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46)
846화. 태풍의 핵 (3)
화향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초절정고수는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럴 수 있다. 의지로 기를 다루는 걸 넘어 의식만으로 물체를 조종할 수 있으니, 상대의 정신에까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극에 이르면 허공섭물이 가능한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면 심인상인(心印傷人)의 경지에 오른다.
어쨌거나 화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는 건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고, 그 분위기는 고스란히 두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화향.”
“……네, 주인님.”
“그 어인 무례냐? 사죄드리거라.”
딱히 언행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눈빛이요, 분위기일 뿐.
화향이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호위를 두셨습니다.”
“언제나 저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사람이지요.”
“어렸을 때는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좋은 친구 한 명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효락이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에 와서 처음으로 짓는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주종 관계이지만, 한 번도 제 호위를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순간 화향이 움찔했다. 천효락의 말에 당황한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거면 되었습니다. 천 공자 말마따나, 맹에 찾아오신 이유는 봉공분들께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말 궁금한 것은 그게 전부입니까?”
“아직 많습니다. 하지만 더는 손님을 괴롭히고 싶지 않군요. 물론 제 손님은 아닙니다만.”
농담 아닌 농담이었다. 천효락이 피식 웃었다.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소문을 참 많이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래, 어떤 소문을 또 들으셨습니까?”
“패왕과 손을 잡으면 그 과정은 거칠지언정 결과는 올바르게 되고, 패왕과 척을 지면 과정도 결과도 모두 나쁠 거라고 하더군요.”
“지금 당장 지어 낸 말씀은 아니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청해까지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청해.
천효락은 그 대답으로써 신마림이 청해성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청해 날씨가 매섭다고 들었습니다.”
“항상 그곳에 살다 보니, 특별히 매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청해라…… 아시겠지만, 구파 중 하나인 곤륜이 청해 서쪽 끝 지역에 거하고 있습니다. 원체 먼 곳이라 어지간해서는 중원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지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곤륜은 중원의 다른 문파와 달리 적극적으로 상단을 꾸리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하여, 생각보다 청해 정보에 밝은 편이 아닙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곳 사정은 어떻습니까?”
천효락의 눈빛도 바뀌었다.
“솔직한 대담을 원하셨지요?”
“물론입니다.”
“연원을 알 수 없는 세 종교 집단 때문에 홍역을 앓았던 중원이 그 위기를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부주님 덕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소부주님께서는 삼교가 청해에도 마수를 뻗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그렇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순간 천효락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세(攻勢)입니까?”
이번에는 연호정이 놀랄 차례였다.
“놀랍군요. 거기까지 짚어 내실 줄 몰랐습니다.”
“……그걸 인정하십니까?”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대담을 원한다는 말은 제가 먼저 꺼냈습니다.”
천효락은 의아했고 또한 당황했다.
‘이 작자, 정체가 뭐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을 시중에 흔히 풀리는 얘기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이건 솔직함 이전에 보안의 문제였다. 해도 될 이야기가 있고 해선 안 될 이야기가 있는데, 솔직한 대담이라는 핑계로 이 얘기 저 얘기 가리지 않고 하다니?
‘분명 똑똑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똑똑하다. 똑똑한데, 뭔가 따라잡기 힘들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하는 말이라서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해선 안 될 발언도 다 던지고 있어서 그렇다.
연호정의 얼굴을 살펴보던 천효락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 얘기, 제가 삼교에 불어 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실 겁니까?”
“물론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걸로 된 것이지요.”
“아니 제 말은…… 저의 어떤 부분을 믿고 그런 것까지 솔직하게 말씀하시느냐, 이 뜻입니다.”
“공세를 취할 생각은 있지만,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는 아직 모릅니다. 정식으로 얘기된 바도 아니지요.”
“정식으로 얘기가 되면, 그때는 공세를 취할 생각입니까?”
“모두가 그러겠다고 하면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보안에 신경을…….”
“저는 삼교를 잘 압니다. 적어도 남들보다는 그렇지요.”
“예?”
연호정이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약 천 공자의 고발로 우리의 공세가 알려진다면, 그놈들도 어떠한 ‘반응’을 하겠지요.”
“……?!”
“공세라고 하여 무작정 달려들어 박살 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상대의 반응도 살피고, 그 반응이 왜 나왔는지도 조사하고, 그러다 보면 전략 전술도 바뀌고 그러는 것이지요.”
“……!!”
“진짜 보안에 문제가 될 말들은 이리 쉽게 꺼내지 않습니다. 공세로 나갈 수 있다? 이건 오히려 적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요인입니다. 보안 운운하며 조마조마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군요.”
“더하여, 깡그리 지옥으로 보내고 싶은 놈들이지만 그놈들도 머리가 있으면 우리가 공세로 나갈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물론 실제로 저지르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요.”
“…….”
“이런 건 머리싸움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전세를 뒤엎을 한 방이 될 수 없잖습니까? 이런 것까지 숨겨 가며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정작 힘든 건 우립니다.”
완전히 다르다.
천효락은 깨달았다. 연호정은 평범함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전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중원 무림이 역으로 삼교를 공격하려 든다?
그 얘기가 삼교 측에 흘러가면 당황하는 것은 중원 무림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데도 연호정은 소문이 흘러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 정도 소문으로 전국(全局)이 뒤바뀌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소문을 이용해 적의 허점을 공략할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이 사람은 이미…….’
평범한 사람은 한숨 고르고 난 후에 전쟁을 준비한다면, 연호정은 다르다.
연호정에게는 지금 자신을 만나는 이 순간조차도 전쟁의 일부였다. 마음먹고 대대적인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루하루가 전쟁의 연속인 것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왜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진심이었다.
‘무섭구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는 것은, 애초에 삼교를 세상에 남겨 둘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개인의 전술적 능력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병사를 장기의 말로 보는 게 아니야. 이자에게는 장기를 둘 생각조차 없다. 그저 상대 말을 손으로 치워 버릴 생각인 거야.’
천효락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기는 게 아니라 말살이 목표. 상대 말들을 가장 치우기 쉽게 만드는 게 이자가 바라는 것이야.’
그릇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뭐가 되었든, 연호정이 뱉은 말이 전부 진심이라면 이 사람은 너무 위험하다.
“너무 그렇게 단정 지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연호정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끈했던 차가 꽤 식어서 향이 많이 죽었다.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오늘 처음 봤습니다. 상대의 성향이나 성격을 단정 짓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인연입니다.”
“……!”
“그걸 감안해도 천 공자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신마림에서 어떤 직책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안목을 지닌 사람을 파견했다면 신마림도 보통이 아니겠습니다.”
순간 천효락의 머리에 익숙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람의 성격을 볼 줄 알면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사람의 한계를 볼 줄 알면 지혜롭다는 소리를 듣지. 너는 똑똑하지만, 아직 지혜롭지는 않구나.’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는 강렬한 위엄과 은근한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천효락이 입을 열었다.
“아직 소부주님의 한계를 몰라서, 청해에 관한 정보를 내드리긴 어렵겠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효락이 당황하여 함께 일어났다.
“벌써 가십니까?”
“하하, 더 얘기를 나눠 봤자 겉도는 대화의 연속일 텐데 계속 자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봉공분들을 뵙고도 절 보고 싶다면, 그때 다시 뵙지요.”
“……그렇군요.”
천효락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뵐 때까지 제 한계가 어디인지부터 잘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과 다르군요.”
“예?”
“마도 무림의 마인들은 하나같이 잔인하고 냉혹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천 공자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예측이 안 되는 사람은 언제나 흥미진진하지요. 적이 되지만 않는다면요.”
“…….”
“기회가 된다면 마도 무림의 다른 걸물들도 만나 보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봉공분들께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고. 이렇게 빨리 파했다고 하면 군사께서 민망해하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방을 나섰다.
“…….”
연호정이 나간 후로도 천효락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방문을 바라보았다.
화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주인님?”
“향아.”
“아, 네!”
천효락이 눈을 감았다.
“……아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천효락이 등받이에 등을 묻었다.
“상부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눈을 붙여야겠다. 너도 편히 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화향이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슬그머니 눈을 뜬 천효락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너무 위험한 사람이야.”
굳이 속내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존재 자체가 위험이고 파격이다. 연호정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안 보이는데, 목표는 너무 분명해. 그래서 더 위험하다.”
후욱!
천효락의 눈에 미세한 마기(魔氣)가 번뜩였다.
“과연 저 사람의 존재가 무림맹에 어떤 의미일까.”
* * *
연지평이 객당에서 나온 연호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떠셨어요?”
“응?”
“그…… 객당이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걱정이 너무 많더구나. 나름의 사정이 있어 보였다.”
“세상에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그래도 너무 많이 재는 것 같아서 좀 답답하더군.”
“재다니요?”
“그런 게 있다. 사람은 똑똑하고 주관도 뚜렷해 보이는데, 머리통에 잡스러운 걸 많이 넣어 놨어. 여하간 나쁘지 않은 인재라고 보았다.”
“형님이 그렇게 평가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겠습니다.”
연호정이 연지평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놈이.”
“으억!”
“네 형을 너무 띄워 주지 마라. 세상에 대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 하나가 형님이잖아요.”
“나야 싸움에 미친 괴인이 아니냐.”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하하 웃어 버렸다.
“그건 그렇고.”
웃으며 연지평을 보던 연호정이 미소를 거두며 청룡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진짜 엄청난 건 따로 있는데.”
연호정의 기감이 ‘무언가’를 포착한 순간.
그 ‘무언가’의 속도가 무섭게 빨라졌다.
“……?!”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