마나 효율적일 수 있는지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군사.”
“탁상공론이란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것이 탁상공론입니다. 흑도는 변화하고 있고, 황궁의 흐름도 바뀌었습니다. 한데 우리 무림맹은 처음 설립되었을 때와 뭐 하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퇴보보다도 나쁜 것이 정체입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나쁘게 변화하는 조직은 망하지만, 정체되는 조직은 망하는 선택조차 못 합니다.”
“…….”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유를 가지시는 건 좋지만, 지금은 보다 확고하고 진취적인 언행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적은 이 순간에도 중원을 뒤엎기 위해 다각도로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
“연가주의 한시적인 권한 박탈은 물론 연가 혈족들에 대한 대대적 감시를 붙이는 것에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이 길었던 청문회의 마지막이 오늘인 만큼,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정보들이 너무 많군요.”
* * *
제갈문호가 나간 후 반 시진이 지나서야 청문회 자리는 끝이 났다.
회의장에서 나온 모용군에게 다가간 모용우가 의아함을 표했다.
“어쩐지 봉공과 장로분들의 얼굴이 어두워 보입니다.”
“찝찝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겠지.”
모용군이 피식 웃으며 모용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의정군 대수 임명은 사흘 뒤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알아 두거라.”
“예, 예?!”
“파도치는 바다에 조약돌 하나 던져 넣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훨씬 쉬웠지. 탕마군의 군장이었던 만큼, 달리 이견도 없었느니라.”
“……그렇군요.”
“그나저나.”
모용군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갈 군사가 한층 더 매서워졌구나.”
“그렇습니까?”
모용군은 회의장에서 오갔던 대화를 모용우에게 들려주었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군사께서 그런……?”
“지혜로운 처사였다. 백도의 여론도 잠재우고, 중구난방이었던 수뇌부들의 정신도 잡아 주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연가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멋진 한 수였지.”
“도움이라니요?”
모용군이 도리어 의아한 눈으로 모용우를 보았다.
“연가가 정말 마음을 달리 먹었다면 모르겠다만, 그러지 않았을 것 아니냐?”
“……!”
“당장이야 독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연가의 무고함을 부각하고 신뢰를 두텁게 할 한 수였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렇군요.”
“그리고.”
모용군이 눈이 휘어졌다.
“그와 같은 호통을 통해 제갈 군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단력 있고 행동력 넘치는 무림맹주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