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84)
884화. 창조의 순간은 짧고도 영원하다 (3)
“이, 이런 싸움이 있나!”
홀린 듯 두 초고수의 공방을 보던 수뇌부들.
그중 누군가가 뱉은 말은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성천에 이른 무력은 그 자체로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경지다. 그러나 그들 역시 사람은 사람인지라, 성향이 다르고 구사하는 무력이 다르며 목표로 하는 경지가 달랐다.
연호정과 종리백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았다.
종리백이 원하는 경지는 칼 그 자체에 있었다. 그저 한 자루 칼로 원하는 모든 것을 벨 때까지 나아가면 그뿐이었다. 더 강하고 더 확실한, 그리고 더 큰 칼질 한 번을 위해 인생을 건 자였다.
반면 연호정이 그리는 무(武)는 정의하기 힘든 온갖 것들을 안고 누구보다 높이 날아오르고자 하는, 천하 무림인들 대다수가 원하는 목표를 품고 있었다. 다만 그는 정의하기 힘든 목표를 이루려 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추구하는 극점(極點)을 위해 제각기 달려 나가는 두 고수. 방어보다는 공격이 우선이고, 일격을 나눌 때마다 조금도 힘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목표로 삼은 곳이 다르기에, 두 사람의 무공은 너무나도 달랐다. 동시에 치열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기에, 두 사람의 무공은 지독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있었다.
더 높이, 더 강하게, 더 완벽하게.
종리백의 칼은, 연호정의 주먹은 그러했다.
내공량과 무학 자체의 완성형만 보면 종리백이 우위에 있는 것 같았지만, 힘의 흐름을 절대 놓치지 않는 연호정의 무공 또한 예술에 가까웠다.
파멸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무공 속에서도 각자가 추구하는 바를 고스란히 보여 주며 놀랍도록 아름다운 비무를 선보이고 있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찢어져도, 그걸 보는 사람들은 잔인함이나 위태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싸움에 취한 것이다.
무림인들이 가장 원하는 축제,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달궈 주는 최고의 축제를 벌이는 두 사람.
그 싸움을 보며, 연위는 깨달았다.
‘그것이었더냐.’
신들린 듯 화포 같은 두 주먹을 휘두르는 아들의 얼굴.
먼 거리였지만 연위의 눈에는 아들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연호정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에 취해서 웃는 게 아니었다. 분명한 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싸움이 주는 희열에, 자신이 이룬 위치를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는 확신에 짓는 웃음이었다.
종리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얼마 만에 마주한 불굴의 상대인가. 산악도 쪼개 버리는 절대 무적의 칼질을 수도 없이 날리면서도 한없이 막강한 힘으로 상대해 오는 연호정에게, 그는 감탄을 넘어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완벽에 이른 무(武)를 보여 주는 두 사람.
완벽에 이른 무를 깨부수고 그 위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탐색하고 있는 두 사람.
그 또 다른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순간순간 기량을 올려 가는 두 사람의 무공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속에.
연호정이 보여 주고 싶은 강함의 미학이, 완벽하게 제어되는 힘의 아름다움이 녹아 들어가 있었다.
‘예술이구나.’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다.
그리고 두근거림은, 자신의 삶에 만족해 버린 강동 최고의 협객에게도 찾아왔다.
‘저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저들과 같은 깨달음에 녹아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 어떤 감로주보다도 달콤하고 환상적일 것이다.
부르르르르르.
연위의 주먹이 떨려 왔다.
두 사람의 싸움에 몰입한 연위의 눈에, 더 이상 이 위치에서 만족하고 싶은 안락한 마음 따위는 없었다.
더 높이, 더 황홀한 곳을 향해.
그러한 곳에 도달하여 저 종리백과 싸워 보고 싶다. 연호정과도 싸워 보고 싶다.
공공대사는 물론 검제 남궁승과도 맞붙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깨달음의 바다에 내 모든 것을 던져 보고 싶다.
번쩍!
한 줄기 빛이 연위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무형의 무언가.
그 무언가는 이미 나아갈 수 있는 길 앞에 애써 만들어 놓았던 거대한 철문을 산산이 부수는 천기(天氣)였다.
우웅! 우우웅!
시작된 변화다.
그러나 옆에 앉은 누구도, 심지어 공공대사조차도 연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두 초고수의 싸움을 지켜보는 연위는, 이전의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 * *
번쩍! 서걱!
대기를 갈라 오는 일도에 연호정의 옆구리가 베였다.
꽤 깊게 베인 상처였다. 내장까지 닿진 않았지만, 반 보의 움직임만 늦었어도 확실하게 베였을 것이다.
‘이런.’
연호정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신들린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무공을 구사하던 두 사람이지만, 먼저 위험천만한 상처를 입은 쪽은 연호정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힘이…….’
집중력의 저하다.
연호정과 종리백은 일격 필살에 능한 무사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단 한 방에 싸움의 흐름을 바꿀 만큼 압도적인 일격에 능한 이들인 것이다.
그런 이들이 벌써 수백 합이나 최선을 다한 일격들을 주고받았다.
이 정도 싸움이면 누구라도 지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라고 하나 그 힘을 구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인 바, 시간이 지날수록 내공과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연호정은 내공 이전에 체력에서 종리백보다 한 수 쳐지고 있었다.
칠십 대 나이, 반선의 경지에 올랐기에 세월의 부침과 함께 힘도 떨어지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 실전을 겪지 못했던 종리백의 집중력은 연호정보다 떨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연호정이 먼저 지쳤다.
다만, 이는 연호정이 처지는 게 아니라 종리백이 대단한 것이었다. 상단의 신기가 폭주하여 그릇에 금이 가는 일까지 발생했던 그는, 오직 정신력만으로 그릇을 붙이고 신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성천에 이른 고수들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만한 정신력에 황홀하기 그지없는 일생의 싸움까지 벌이고 있으니,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칠 수가 없는 것이다.
번쩍! 번쩍!
더 빨라진다.
수십 근 거도의 움직임은 일격에 성벽도 가를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칼질이 시간이 지날수록 미세하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도법, 상상을 초월하는 내공이었다.
쿵!
황룡기로 상처를 봉합한 연호정이 부드럽게 나아가 일장을 내쳤다. 빈틈을 만들어 일격을 지르는 와중에 어깨 어림에 칼 한 방을 더 맞았다.
콰앙!
종리백이 울컥 피를 토하며 밀려 나갔다.
더 빠르고 막강한 무력을 구사하고 있다고는 하나, 두 사람의 무공은 우위를 논하기 힘들 정도로 박빙이었다.
지금처럼 너무 몰입하다가 반격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격을 제대로 먹인 연호정은, 아주 잠깐이나마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었다.
“후우우!”
“쿨럭!”
숨을 몰아쉬는 연호정, 밭은기침으로 피를 토함과 동시에 내상을 바로잡는 종리백.
“…….”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칠어졌던 호흡은 순식간에 바로잡혔다. 초고수들의 육신에 들어찬 기운은 평범한 무림인과 비교를 불허한다. 호흡이 돌아오는 속도가 빠른 이유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제 집중력이 먼저 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토록 재미난 놀이를 하는데 집중력이 왜 떨어지나? 하기야…….”
종리백이 복부를 쓰다듬었다.
진탕된 내장을 바로잡았지만, 그럼에도 복부가 아팠다. 내상 유발 이전에 외상도 안겨 준 것, 장법인데도 망치와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너무 몰입했네. 그래서 일격을 허용했어. 공격에 너무 집중했구만.”
“그런 것 같습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 연배에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른 것만으로도 천하가 놀랄 일이거늘, 싸움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도 몹시 높네. 기(氣)의 조절 능력은 외려 날 넘어서는 것 같고.”
“칭찬 감사합니다.”
“이런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야. 내,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진 모르겠지만 또 이와 같은 명승부를 벌일 수 있을는지.”
종리백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쾌적하기 그지없는 날씨에 박빙의 고수와 지닌바 무(武)를 한계에 가깝도록 나누었다.
천하제일도, 종리백 인생에 있어 이처럼 만족스러운 승부는 다시 없을 것이다. 저 검제와 싸운다 한들, 설령 이선(二仙)이나 일신(一神)과 싸운다 한들 이렇게 만족스럽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놈, 이 망할 제자 놈아.’
종리백이 멀리 떨어진 오구문을 보았다.
오구문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두 초고수의 공방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종리백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 정도 안목은 있으니 홀로도 잘 클 수 있을 게다.’
오구문의 경지로 이 싸움의 흐름을 제대로 짚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오구문은 상식을 초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소위 말하는 천재로서, 흐름을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많은 것을 얻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표정이, 기도가, 두 눈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과 신기(神氣)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도 오만해지진 말아라. 세상에는 너 이상 가는 괴물들도 많다. 당장 나와 겨루는 이 청년은 너보다도 어린데 벌써 이 사부와 칼을 마주하고 있느니라.’
그거면 됐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허구한 날 두들겨 팼지만, 그 일격마다 내공을 담아 억지로 진기를 쑤셔 박아 주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스승이라 미안했다. 그래도 진심을 알고 잘 따라 주어 고마웠다.
“자, 그럼.”
쿵!
다 부서진 비무대 바닥에 참악도를 찍은 종리백이 양손을 탁탁 부딪쳤다.
“이대로도 충분히 좋지만, 관객들도 슬슬 지겨워하는 것 같은데.”
“전혀 지겨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하기야, 저들이라고 언제 또 이런 싸움을 구경해 보겠는가. 다만 맹주 선출 날인데, 주인공이 우리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그 말씀, 동의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칼 한 자루에 인생을 거는 무사들이야.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확실하게 봐야겠지?”
“동감입니다.”
“아직 써 보지 못한 것들이 있네. 마지막까지 잘 받아 주게.”
“저는 다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올라가 보려 합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게.”
쩍!
참악도가 뽑혀 나왔다.
치이이이이익!
큼직한 도신에서 살벌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땅에 꽂혔을 때와 다시 뽑혔을 때의 도기(刀氣)가 달랐다. 아직 써 보지 않은 무공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고, 그 힘이 종리백이 쥐어짤 수 있는 마지막인 것 같았다.
화르르르르륵!
연호정의 의복과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이전보다 더 막강한 황룡기를 피워 올린다. 순수한 강함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기파, 그러나 그 안에는 조화와 위엄이 그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숙연함을 느끼게 하였다.
종리백이 씨익 웃었다.
“지금까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가? 거기서 진기 밀도가 더 올라가다니, 이거 섭섭하구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목숨은 걸지 않았었지요.”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는데.”
“안 걸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말도 맞지.”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세를 낮추었다.
“비무의 예법 따위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배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네.”
종리백이 턱을 치켜들었다.
“한 합만 받아 주지. 먼저 들어오게. 목숨을 걸고.”
번쩍!!
연호정의 주먹에 황금빛 소용돌이가 일었다.
종리백의 눈에는 거대한 황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혼(魂)을 실은 주먹이었다.
“갑니다.”
두 고수의 싸움이, 드디어 막바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싸움을 본 사람들의 두 눈은 이전보다 더한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