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40)
840화. 갈등의 씨앗 (6)
연호정의 뒤를 따라 입성한 패율의 눈에 문득 한 명의 노도사가 보였다.
반백의 머리, 수염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노도사라고는 하지만 피부가 곱고 주름도 거의 없어서 가만히 보면 사십 대 같기도 했다.
패율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느린 보행으로 패율의 옆에 다가온 노도사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장문 사형.”
“이따가 시간이나 따로 내거라.”
“……알겠습니다.”
노도사, 점창파 장문인 장인릉(張寅陵)이 피식 웃었다.
“어째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누. 네 녀석도 눈치 볼 줄은 아는 게냐?”
“…….”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네놈 나이가 마흔 줄에 들어서기 전이었으면 회초리를 들었을 게다, 쯧!”
패율이 헛기침을 뱉었다.
점창파에서도 가장 막 나가는 성격으로 유명한 그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에게만큼은 절대 대들거나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가 바로 장문인 장인릉이었다. 그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품 때문에 패율은 함부로 굴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환호 속에서.
장인릉이 물었다.
“어땠느냐?”
“예?”
“호승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담아 놓지 못한 편협한 안목으로 바라보았던 천하는 어땠느냐고 물었다.”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웠다고?”
“예. 그래서 지켜야겠습니다. 저를 잘 다루는 녀석과 함께요.”
내내 앞만 보고 걷던 장인릉이 처음으로 패율을 돌아보았다.
패율의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꾸밈없는 진실함을 잃지 않았다.
장인릉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어른 같구먼.”
뒷짐을 진 그가 다시 패율보다 앞서 나갔다.
“네 사형들 목청 걱정은 하지 마라. 고얀 마음에 내버려 두려고 했더니, 두 눈에 천하를 담아 왔다면 없던 면죄부라도 만들어 줘야지.”
“감사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네놈 뒤치다꺼리나 하는 내 인생이 그렇게 고달플 수가 없다. 에라이, 망할 놈.”
투덜대던 장인릉은 어느새 저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패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연호정은 무림맹 무성전(武聖殿)으로 들었다. 봉공, 장로들과 따로 얘기를 나눌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얘기는 공적이면서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강호 전반의 상황, 묵룡부의 분위기와 미래를 향한 이야기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 다급하게 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면서 온 길도 아니었다. 특히나 연호정이 데리고 온 사람 중 한 명은 성천에 이름을 올린 백병신군 막원이었다.
강호 최고수 중 한 명을 대동하고 왔고, 그 자신도 전설의 반열에 오른 고수다. 당연히 무림맹 차원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하루 이틀간의 쉴 시간은 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렇게 반 시진 동안의 대담을 끝낸 일행은 각자의 거처로 향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연호정은 더 이상 연가의 거처인 파군각에서 지낼 수 없었다. 공무로 온 길인지라 맹의 귀빈들이 거하는 팔성각(八星閣)에서 지내야 했다.
묵비와 막원, 강량과 진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패율은 아직 소속이 점창이라 기존 본인의 거처로 돌아갔다.
묵비의 경우에도 공식적으로 자격이 박탈된 것은 아니었다. 의정군의 부장에서 해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비는 의정군의 부장이기 전에 연호정의 개인 부관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다.
강량과 진양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그들 모두 팔성각에서 지내게 되었다.
“너희는 여기서 쉬고 있고.”
강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어디 가십니까?”
연호정이 묵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의정군에 들러야지. 그간의 사정도 설명할 겸.”
“그리고 사과도 할 겸요?”
연호정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도 그쪽 사람들하고 친분이 깊은데…….”
강량이 진양을 힐끔거렸다.
마치 촌에만 살다가 상경한 사람처럼, 진양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림맹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중압감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신기함이 더 큰 모양이었다.
“뭐, 저야 나중에 찾아가 보죠. 저 양반은 제가 잘 챙길 테니까 다녀오십시오.”
“그래, 고맙다.”
“그리고 막원 선배님은…….”
막원은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 번 나와 볼 만도 한데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막강한 무공의 소유자이니 몸이 피곤할 리는 없었다. 막원이 느끼는 피로는 정신적 피로였다.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너무 유명해도 곤란하군요.”
그때, 그렇지 않아도 웅성웅성 들려오던 목소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커졌다.
“들어가게 해 줄 수 없겠소?”
“아, 우리가 뭘 한다고 그래! 그냥 얼굴 한번 뵙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니까!”
“제 평생에 소원입니다. 제발 백병신군 어르신 좀 뵙게 해 주십시오.”
“깐깐하게 굴지 말고 문 좀 열어 줘! 그냥 인사만 드리려는 거라니까!”
팔성각 대문 밖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연호정도 연호정이지만, 백병신군 막원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온 탓이었다. 특히 내성 전투 부대원들이 많았는데, 백병을 넘어 만병(萬兵)을 다룬다는 막원에게 깨달음 한 조각이라도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들 좀 어떻게 할 수 없나요? 맹 입장에서도 귀빈들인데, 이 사태를 그냥 눈 감고 있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상부에서도 정신이 없을 거다. 가서 한마디 하긴 해야겠다.”
“조금 전에 뵈었는데, 막원 선배님 얼굴이 파랗게 질렸더라고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어요.”
“생각보다 연약한 양반이라니까.”
강량에게 광룡부를 맡긴 연호정이 묵비와 함께 팔성각 대문을 열었다.
“……!!”
문이 열리자마자 일대의 소음이 일순간 멎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막원 선배를 존경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아직 여로가 풀리지 않은 손님께 불편함이 될 수 있습니다.”
무인들이 저마다 침을 삼켰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모두에게 하는 말인 만큼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것임이 느껴졌다.
이립 전에 성천에 이름을 올린 절세고수이자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다. 그들 모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공무로 온 길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절제된 감정, 그리고 담담함.
하지만 그 속에는 상대가 물러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깍듯함도 있다.
무인들이 연호정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고요하게 제 갈 길을 가는 무인들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감돌았다.
연호정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해는 하지만.”
저들 역시 자신들의 행동이 무례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을 향한 일편단심, 유명인을 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눈을 가렸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람은 본디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다. 물론 좀 심하긴 했다. 상부에서도 설마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죠.”
“그러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팔성각에서 나와 의정군 부대 건물로 향했다.
‘…….’
한동안 앞만 보고 걷던 연호정이 한 번씩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이 그와 묵비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걸고 싶어 하면서도 차마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그냥 멍하니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으며, 소수지만 다소 불쾌함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 사는 인생이 다 그렇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환대를 받았다. 애초에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보내더라도 무시하려고 했지만, 막상 자신의 귀환을 환호해 주는 사람들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자신을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다.
‘나를 나쁘게 보는 건 괜찮아.’
그들의 모난 반응이 가문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자식 관리를 못 했다는 오명을 듣기에는 연위가 세운 공이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연호정이 내린 선택 역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이니, 모두가 놀랄 일은 맞지만 공적으로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묵룡부는 맹과 동맹을 맺었고, 실제로 삼교를 상대로 대항하고 있는 우군이었으니까.
다만 그들의 분노와 불쾌함은, 흑도와 백도 사이의 뿌리 깊은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기인했을 것이다.
연호정은 문득 음제 하은교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다름을 모르는 게 아니야. 그저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는 게 더 쉽고 통쾌하다는 걸 아는 거지. 사무치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고.’
‘종국에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네. 저 여광처럼.’
이들 중 흑도 문파와의 분란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냉정하게 따지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흑도와 분란을 겪지 않았음에도 맹목적인 증오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흑도 측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인다…….’
백도와 흑도의 관계는, 저 삼교와는 전혀 다르다.
삼교는 침략자였다. 중원을 삼키기 위해서 온갖 비인간적인 악행을 저질렀다. 당연히 그들은 명백한 적이었다.
하지만 백도와 흑도는 그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이들일 뿐이었다. 물론 각종 범죄 행위가 만연하는 흑도가 옳은 길은 아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변질된 흑도일 뿐 진짜 흑도는 그와 달랐다.
‘이해하기를 포기한 거지. 생각하기를 포기한 거고.’
그렇다고 그들을 증오하거나 혐오할 수는 없다.
사람은 다 다르고, 각자가 지닌 사정을 타인이 이해하기란 어려우니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걷다 보니, 어느새 의정군의 부대 건물 앞에 도착했다.
“……?”
대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지키는 수문위도 없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들어가자.”
“그러죠.”
대문을 넘어 중문을 지나니, 익숙한 연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위를 가득 채운 의정군 군병들의 모습도.
“전군 도열.”
깊은 여유와 부드러운 위엄이 가득 섞인 목소리에 군병들이 무서운 속도로 도열했다.
그 많은 인원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다.
연호정과 묵비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도열하는 군병들의 움직임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수준 높게 훈련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벅저벅.
연무장 옆을 빙 돌아 걸어오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전(前) 대수님.”
“푸헐! 그러깁니까?”
“하하하!”
껄껄껄 웃음을 터트린 모용우가 힘차게 연호정을 껴안았다.
순간 연호정은 당황했다. 모용우가 자신을 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잘 돌아왔네. 무사해서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연호정의 어깨에 손을 두른 모용우가 의정군을 돌아보았다.
“의정군 최악의 배신자 두 분이 돌아오셨다. 환대해 드리자.”
치리리리링!
동시에 병기를 뽑아 든 오백오십 명의 군병들.
기세는 살벌했지만,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가득했다.
“참고로 오늘 이 두 사람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입히지 않으면 술은 없다.”
“존명!”
연호정이 황당한 얼굴로 모용우를 보았다.
모용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안 그런가?”
“……거참,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은 연호정이 소매를 걷었다. 묵비는 입맛을 다시며 시위를 당겼다.
두 사람이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멋진 환영식이구만.”
“우아아아아!”
의정군이 두 사람을 향해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