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54)
854화. 무림맹주란? (4)
“다향이 좋구나.”
“아, 그런가요.”
“허구한 날 검만 휘둘러 온 네 녀석이 언제 차 내리는 법을 배웠단 말이냐?”
연지평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배운 적은 없고, 모용 형이 한 번씩 내려 주던 걸 곁눈질로 배웠습니다.”
“허허, 그랬더냐.”
아들이 직접 우린 차는 확실히 특별하다.
솜씨는 서툴지만, 정성을 다해 끓인 맛이 난다. 오직 아버지이기에 느낄 수 있는 정성이었다.
“저녁에는 호정도 온다고?”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누님도요.”
“오래간만에 떠들썩한 저녁이 되겠구나.”
허허 웃는 연위를 보며 연지평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아버지.”
“음?”
“아버지께서도 보셨지요?”
뜬금없는 말이지만, 연위는 연지평이 무엇을 보았느냐 묻는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 보았다.”
“정말…….”
연지평의 얼굴이 황홀감으로 젖어 들었다.
“정말, 무도(武道)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하, 오죽하겠느냐. 이 애비에게도 요원한 무극의 경지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으로의 진입이라고 불린다. 그 경지에 도달해도 성천의 고수들과 비교할 순 없다고 하더라.”
“예에.”
“하물며 천하제일에 가장 가깝다는 권신 무허대사를 생각하면, 정말 무공에는 끝이 없음을 실감케 되지. 호정과 남궁의 전대 가주께서도 그토록 대단했는데, 권신의 무공은 또 어떨 것이냐?”
연지평이 나직이 탄식했다.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정말로요. 하지만…….”
“하지만, 도전 의식이 생기지 않느냐?”
연지평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새끼 물고기 수준이지만…… 예, 그렇습니다.”
“하하, 새끼 물고기라니. 네 연배에 그만한 경지를 이룬 자, 온 천하를 뒤져도 한 줌이 안 된다.”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한 연지평이 은근슬쩍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음.”
연위의 눈이 천천히 허공을 향했다.
“대단했다.”
처음이었다. 아들의 진짜 실력을 본 것은.
그전에도 몇 번 대련을 했지만, 그때의 아들은 자신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을 겪고 발전한 지금의 아들은 아비인 자신을 훌쩍 넘어 무림의 전설로 추앙받는 이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호정의 무공은 무척이나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역동성이 이전보다 크게 줄어든 느낌이다.”
“그, 그런가요?”
“적어도 외형은 그렇다. 그러나 간결한 동작 속에 상상도 못 할 진기 운용을 녹여 내 막강한 무공을 구사하더구나.”
“예! 바로 그겁니다. 저도 그걸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사람이 그 정도로 복잡한 공식을 순간순간 몇 번이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질 않습니다.”
“딱히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아니다. 그 정도는 이 애비도 흉내는 낼 수 있으니.”
“예에?!”
연지평은 깜짝 놀랐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실전에서 쓰긴 어렵겠지. 호정이 정말로 대단한 것은 그런 복잡한 공식을 벼락처럼 운용하는 걸 넘어 상대의 공격에 즉각 반응하고, 나아가 몇 수 뒤까지 예견했다는 점이다.”
“……!”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는 듯했지.”
연지평이 침을 삼켰다.
“거기까지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허허, 당연하다. 그들의 진기 운용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아직 너의 경지가, 몸이 애비가 보았던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야.”
“그, 그렇군요. 역시……!”
“다만,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답답함이라니요?”
“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구나. 여하간 좀 답답했다. 호정의 무공이 천하에 이르렀음은 분명하지만, 틀에 박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
“오히려 이전에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연지평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의 무공은 결코 틀에 박힌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변칙적이고 창의적인 공방으로 가득하지 않았던가?
“여하간, 그토록 뛰어난 무공으로도 남궁의 전대 가주님을 이기진 못했다.”
정확히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싸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진행하다가는 구경꾼들이 다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의 대결은 과열되어 갔다.
결국 두 사람은 남은 대결을 뒤로 미루었다. 애초에 연호정의 목적 자체가 맹의 무사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었으니, 굳이 끝을 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대로 싸웠다면?’
싸움이란 붙어 보지 않으면 결과를 장담키 힘든 것.
그러나 연위는 생각했다. 아들의 패배였을 것이라고.
과정이 어쨌든, 종국에는 검제의 철검 아래 연호정이 무릎을 꿇었으리라고 예측했다.
“네 형은 상대의 몇 수 앞까지도 내다보는 신묘한 능력을 지녔지만, 검제 선배께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왜 그렇습니까?”
“이 또한 말로 설명키 어렵다. 굳이 얘기하자면…… 깨달음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깨달음…….”
“그렇다.”
연위가 다시 차로 목을 축였다.
“내가 본 검제 선배의 깨달음이 진실로 ‘그 영역’에 도달한 것이라면, 지금의 호정으로서는 이길 수 없다.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무자비해도, 도달한 영역이 다르기에 호정의 도끼는 검제 선배의 몸에 닿지 못했을 것이야.”
“……!”
“호정은 여전히 몸으로 싸운다. 그러나 검제 선배는 깨달음으로 싸운다. 꼭 깨달음이 전부는 아니지만, 육체 능력의 향상을 이루거나 신공(神功) 그 자체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호정은 검제 선배님께 승리를 따내기 힘들 것이다.”
“하, 하지만 형님의 연배를 생각하면……!”
“허허허, 당연히 대단한 것이지. 당장 이 애비도 네 형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이냐?”
다만, 아비이기 전에 무인으로서 아쉬운 게 있었다.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그 녀석, 분명 그 이상을 넘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 * *
“후우.”
가볍게 내쉬는 한숨에 허연 입김이 묻어 나온다.
“확실히 안휘보다 춥구나. 산자락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별실 앞 작은 연못 앞에서 차를 마시는 남궁승의 모습은 불과 조금 전 무시무시한 검도를 보여 주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남궁표는 생각했다.
‘뭔가 달라지셨다.’
검을 쥐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에서 뵈었을 때와 묘하게 달라지셨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부분. 언제나 검을 좇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사소한 변화였다.
“어찌 그리 빤히 보느냐?”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이 무어냐. 그저 궁금했을 따름이다.”
남궁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어찌하여…….”
남궁표가 별실을 힐끔거렸다.
별실 안에는 연호정이 있었다. 창가 너머로 옷깃만이 살짝 보였다.
“어찌하여 소부주에게 관심을 쏟으시는 것입니까?”
남궁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젊은이가 희대의 천재라는 성천의 고수들과 같은 경지에 올랐다. 세월만 따져도 족히 반백 년에 가까운 차이가 난다.”
“…….”
“관심이 가지 않을 이유가 있더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남궁표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강한 자신감과 무서운 열정으로 누구에게나 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였지만, 감히 조부님 앞에서만큼은 그런 티를 낼 수가 없었다.
“혹, 그에게 광대무변한 깨달음의 일부라도 전해 주신 것은 아닌지요?”
창 안으로 보이는 연호정의 미동도 없는 자세, 그리고 자리를 비켜 준 조부.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예감은 정확했다.
“이미 나의 경지에 육박하는 이에게 가르침을 내려 줄 필요가 있겠느냐?”
“……?”
“그저 빤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아, 환기를 시켜 주었을 뿐이다.”
순간 남궁표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부님…….”
“왜 그러느냐?”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저자는 연가의 핏줄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도 되느냐?”
“…….”
“연가라면 우리와 함께 무림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들이다. 사해는 동도라 하였거늘, 하물며 같은 길을 걷는 수행자에게 이 정도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강호의 선배라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조부님.”
“무엇이 그리도 무섭고 껄끄러운 것이냐?”
“예?!”
남궁승의 투명한 눈이 남궁표를 향했다.
그 기묘한 눈빛 앞에, 남궁표는 전신이 발가벗겨진 듯한 오한을 느꼈다.
“이미 저이는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영역을 한참이나 넘어가 버렸다.”
“……!”
“네 평생을 연마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를 상대가 더 멀리 달아난다면, 더 이 악물고 쫓아갈 생각을 하는 것이 옳다.”
“그, 그것은…….”
“오히려 축복이 아니더냐? 저만한 괴물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
“무인으로서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고마운 자극제가 있는데, 어찌 너는 그를 따라잡을 생각은 아니 하고 끌어내릴 생각만 하고 있느냐?”
남궁표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궁승이 혀를 찼다.
“사람은 미워도 하고 질투도 한다. 증오도 하고 혐오도 하지. 그 감정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감정에 휘둘리는 나 자신이다.”
“…….”
“죽을 때까지 미워하고 질투하거라. 그래서 저이를 넘어서서 눌러 버릴 생각을 하거라. 오랜 세월 걸릴 길이 무서워 떠나가 버린 상대를 다시 불러들이는 건 나의 발전을 막는 미련한 짓일 뿐이다.”
“저는 그저…… 연가의 위세가 강해지는 것이 본가에 썩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
“또한,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이는 절대 극의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어떤 영역에서라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장손을 바라보던 남궁승이 한숨을 쉬었다.
“내 잘못이다.”
“……예?”
“오로지 검 한 자루를 위해 인생을 걸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나에게는 검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의 실력이 궁극에 도달하면, 가인(家人)들에게도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그것은 다 핑계였다. 검에 미쳐 있는 동안 내 새끼들을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것이 이렇게나 후회스러울 줄은 몰랐다. 어릴 적부터 무(武)의 자세만이라도 분명히 가르쳤다면, 네가 이 조부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았겠느냐?”
남궁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도 네가 천하제일의 기재라고 생각하느냐?”
“……!”
“머리로는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마음으로 인정하긴 싫은 것이냐?”
남궁승이 턱으로 별실 창가를 가리켰다.
“저이를 보아라. 저이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재능은 별것 아니라고, 세상에 천재들은 많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
“너는 재능과 노력 이전에 삶의 자세에서부터 저이에게 진 것이다.”
남궁표가 눈을 감았다.
더없이 비참한 기분이었다.
남궁세가, 아니 안휘성에서 그의 존재는 일국의 황태자 못지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았다. 당장 연호정이 아니라 그와 함께 다니는 귀궁신녀만 봐도 자신보다 빨리, 자신보다 어린 나이로 무종을 돌파했다.
그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인정했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남궁승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아비에게 가야겠다. 이만 들어가 쉬거라.”
“……예.”
그때였다.
‘……?’
한 줄기 기이한 기도에 남궁승의 시선이 별실로 향했다.
동시에 그의 눈이 커졌다.
창문 밖으로 은은한 금빛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못난 장손이지만, 네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구나. 어찌 저리 빠르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