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88)
888화. 마도의 고향 (1)
“정말이지…….”
양천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어렸다.
“이놈은 허구한 날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건지, 아니면 사고가 터지는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구먼.”
투덜거리는 주군의 말에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맹 측 군사의 생각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음?”
“마선 혁련휘가 주인으로 있는 신마림이라는 단체는 분명 누구도 엿보지 못한 비역입니다. 그리고 소부주는 평소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는 하나 명백한 묵룡부의 사람입니다. 묵룡부 후계자에게 그런 것을 부탁하다니, 이럴 수가 있나 싶습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소부주가 걱정스러운 건가?”
“물론 걱정스러운 것도 있지만, 저는 부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담이라?”
“제갈문호는 분명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소부주를 예전처럼 연가의 사람으로 보고 부탁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것을 달리 보면, 저희에게 온 신마림 윗선의 요청을 무림맹 차기 맹주에게 해결해 달라 부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백서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자존심 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한데도 그런 부탁을 하다니, 조금 이상합니다.”
맹 내부에서도 섣불리 타 조직의 후계자를 사지로 내몰았다며 비난받을 수 있지만, 그 전에 묵룡부 측에서 군사를 곱게 보지 못한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연호정은 이미 무림맹에서도, 묵룡부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선뜻 뭔가를 부탁하기가 애매했다.
한데도 제갈문호는 그것을 요구했다.
“상황이 어지럽다 하지 않던가. 그런 와중에 신마림주, 마선도 있고 대공자인지 뭔지도 무극에 도달한 천재라 하지 않나. 그만한 전력을 갖고 있다면 파견인 중에도 성천급 고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래, 아네. 성천의 고수라 하면 무림맹도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호정을 택한 것이 이상하단 말이겠지. 정치적으로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말이야.”
“그렇습니다.”
기실, 이런저런 것을 다 제쳐 둔다면 확실히 연호정이 제격이었다.
연호정은 무공만 강한 고수가 아니었다. 연호정의 진짜 힘은 무력이 아니라 빠른 상황 판단 능력과 어김없이 발휘되는 응변의 기지, 그리고 무시무시한 추진력에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빼어난 안목과 경험이 연호정에게는 있었다. 무공만 치면 대체할 인물이 많지만, 어떤 사건을 입맛에 맞게 종결시켜야 할 때만큼은 연호정을 대체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연호정의 쓰임새만을 생각하면, 무림 천하 온갖 사건에 그가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연호정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투입되어 그중 대다수를 해결해 냈지만, 이 세상에는 연호정 말고도 인재가 많았다.
충분히 현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고수를 취합, 파견해도 괜찮을 일이었다. 정치적인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연호정을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그 부분이 의아하긴 했네.”
“역시 그러셨군요.”
“자네 말마따나 제갈문호가 생각 없는 이는 아니지. 그러니 뭔가 자신이 있거나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굳이 호정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한 게 아닌가 싶네.”
백서의 눈이 깊어졌다.
“다소 교활하긴 합니다.”
“음?”
“저희 측에서는 이 문제를 언제든 걸고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무림맹 측에 불만을 표하는 것은 잘 이뤄진 동맹에 금을 가게 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지.”
“적어도 묵룡부는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제갈문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저지른 게 아닌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생각도 했을 걸세. 하지만 이 반대의 경우, 무림맹 또한 우리에게 불만을 표할 수 없지 않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마…….”
잠시 뜸을 들인 양천이 말을 이었다.
“영향력의 문제 같기는 한데.”
“영향력이요?”
“음.”
양천이 찻잔을 들었다.
다 식은 찻잔 위로 서서히 김이 올라왔다.
“호정의 존재감은 당대에서도 손에 꼽힌다네. 실제로 묵룡부의 특명 전권 대사로 갔지만, 호정에게 환호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았다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지만, 연호정이 선보인 파격적인 행보와 끝을 모르는 재능은 분명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은 상식 안에서 날뛰는 난놈에게나 질투를 느끼게 마련이다. 상식을 벗어난 괴수에게는 질투보다 동경을 품게 되는 것이다.
연호정이 딱 그러했다. 이미 그를 보는 무림맹 무사들의 머리에, 연호정은 동년배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괴수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제 호정은 단순히 문제 해결 능력의 달인, 성천에 도달한 천하제일의 기재를 넘어서서 만인의 마음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네.”
“한데 그것이 어찌……?”
“초대 무림맹주가 나지 않았는가.”
“아!”
백서가 탄성을 터트렸다.
양천이 찻잔을 빙빙 돌렸다. 근래 들어 술을 멀리하고 차를 가까이하는 그였다. 달리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괜히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공대사의 인품과 영향력은 누구 못지않아. 이미 소림의 방장씩이나 되는 사람이니 당연하지. 그러나 호정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네. 특히 젊은 층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지.”
“그, 그렇군요.”
“공공대사가 제아무리 존경받는 사람이라 한들, 신구(新舊)로 나눈다면 나와 같이 명백한 구시대 인물이야. 그런 사람이 초대 맹주가 되었으니, 정국을 볼 때 호정만큼 껄끄러운 존재가 없을 걸세.”
물론 제갈문호나 공공대사나, 연호정을 나쁘게 보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 그 자신의 영향력 자체에 있었다. 연호정의 존재만으로도 맹원들이 분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작다. 그러나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루빨리 그 자리에서 몰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막상 묵룡부의 특명 전권 대사로서 맹에 왔으니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제갈문호가 신마림 사태에 연호정을 밀어 넣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참 입맛대로 쓰다 버리는군요.”
“그렇지.”
“하지만…… 저희가 그를 비난할 수는 없겠습니다.”
“물론일세. 우리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양천이 ‘크허!’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술을 마시고 해장을 하는 듯했다.
백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건, 소부주의 독단은 분명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상의를 거친다면 모르되 통보식으로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양천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잖은가? 한참 멀리 있는 그 녀석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올 수도 없는 문제고.”
“…….”
“그리고…… 녀석의 그런 기질이 필요한 시대이기도 하네.”
“예?”
“솔직히 말이 본부의 소부주지,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은 관계가 아닌가.”
“부, 부주님!”
“분명 녀석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걸세.”
양천의 눈이 빛났다.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백서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있어 묵룡부는 주군의 조직이자, 자랑스러운 흑도 사상 최대의 조직이다.
양천의 직속 수하인 그는 이 조직을 어떤 문파 못지않게 잘 가꾸는 것이 중요했다. 한 시대에서 끝날 조직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유지하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부주의 존재는 양천과 비슷한,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 이상으로 중요했다.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레 정말 막 나가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원체 그런 일에 익숙한 녀석이니 잘해 나가겠지.”
양천 말마따나 연호정이 이런 일에 한두 번 투입되었는가.
그보다 약한 자들을 상대로도, 그보다 강한 자들을 상대로도 연호정은 언제나 임무를 성공시켰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자신의 목숨만큼은 항상 건사해서 돌아왔다.
세상일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연호정이라면 믿을 수 있다. 적어도 묵룡부의 소부주로서 제 목숨을 함부로 할 위인은 아닌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이에게서 연락은?”
“아, 예. 마침 연맹주와 함께 호남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양천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일세. 역시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야.”
“무림맹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으니, 한번 만나서 서로의 의중을 알아보는 것도 분명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보자고 하는 것이겠지. 와중에 먼저 숙일 줄도 알고, 아주 제법이야.”
양천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강서 연합의 모용군이라…… 호정이 정보부장으로 와서 떠날 때 이후로 처음인가?”
* * *
맹주 임명식이 끝난 후 이틀이 지났다.
“차는 입에 맞으시오?”
“예. 무척 좋습니다.”
“다행이구려.”
제갈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임명식이 뭐라고 정신이 없소이다. 어수선한 때에 오셔서 천 공자도 고생이 많았소.”
천효락이 웃으며 말했다.
“부탁하러 온 입장입니다. 그런 걸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천효락의 얼굴에 살짝 흥분기가 돌았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흥분한 것 같았다.
“덕분에 초월자들의 비무도 볼 수 있었고요. 정말이지, 어디 가서 그런 싸움을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갈문호가 빙긋 웃었다.
“정말 대단했지요?”
“예.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천효락의 눈이 반짝였다.
“연호정 소부주라면, 그의 힘이라면 본 림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에 연 소부주와 같은 인재는 본 적이 없소. 솔직한 마음 같아선 내 딸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오.”
“따님께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걸이라 들었습니다.”
“허허, 그리 봐 주시는 분들이 있어 고마울 뿐이오. 어쨌거나 연 소부주는 대단한 사람이오. 그러니…….”
제갈문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절대 그를 가벼이 보지 마시오.”
천효락은 내심 놀랐다.
그는 제갈문호가 연호정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가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묵룡부의 소부주이기도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와서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초대 맹주, 공공대사의 맹 내 장악력을 위해 일부러 그를 보내려 함이었다.
한데 지금 제갈문호의 얼굴을 보니, 마냥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연 소부주는 내게 있어,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오. 만약 그를 잃는다면 내 혈육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겠지.”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우리 가문은 연씨 가문 덕분에 힘을 얻었소. 그리고 정치적인 맹우가 되어 숱한 악업을 분쇄하고 무림맹을 여기까지 끌고 왔소. 우리에겐 그런 자부심이 있소이다.”
“…….”
“그런 그를 굳이 신마림에 보내는 것은, 맹주님의 장악력 이전에 그가 정과 사(邪), 나아가 마도(魔道)까지 아우를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외다.”
“……!”
“하니 그에게 숨기는 것 없이, 철저하게 도움을 청하시오. 비밀이라고 감추지 말고, 문화가 다르다고 배척하지 마시오. 만에 하나 그가 신마림에서 불의한 일을 당한다면…….”
제갈문호가 서늘하게 웃었다.
“무림맹과 신마림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못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