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19)
919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7)
훅!
돌진을 멈춘 네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산은 웅장했다.
좌우로 한껏 벌어진 산맥은 광활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서너 개의 봉우리 너머에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는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것이다.
일행이 선 곳은 그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평야보다 확실히 온도가 낮았다.
“멋지군.”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나도 나중에 이런 산속에다 저런 건물 지어 놓고 살까.”
웅장한 궁전이 대여섯 개에, 그 주위로 수많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어지간히 뛰어난 축성가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실력이었다. 싸우러 왔는데도 감탄부터 나올 정도로 웅장했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중에 정말 저렇게 살고 싶으면 말해라. 본가의 장인 몇 명 소개해 주마.”
“집 짓는 사람도 있습니까?”
“뭐든 제조하고 쌓고 만드는 쪽에서는 본가가 최고야.”
“역시 당가답습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당관이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했다기보다는 뭔가 냄새를 맡기 위함이었다.
“피 냄새가 진하군.”
독을 다루다 보면 다른 감각보다도 후각과 미각이 발달하게 된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이 당가인들처럼 독을 접하면 목숨이 위험하겠지만.
“반란이 터진 지 꽤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피 냄새가 생생하다.”
“그렇군요.”
쿵.
광룡부를 땅에 찍은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천 공자의 말로는 수뇌부를 제외한 마인의 숫자만 일천을 헤아린다고 하였는데.”
일천은커녕 그 반도 안 되는 인기척만 느껴진다.
묵비가 옥청에게 물었다.
“뭔가 느껴져?”
“물론입니다.”
“뭔데?”
“뭔지는 몰라도…….”
옥청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무종지벽을 넘어섰으니 나름의 설렘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심심한 대화를 할 때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가주님도, 묵 부장님도 느껴지십니까?”
“감당키 힘든 고수의 존재는 느껴지지. 다만…….”
묵비가 말했다.
“초고수가 오고 있다는 건 알아. 그 기세가 너무 노골적이라, 뭔가 다른 걸 꾸미고 있나 싶어서 묻는 거야.”
“그러셨군요.”
그때, 연호정이 손을 들어 대화를 제지했다.
“옥청 말마따나 대화는 이쯤 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중앙 궁전 지붕 끄트머리에 한 명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토록 높고 좁은 지붕 끝에 서 있음에도 몹시 안정적으로 보인다. 뒷짐을 진 손에는 길쭉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옥청의 몸에서 혼원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당관의 양손에 비수가 하나씩 들렸고, 묵비는 홍련궁의 시위를 잡았다.
노인, 묵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어이 오셨구먼.”
연호정이 검지를 까딱였다.
“내려와.”
묵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투공마영으로 대화했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묘한 놈이었다.
생각해 보면 도발 같지도 않은 도발이었다. 그냥 싹 무시하고 내 할 말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놈의 눈빛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시가 되지 않았다.
사사사삭.
궁전 아래, 만도와 언월도 등을 쥔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얼추 삼백을 헤아렸다. 좌우로 쫙 펼쳐진 마인들의 모습이 마치 기다란 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나같이 굉장한 덩치를 자랑하는 이들. 시커먼 경갑은 물론 투구까지 장착했는데, 얼핏 봐도 어지간한 충격은 갑옷으로 다 상쇄될 것만 같았다.
“신마림의 철마단(鐵魔團)이라고 한다.”
“철마단이라.”
“상당한 녀석들이야. 솔직히 전력만 보면 본교의 정예들과 비교해도 큰 모자람이 없더군.”
사아아아악.
묵로의 말에 흥분했는지 철마단의 기세가 한층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신마림의 원류가 광혈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이 원류인 광혈교에 비해도 손색없을 정도라니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로만 우리를 막겠다고?”
“틀렸다. 이놈들과 내가 막는 것이다.”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혈교의 일사제장이라면, 교내에서 그보다 윗줄인 고수가 다섯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힘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삼교의 초고수들은 언제나 중원의 성천을 눈 아래로 보았다. 방심 못 할 놈들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절대 자신들이 성천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겠지.’
연호정은 공손백룡을 떠올렸다.
공손백룡의 신법은 무림사를 통틀어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빼어난 것이었다.
오로지 신법 능력만으로도 삼군이 아닌 왕으로 불릴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대처 능력이 빼어난 자가 아니라면 상대하기 힘들 수밖에 없는 고수였다.
그런 공손백룡이 고작 오사제장이다. 한데 중원에서는 그를 비왕이라 부르며 희대의 고수라고 찬사를 토해 냈다.
중원 무림인들이 고수를 보는 시선이 어떤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진실로 자신들보다 뛰어나다 한들 자존심에 믿지도 않을 터였다.
물론 개중에는 냉정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이 상대했던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앞의 저 늙은이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 고수일까.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뭐, 이런저런 말이 필요치 않겠지?”
묵로가 피식 웃었다.
“물론 그렇지. 자, 그럼 어디 너희들의 실력…….”
그때였다.
퍼어어억!
살벌한 소리와 함께 중앙에 선 철마단원 하나가 쓰러졌다.
후욱.
묵비의 홍련궁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극도로 뾰족하고 빠른 무형탄 일격이었다. 내공 소모는 극단적으로 줄인 채 보이지 않는 화살로 적을 저격하는 신들린 궁술이었다.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가르친 값을 하는구먼.”
화아아아아악!
철마단이 살기를 뿜었다.
묵로가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공격해라!”
파바바바바박!
백여 명의 철마단원들이 땅에 놓인 단창을 던지고, 나머지 철마단원들이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타고 내려왔다.
그때였다.
쿵!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딘 연호정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번쩍! 콰르르르릉!!
비탈길이 수직으로 쪼개지며 철마단원 이십여 명이 좌우로 날아갔다.
연호정이 당관을 돌아보았다.
당관의 몸에서는 어느새 어두운 녹색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옥청의 청록빛 기운과는 전혀 다른 인상의 제왕독기였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아아앙!
용형칠기보법으로 비탈길을 타고 오른 연호정이 좌우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퍼퍼퍼펑!
작정하고 힘을 쓰지는 않았지만, 도끼날에서 뿜어진 경풍이 또 다른 철마단원 이십여 명을 쓰러트렸다.
빠각!
단창을 던지는 철마단원 하나의 정수리를 밟고 도약한 연호정이 허공 높이 솟구쳤다.
묵로의 눈에 마기가 번뜩였다.
그가 지팡이 끝을 연호정에게 겨누었다.
콰아앙!
기척도 없이 폭발하는 발경이었다.
허공에 뜬 연호정의 몸이 후방으로 밀려 나갔다. 아무런 피해도 없었지만, 움직임이 제한되는 허공에서 밀려난 것만으로도 위기라 할 만했다.
그러나.
‘……?!’
묵로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발밑으로 환상과도 같은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 불길은 마치 거대한 날개처럼 보였는데, 그 날개가 달린 몸통은 뱀의 그것처럼 길고 바위처럼 육중했다.
‘용?!’
파아아아아앙!
허공에서 도약하는데, 그 속도가 평지에서 달리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허공답보!’
환상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연호정은 묵로의 머리 위에 나타나 있었다.
묵로의 좌장이 머리 위로 향했다.
훅!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력이 연호정의 몸을 압박했다.
순간 연호정은 온몸의 피부가 모조리 벗겨져 날아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 정도로 묵로의 장력은 살벌한 압력을 자랑했다.
광혈교의 절기인 무형마환장(無形魔煥掌)이었다. 장법의 난이도가 광혈교에서도 손에 꼽히는지라 지금까지 대성한 사람이 없다는 절공이었다.
연호정 역시 좌수를 내질렀다.
황금빛 용형의 환상과 함께 묵직하게 내려간 장력이 무형마환장과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시끄럽고 잡다한 소리가 싹 묻혀 버릴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드드득!
궁전 지붕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묵로 역시 허물어진 지붕 밑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촤르르르르륵!
어디선가 쇠 비늘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묵로의 눈이 번쩍였다.
‘쇠사슬?!’
장력 충돌의 여파로 더 멀리 날아갔어야 할 연호정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었다.
교룡쇄였다. 근래 들어서는 잘 쓰지도 않았던 교룡쇄를 무너진 지붕 아래 철 기둥으로 쏘아 내 묶고 날아온 것이다.
부웅!
묵로의 지팡이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무형의 마기가 여기저기 소용돌이치며 엄청난 압력을 자아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황룡.’
거대한 호수에서 잠자고 있던 황금빛 신룡(神龍)이 완전히 깨어나며, 그의 몸 전체에 황룡신왕기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광룡부가 태산압정의 기세로 내리쳐졌다.
콰아아아앙!
“큭!”
강철처럼 단단하고 무거운 역장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묵로의 몸을 튕겨 냈다.
묵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형마벽(無形魔壁)을 갈라 버렸다고? 고작 한 수로?!’
놀란 것은 묵로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도끼질 한 방으로 저 엄청난 압력을 지닌 내공의 방벽을 깨부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쏟아 낸 공력의 양을 보면 쉽게 부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방에 찢겨 날아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 흐름이라면…….’
파아아악!
이것은 기회였다.
바닥에 내려선 연호정이 교룡쇄를 회수하고 정면으로 달려 나갔다. 용형칠기보가 펼쳐지며 상대의 빈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으로 신형이 이동했다.
순간 묵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걸렸군.’
상대가 빈틈으로 인식한 곳에는 무형마환공(無形魔煥功)의 압마중벽(壓魔重壁)이 펼쳐져 있다.
원래 있던 빈틈이 아니라 일부러 만들어 낸 빈틈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여 신체의 자유를 박탈해 반격을 가하는 것이 묵로의 주된 공격 방식이었다.
묵로는 지팡이에 있는 대로 마기를 쏟아부었다.
이윽고, 연호정이 압마중벽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놈! 끝났다!’
묵로가 벼락처럼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찢어질 듯 부릅떠진 그의 눈은 불신으로 물들어 있었다.
연호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에서 황금빛 진기를 뿜고 있는 연호정이, 거대한 황룡의 몸체를 환상처럼 두른 그의 육신이 압마중벽의 압박감을 무시한 채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압마중벽에 제대로 걸리면 바위도 으스러진다. 제아무리 무극수라 해도 그 정도 압력이면 순간적으로나마 신체의 자유를 잃는 게 정상이었다.
한데도 연호정은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부욱!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압마중벽이 찢겨 나가더니, 어느새 일 장 거리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말도 안 돼!’
묵로가 서둘러 지팡이를 휘둘렀다.
연호정 역시 사선으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좌우 벽을 부수고 밀려 나간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