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23)
923화. 천적(天敵) (4)
‘굉장하군.’
쐐기 형태의 진법으로 돌격하는 붉은 검객들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엄청난 마기야.’
선두와 중앙, 후미에 배치된 초절정고수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메우며 적당한 거리를 벌린 채 돌진하는 절정의 검객들은 흔들리지 않는 날 선 검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돌격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다.
충분한 돌파력만 유지한 채로 서서히 전진하고 있다. 상대 부대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알 수 없기에 최대한 신중하게 진격하는 것이다.
‘물론 신중함이 지속되지는 않겠지.’
상대는 마공을 익힌 마인들이다.
일대일 생사결에서도 다급함에 흥분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게 부대 단위면 감정의 전이는 훨씬 더 빠르고 격렬하다.
황석태가 외쳤다.
“용아삼백진, 산진(散陣).”
세 부대로 나뉜 삼백의 철기단이 길게 늘어진 쇠사슬 형태로 바뀌었다.
이 열 횡대였다. 마치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연상시키는 대형, 쇠사슬만 두르지 않았을 뿐 단원 하나하나가 고리 역할을 하며 혈마검을 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패율과 부선, 연지평은 황석태를 주시했다.
연호정은 최고수 몇을 추려 본진으로 돌격했고, 막원은 적장과 일대일 생사결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좌장은 황석태다. 개인의 무력도 대단하지만, 그의 통솔력과 전술안은 연호정이 모든 걸 맡길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황석태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전방 돌격…… 기세의 변화가 다채롭지는 않다. 그렇다면 철저히 한 몸으로 움직이거나, 덩어리로 오다가 일거에 산개하는 방식 둘 중 하나겠지.’
황석태와 비슷한 경지라도 부대의 기세를 읽고 진형을 예상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항상 부대 전술을 공부하고 집단전의 경험이 풍부한, 나아가 기감까지 예민한 이여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과의 거리는 이십여 장.
황석태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원활한 소통을 위해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패율, 부선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한 기공술로 첨병을 물고 늘어져라.”
파아아악!
기다렸다는 힘을 끌어올린 패율과 부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쿠웅!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동시에 진각을 밟은 두 사람이 제각기 관일공의 후예섬(后羿閃)과 선풍사자권의 돌풍혈아(突風血牙)를 내쳤다.
초절정고수 두 명이 전력을 다해 쏟아 내는 기공술이었다. 제아무리 하나로 뭉쳐 다가오는 부대라도, 아니 하나로 뭉쳐서 다가오기 때문에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는 기가 막힌 한 수였다.
콰르르릉!!
폭음과 함께 혈마검들의 진격 속도가 줄어들었다.
대지에 실금이 가고, 선두에 선 검객들 십여 명이 좌우로 밀려 나갔다.
황석태의 눈이 번쩍였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전방에 자리한 초절정고수의 검막(劍幕)과 순간적으로 집중된 진세(陣勢)로 두 고수의 힘을 상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번쩍!
황석태가 날린 두 자루의 단창이 좌우로 밀려난 혈마검객 둘의 가슴에 정통으로 박혔다.
관통은 아니지만 창날이 심장을 완전히 꿰뚫어 버렸다. 검객 둘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시작부터 적병 둘을 사살했다. 하나하나가 절정고수의 위용을 갖춘 고수들이니 빈틈을 노린 기습이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략 전술에 문외한이더라도 드러난 빈틈을 공략할 때엔 강력한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도 고작 검객 둘의 가슴을 뚫지 못했다. 심장을 정확히 파괴했지만, 관통상도 내지 못한 것이다.
황석태의 비창(飛槍)이 저 정도 위력에서 그칠 리가 없었다.
‘역시.’
저것은 진법을 이루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뿜는 기세로 무형의 내공 방패를 세우는 고차원적인 공부가 아니었다. 그만한 기운을 상시 발산하며 달리다간 장기전이 불가능하다.
그냥 마인들의 몸뚱이가 단단한 것뿐이었다. 어떤 마공을 익혔는지 모르겠지만, 그 강도만 보면 거의 바위에 준하는 듯했다.
‘쉽지 않겠군.’
파아아아악!
한 차례 주춤했던 혈마검객들의 기세가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패율과 부선의 공격을 막아 낸 혈마대의 부대주, 혈왕검(血王劍)의 눈에서 지독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감히!”
고성을 터트린 그가 양손으로 쥔 검을 횡소천군으로 휘둘렀다.
번쩍! 쿠웅!
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내친 과격한 검기였다.
당연히 패율과 부선은 피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피하면 그것을 황석태와 철기단이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패율은 짧은 기형검으로 기봉검법(岐峯劍法)을, 부선은 양천의 깨달음으로 만든 쾌속한 권장술인 쌍수호투(雙手虎鬪)를 꺼내어 방어했다.
콰콰쾅!
거대한 검기가 흩어졌다. 패율과 부선이 한 걸음씩 뒤로 밀려 나갔다.
혈왕검의 무력은 두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세밀하게 보면 반 수 아래 정도일까.
그러나 돌격진의 형태로 달려들며 내친 검기는 제아무리 두 사람이라도 쉽사리 막기 힘든 것이었다.
하물며 혈왕검은 마공을 익혔다. 마공은 역천의 무학이라, 신체의 안정을 버리고 극단적인 출력을 요구한다. 무공 자체가 거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러난 두 사람이 재차 덤벼들려 하는 순간.
“패율과 부선은 각개 전투로.”
파아악!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이 달려드는 혈마진의 좌우 측방을 공격했다.
혈왕검의 눈이 황석태를 향했다.
어느새 황석태와 철기단은 돌진하고 있었다. 다만 돌진의 형태가 혈마대와는 달랐다.
중앙에는 황석태와 십여 명의 철기단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부드러운 쇠사슬처럼 움직이며 혈마대의 주위를 완전히 감싸 안는 형국이었다.
패율과 부선이라는 걸출한 고수들로 측방을 공격한 후, 치고 빠지는 데에 능한 철기단원들로 뒤를 받치게 한다. 순간적인 대응 능력이 돋보이는 진세였다.
연지평의 눈이 커졌다.
‘그렇구나.’
그는 부대 전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곧바로 깨달았다. 적이 일순간 산개하여 각개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배움 이전에 직감이었다. 영광스러운 성천에 이름을 올린, 천하를 논하는 혈육이 직접 인정한 천재의 감각이었다.
‘황 단주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야. 그래서 이런 진형을…….’
연지평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안다고 해서 모두가 저런 판단을 내리진 못할 것이다. 이것은 지식 이전에 경험의 문제였다. 제아무리 감각으로 느껴서 안다고 해도, 교전 경험이 풍부하지 않으면 단호하게 대처하기 힘든 일이었다.
‘왜 형님이 황 단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알겠어.’
지금 연지평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었다.
의정군과 함께 광동에 남았을 때도, 그들의 출정을 따라서 세상을 둘러보고 왔을 때도, 미친 사람처럼 검도에 열중하면서 모용우와 수많은 대련을 벌였을 때도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이것이 세상이구나.’
세상에는 자신이 모르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지평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거침없이 세상에 나가, 거친 세파를 이겨 내며 성장한 진짜들의 인생을 목격한 그였다.
만약 자신 역시 진즉 세상에 나왔더라면 저들과 같이, 아니 저들의 발치에나마 이를 수준이 되었을까?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연지평은 어느새 냉정해졌다.
그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그것은 이룬 경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당장 그의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구축한 후기지수는 천하에 드물었다.
다만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지나치게 뛰어난 탓에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형님은 말씀하셨다. 함께 세상에 나가 위험을 헤쳐 나갔다면 벌써 무종을 넘어섰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내가 얻은 검리(劍理)의 반도 손에 넣지 못했을 거라고.’
그는 연호정의 말을 누구보다도 신뢰했다.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심지어 혼자도 아니고 함께다. 형님 없이 홀로 세상에 나갔다면 지금쯤 어느 야산에 묻혀 뼈만 남은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재능, 실력과 상관없는 문제.
번쩍!
연지평의 눈에서 찬연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렇구나.’
홀로 세상에 나갔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생존을 장담키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 자신의 성정 때문에 그렇다.
연지평은 처음으로 자신의 성격을 냉정하게 직시했다.
‘나는 단호하지 못했다.’
단호한 검결로 적을 죽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단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의 진실을 외면한 칼질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을 죽이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적을 상대한 것이다.’
틀렸다.
어쩔 수 없는 건 맞지만, 진정 적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적을 향한 증오도,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심지어 아군을 향한 걱정도 아니다.
내 검으로, 내 눈앞에 있는 적을 상대할 때 가져야 할 단 하나의 마음가짐을 알았어야 했다.
‘눈앞의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
그렇다.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시작된다. 나야말로 세상의 중심이요, 나야말로 현재를 증명하고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너무나도 당연한 그 진실을, 연지평은 여태 외면하고 있었다.
착하기 때문이다. 천성이 선하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보다 상대를 위하고, 나로 인해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당연히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걸 모를까.
다만 연지평은 외면했을 뿐이다.
‘적을 죽여도 나를 위해 죽이는 거야. 한 명을 상대하든 문파를 상대하든, 내가 칼을 뽑는 것은 나를 위해서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마음 깊이 인정한 사람만이 내 사람도 걱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적을 증오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오직 나 자신을 인정한 사람만이 진정 단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쿠르르르릉!
연지평은 순간 휘청였다. 머릿속에서 천둥 벼락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아아아아!!’
마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던 성벽이, 보지 않으려고 둘러쌌던 거대한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안에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도 환하게 빛나는 하나의 의지였다.
생존(生存)이다.
너무나도 선하고 이타적이었기에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소년(少年)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깨달은 순간 청년(靑年)으로 변했다.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의식이 쌓아 둔 벽도, 그리고 무(武)의 종착지 앞에 세워 둔 거대한 벽도.
하나를 부수니 그다음 벽도, 또 그다음 벽도 너무나 쉽게 부서지며 넓고 긴 대로(大路)를 보여 주었다.
걷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연지평은 힘차게 그 대로에 발을 디뎠다.
쿵!
거인의 발소리였다.
마침내 대로에 발을 디디자, 또 하나의 깨달음이 연지평에게 찾아왔다.
너 자신의 재능을 믿으라는 형님의 말.
성천에 이름을 올린 그 자신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었다는 형님의 애정 어린 조언.
번쩍!
연녹색 휘황찬란한 대검(大劍)이 궁전의 기둥처럼 거대해지며 연지평의 검력을 밑도 끝도 없이 증폭시켰다.
‘형님.’
연지평이 눈을 감았다.
‘저는 이제 머뭇거리지 않는 법을 알았습니다.’
훅!
하늘 높이 뛰어오른 연지평의 신형이 어느새 혈마대의 중앙 허공에서 나타났다.
모두가 깜짝 놀라 연지평을 보는 순간.
여덟 개로 늘어난 그의 검이 군자도(君子道)와 수라도(修羅道)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혈마대의 대주, 혈천검(血天劍)이 외쳤다.
“산개해라!”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