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12)
912화. 마(魔)의 숨결 (7)
서걱!
한 자루 철검 일격에 마인 둘의 목이 날아갔다.
깔끔하게 베어 친 일격이었다. 검술의 날카로움 이전에 검사 본인의 단호함이 더 돋보였다.
파바바박!
쏟아지는 만도를 회전하며 피해 낸 연지평이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퍼퍼퍼퍽!
덤벼들던 마인들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휘두르는 참격이 아니요, 찌르는 자격(刺擊)이었다. 검은 본디 찌르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지만, 한순간에 네 명의 머리통에 구멍을 내는 연지평의 섬광과도 같은 검법은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것 같았다.
“저건 뭐지?”
막원의 질문에 연호정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철검대연의 일검통천(一劍通天)입니다. 그걸 연환식으로 구사했군요.”
“동작 자체가 연환식으로 구현될 만한 것이 아닌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막원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천재는 많다더니, 자네도 자네지만 자네 동생도 비범하기 짝이 없구먼.”
“재능은 저보다 낫지요.”
연지평의 움직임을 보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단호하기 그지없는 검법.
적을 죽임에 있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전투술, 이 짧은 시간 만에 자신이 연마했던 무(武)를 실전에 맞게 녹여 내고 있었다.
엄청난 재능이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연지평의 얼굴은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힘든 일이다. 그걸 인정해야만 해. 너는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가르쳐 줄 수 없는 문제였다. 천 마디 말로도, 만 개의 문장으로도 설명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저 홀로 깨닫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연호정이 연지평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였다.
반면.
콰드드드득!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적을 죽여 왔던 부선이 갑작스러운 기공으로 마인 셋의 몸을 파괴했다.
단 일격으로 파괴된 마인들의 몸뚱이는 거대한 짐승의 앞발에 당한 것처럼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화했군.’
도제 종리백과의 싸움에서 그는 선풍사자신권이라는 권법으로 조법(爪法)과 같은 형태를 구현했다.
부선은 달랐다. 연호정의 수준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사자신권의 투로를 조법에 녹여서 일격에 적을 전투 불능 상태로 빠트렸다.
위력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깨달음을 실전에서 구현한 것이다. 찬사받아 마땅한 성장이었다.
‘결국 세상 모든 싸움은 누가 더 몰입하느냐, 누가 먼저 상식을 깨느냐, 누구의 마음이 더 단호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이야.’
퍼억! 퍼억!
사자가 앞발을 휘두르듯, 손가락으로 마인 둘의 목을 찢어 버리는 부선의 무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소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듯 깔끔하기만 했던 부선의 보법과 자세가 점차 격렬하게 바뀌었다.
휘두르는 조법의 위력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으니, 그 위력과 투로를 더 제대로 살리기 위해 움직임부터가 바뀐 것이다.
한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저 영역에 한번 발을 들인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저것은 종사(宗師)의 재능이었다. 저 재능을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훗날 부선 역시 패율처럼 새로운 무공을 창조해 내는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나설 일은 없겠군.”
“그렇습니다.”
“의도한 건가? 처음 출정할 때부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는 의도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소뢰음사처럼 천리안의 술법을 가진 것도 아닌데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긴, 술사가 있는 줄 알고 나부터 보냈으니.”
“다만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연호정이 연지평을 가리켰다.
“지평은 적을 대하는 자세가 물렁했지요. 그 마음가짐과 자세 때문에 더 높이 오를 수 있음을 알고도 손을 뻗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연호정이 이번에는 옥청을 가리켰다.
“그에 비하면 옥청은 어느 정도 완성된 경험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멸사군에서도, 의정군에서도 수도 없이 많은 전투에 임했으니까. 다만, 그는 평생 배운 무당의 검과 살검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허어.”
“묵비는 당가주님께 사격술의 가르침을 받고 있지요. 묵비의 궁술은 대단히 뛰어나고 독특하며, 상식을 무시하는 무공입니다. 하지만 상식을 파괴하여 나아가기 위해선 기존의 상식도 알아야 하는 법. 묵비에게는 오랜 역사를 통해 입증된 정통의 무공이 필요합니다.”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완성된 사출식이 묵비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전통 궁술의 힘을.
“패율 선배에게는 자신이 완성한 무공의 단계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고, 부선에게는 이 싸움 자체가 중요합니다. 언제나 암중에서만 싸워 봤으니까요.”
“그렇구먼.”
막원이 힐끔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은 완전히 집중한 채로 묵비에게 이런저런 깨달음을 전수하고 있었다. 신들린 듯 가르침을 흡수하는 묵비를 보며, 당관 역시 아닌 척해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면 당가주도?”
“당가주님이야말로 이 자리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지요.”
당관을 보는 연호정의 눈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삼교에, 무극에 오른 고수가 얼마나 있는지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
“무림의 전쟁에선 머릿수로 하는 싸움이 따로 있고, 고수가 할 수 있는 싸움이 따로 있는 법이지요.”
“한 사람이라도 더 무극으로 끌어올리는 게 좋다, 이거군.”
“물론입니다.”
“내가 봐도 당가주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이야. 깨달음도 깨달음이지만, 특히 저 내공량이 엄청나더군. 솔직히 단순 양만 보면 자네보다도 많아.”
“바로 그게 중요한 겁니다. 당가주님은 이미 무공의 한 부분에서 한계를 돌파한 사람이지요.”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부친과는 다르군.”
“완전히 반대입니다. 아버지의 내공도 대단했지만, 같은 수준의 고수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내공은 부족한 감이 있었지요. 애초에 내공을 그렇게 신경 쓰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깨달음으로 검도(劍道)의 극치를 이룬 분이지.”
“당가주님은 반대입니다. 이번 신마림행에서, 당가주님이 모든 것을 뛰어넘고 빛으로 나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연호정은 당관의 변화를 더욱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사천 전투가 끝났을 무렵의 당관 역시 굉장한 고수였지만, 가문을 재정비하고 다시 무림맹으로 온 당관은 무수히 많은 것을 안고 있었다.
당연히 암왕 당형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저 내공이었다.
더 이상 증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내공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독이든 약이든, 아니면 별도의 깨달음이었든 당관은 몸으로 한계를 깨 버린 사람이었다.
반쪽이나마 한번 한계를 깨 본 사람은 또 한 번 한계를 깰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연호정이 당관에게 기대하는 점이었다. 당관의 독과 암기는 집단전에서 파멸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더라도 데리고 왔을 것이다.
단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서.
퍼억!
“크아아악!”
몇 번의 칼부림 후, 무지막지한 각법으로 위소강의 복부를 후려친 화향이 그의 오른팔을 베어 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위소강이 부르르 떨었다.
익숙한 손짓으로 위소강의 마혈을 짚은 화향이 마차를 향해 위소강을 던졌다.
쿵!
허공을 날아 떨어진 위소강이 비참한 기색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떨어질 때 어깨를 잘못 짚어 왼팔마저도 부러져 버렸다.
파아아악!
기다렸다는 듯 연지평과 옥청, 패율과 부선이 뒤로 물러났다. 연신 화살을 날리던 묵비 역시 잠시 시위를 놓고 손을 풀었다.
“…….”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마단은 이제 이백오십여 명만 남은 상태였다. 고작 다섯이서 호마단의 절반을 쓸어 버린 것이다.
일방적인 싸움 전개. 거기에 수장까지 잡혀 버렸다. 호마단은 당황하여 이쪽을 향해 칼을 겨눌 뿐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패율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어쩌냐? 다 죽일까?”
이백이 넘는 병력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그였다. 애초에 그와 부선은 아직도 팔팔한 상태였다.
반대로 연지평과 옥청의 몸에서는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칠었던 싸움, 몸 여기저기에 상처도 있었다.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뜬 연호정이 호마단을 노려보았다.
쿠구구궁!!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파.
황금빛 아지랑이를 몸에 두른 연호정의 등 뒤로 거대한 용의 몸체가 환상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겨누어졌던 마인들의 만도가 서서히 내려갔다.
압도적인 기운으로 적을 압박하니, 그 수가 이백이 넘더라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초월한 반신(半神)의 무력, 황룡공의 신비로운 기운 앞에 호마단원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나는 신마림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저 너희가 주인을 잘못 만난 개라는 것, 그리고 바뀐 하늘에 한탄도 못 하고 끌려 나온 멍청한 놈들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마인들이 침을 삼켰다.
가만히 그들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천효락을 보았다.
“어떻게 하겠소?”
“…….”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신마림은 변질되었소. 부대 하나만 저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한데.”
천효락이 한숨을 쉬며 호마단을 바라보았다.
호마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명령을 받았으니 싸우긴 해야겠는데, 싸워도 결과가 명확하니 망설이는 것이다.
천효락은 저들의 저런 모습이 싫었다.
신마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꼴 보기도 싫은 위소강이 단주가 되었다 한들, 최소한 마지막까지 생명을 불태울 줄 아는 호기라도 있어야 했다.
저들은 그들의 상관인 위소강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망설임을 알게 되었고, 죽음의 공포를 알게 되었다.
“저의 의견이, 소부주의 결단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까?”
“물론이오. 이곳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아니까.”
천효락이 눈을 감았다.
그는 신마림의 정상화를 생각했다. 모든 게 바로잡히고 난 이후, 신마림은 예전처럼 강철의 조직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역시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천효락이 다시 눈을 떴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호마단원들의 얼굴.
“저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싸움이 벌어지면, 여러분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까?”
천효락이 말하는 해는 아군의 전투력에 이상이 생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선봉장들은 충분히 잘해 주었소. 이제는 막원 형님과 내가 나서야겠지.”
“그렇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힘을 온존하는 게 최상이기는 하지만, 휴식이라는 선택지도 있으니까.”
천효락이 쓰게 웃었다.
“다 죽여 주십시오.”
번쩍!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호정과 막원이 돌진했다.
콰르르르릉!!
일방적인 학살은 단 반 각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