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68)
868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8)
“누구십니까?”
청룡대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위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수문위 앞에는 풍채 좋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당당한 체구의 사내가 있었다. 두 사람 다 꾀죄죄한 외양이지만, 사내의 등 뒤에 걸린 거대한 칼은 엄청난 압박감을 자랑했다.
‘어중이떠중이 같지는 않은데.’
무림에선 거대한 병장기를 들고 다니는 이가 뛰어난 고수인 경우는 흔치 않았다. 손가락질 한 번으로 천근의 힘을 구사할 수 있는 만큼, 굳이 큰 병기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르러선 패왕 연호정이 사람 몸뚱이보다도 큰 도끼를 휘둘러 대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여전히 거대 병기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무림맹의 수문위였다. 자꾸만 상대를 경시하려는 마음을 꾹꾹 누른 그의 얼굴에선 나름의 공손함이 묻어났다.
노인, 종리백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저 봉공인지 장로인지, 그 인간들에게 종리백이 왔다고 전하게.”
“예?”
뭐지, 이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은?
수문위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종리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맹주 선출 안 했다며? 뭐야? 혹시 그새 했어?”
“아, 아직……입니다만.”
수문위는 저도 모르게 그리 대답해 버렸다. 평소 성격 같으면 대번에 쫓아냈을 텐데, 이상하게 이리 대답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상부에 연락해. 종리백이 왔다고. 전하면 알 거다.”
수문위는 당장에라도 이 노인을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인 일인가?
“안으로 전하거라.”
후배들에게 종리백의 말을 전달한 수문위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기다려 주십…….”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왔는데 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예, 예?”
“사고 안 칠 테니까 문 열게. 어차피 칼 뽑으면 밖에 있나, 안에 있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수문위는 당황했다.
눈앞의 이 노인의 무례함에 당황했고, 이 노인을 쫓아내야 할 자신이 화도 내지 않고 오히려 쩔쩔매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 그럼…….”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수문위는 결국 성문을 열라고 전했다.
기세로 압박을 당한 것도 아니요, 딱히 종리백에게 겁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말을 따르게 된다.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쿠구구궁!
이내 성문이 열리고, 종리백과 오구문이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수문위는 후배들에게 두 사람을 객당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그 뒤 다시 성문을 닫고 보초를 섰다.
“……?!”
그제야.
성문을 닫고 종리백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수문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저 양반이……!”
너무 당당하게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봉공분들과 면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들어가게 한 것이다.
수문위는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인식했다. 자신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빌어먹을, 실수했군. 그냥 들여보내 줘선 안 되었는데.”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튀어나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창 씩씩대던 수문위는 문득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거참 눈빛 더러운 양반일세.’
그 뒤를 따르던 사내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수문위의 머리에는 오직 노인의 얼굴과 눈빛만이 선명했다.
‘별 사고는 안 치겠지? 그래, 안 치겠지. 그래도 무림맹인데…….’
그때였다.
수문위는 노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상부에 연락해. 종리백이 왔다고. 전하면 알 거다.’
종리백이라…….
상부에 연락하면 알아서 해결될 거라는 듯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런 걸 보면 정말 안면이 있긴 한 모양인데.
‘종리백? 웃기는군.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수문위는 움찔했다.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정말로?
뭔가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나지 않는다.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또 낯설지는 않다.
나와 인연이 없는 이름이지만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누구더라? 종리백…… 종리…….
‘칼?’
순간 수문위가 떠올린 것은 노인 뒤에 시립해 있던 사내가 차고 있던 칼이었다.
칼 크기가 그 정도면 가히 중병(重兵) 중의 중병이라 할 수 있었다. 칼날 폭만 해도 성인 여성의 어깨너비에 준하는 정도였다. 쥐고 휘두르기는커녕 들고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런 거병(巨兵)을 휘두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표적으로 패왕 연호정이 있었고, 하북팽가의 도객 중 일부가 그런…….
‘잠깐만, 도객이라고?’
종리백이라는 이름, 그리고 도객.
“헉!!”
일순 수문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무나도 크고 위대한 이름이라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무림맹 청룡대문의 수문위로 있지만, 그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도, 도제(刀帝) 종리백 노사!”
수문위가 재빨리 성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어라! 어서! 내가 직접 무성전으로 갈 테니까 너희는 두 분을 최고급 객당으로 모셔라! 빨리!”
* * *
“들어왔군.”
한참 얘기 중이던 남궁승의 느닷없는 발언은 그와 같았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무곡각 별실 정자 주변에는 남궁표와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그곳에 남궁인과 남궁현은 없었다.
그들은 두 초고수의 무론을 무릎까지 꿇은 채 경청하고 있었다. 남궁승도 남궁승이지만 연위의 깨달음도 지고(至高)하여, 경쟁 가문인 연가의 수장임에도 공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궁승이 미소를 지었다.
“가문의 선조들께서 쌓은 공덕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오. 나와 핏줄들의 잘못이 그리도 큰데, 그래도 받을 복이 아직 남은 것 같소.”
연위도 미소를 지었다.
“장인의 가문은 언제나 특별한 법입니다.”
“허허.”
남궁승의 웃음은 무척이나 밝았다.
그 모습을, 조부의 미소를 보는 남궁표의 얼굴에 심란함이 어렸다.
그가 기억하는 조부는 언제나 엄하고 말수가 없으셨다. 자신이 크게 성장하고 나서는 웃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셨지만, 그런 순간까지 친다 한들 빈말로라도 밝다고 할 성격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연호정과의 화려한 비무를 시작으로, 조부님에게서 느껴지던 딱딱함과 초조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당신보다 한 세대 후배인 연가주에게 반존대까지 하고 있다.
‘정녕 그 정도란 말인가.’
연가주의 깨달음이 가주 중 제일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심검(心劍)까지도 구현하는 강자라 했다.
당연히 남궁표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심검이란 검사, 아니 무인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깨달음이라 알려져 있다. 그 경지를 아직 무극에 이르지도 못한 사람이 깨우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데 조부님의 저 표정과 언행을 보면, 진심으로 연가주를 당신과 동급으로 여기는 듯했다.
심검까지는 모르겠지만, 성천의 고수조차 경의를 표할 만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분명했다.
‘정녕 강동의 연씨 가문이 우리 남궁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인가.’
남궁세가는 천하제일검을 배출한 가문이다.
벽산연가는 최연소 성천을 배출한 가문이다.
그 두 가지 사실만 놓고 보자면 어떤 가문이 더 우위에 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연가주의 무공이 천하제일검이 감탄할 정도로 대단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세력이 작아도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무력과 영향력이 지대하다면, 그 자체로 위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음.”
남궁승의 눈이 빛났다.
“손님이 또 오는구려.”
“예.”
연위의 미소가 짙어졌다.
“드디어 마음을 먹으신 모양입니다.”
“음? 마음을 먹다니?”
“백도 무림을 책임질 자격이 충분한 분께서 번뇌 때문에 한사코 그 자리를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마음을 달리 먹으셨지요.”
“호오.”
“저 역시 그것을 확인받았고 동의하였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한다고 전부가 아니지요. 위치에 맞는 힘과 무력도 필요한 법, 포기한 깨달음을 다시 얻어 무한의 영역으로 들어가실 모양입니다.”
남궁승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세상천지에 재능 있는 자가 그렇게 많고, 고수 역시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이지. 그렇다고는 해도 과연 소림이로다.”
“준비는 끝나셨을 겁니다. 그래도 이곳에 오시는 것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코자 함이겠지.”
“그렇겠지요.”
그때였다.
훅!
사위를 휩쓰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한의 경지에 진입한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피부로 느낄 수도 없는 허상의 기파였다.
그 허상이, 남궁승과 연위에게는 허상이 아니었다.
연위가 탄성을 질렀다.
“굉장하군요.”
“흐음.”
남궁승의 표정이 묘해졌다.
연호정을 만났을 때, 그는 호승심을 느꼈다. 그리고 연위를 만났을 때, 그는 동질감을 느꼈다.
나아가 지금.
자신과 거의 차이가 없는, 동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한 무력을 머금은 자의 도발적인 기운을 마주한 남궁승은 해소했던 강렬한 투쟁심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검(劍)과 도(刀), 지극히 유사하면서도 판이한 성질을 지닌 두 자루 병장기의 힘 싸움은 무림사(武林史) 내내 지속되어 왔다.
이후 검이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불렸지만, 기실 검이나 도나 고수의 손에서는 차이가 없는 효율을 보여 주기 마련인바. 두 병기를 지닌 이들의 신경전만 보면 가히 견원지간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지금, 강호 무림에서 검중제일(劍中第一)로 불리는 무신과 도중제일(刀中第一)로 불리는 무신이 같은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도제 종리백.”
남궁승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 찾아다닐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양반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시는군.”
마치 코앞에 있는 것처럼.
남궁승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주변 눈치도 안 보는 성격 같은데, 볼일 있으면 이만 나오시오.”
장중한 목소리는 별실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남궁승의 강한 의지는 내성을 뛰어넘어 외성 끝까지 닿았다.
화아아아악!
얼마나 지났을까.
우우우우웅!!
은은하고도 깊은 황금빛 진기가 저절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음을 편하게 하지만, 그 힘의 실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고매하고 막강한 기운이었다.
소림 방장, 공공대사의 등장이었다.
후우우웅! 콱!
공공대사의 등장과 동시에, 하늘 높은 곳에서 호선을 그리며 날아온 한 자루 거대한 칼이 별실 정자 옆 무른 땅에 박혔다.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짐작도 못 할 거리다. 전설상의 어검술, 그 자유분방함이 중원 제일을 논할 정도로 뛰어났다.
파르르륵!
뒷짐을 진 채 별실 옆 누각 꼭대기에 선 사람이 있었다.
당당한 체구, 막강하기 그지없는 기파를 느슨하게 풀어 내는 고수였다. 남루한 기색이지만 그 장중한 기파만으로도 대궐집 주인과 같은 위엄과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검제와 도제, 거기에 심검에 도달한 고수와 초대 무림맹주까지.
무림맹 역사상 이토록 막강한 고수들이 한곳에 모인 일은 없었다.
남궁승이 종리백을 보았고, 연위는 공공대사를 보았다.
남궁승이 말했다.
“내려오시오.”
연위가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스르륵.
성천의 도제와 소림의 방장이 천천히 정자로 다가왔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이기지 못한 남궁표와 무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별실을 나서야 했다. 버티려 해도 토악질과 함께 내상이 유발될 것 같아 버틸 수가 없었다.
덜컹! 덜컹!
이내 별실로 통하는 모든 문이 닫혔다.
그리고 잠시 후.
번쩍! 콰아아앙!
승천하는 황금빛 광채와 함께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