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4)
94화. 동상이몽(同床異夢) (6)
“여기 계셨소?”
“…….”
“정보가 왔소. 현재 명허림은 몽성(蒙城)을 지나고 있소. 여전히 느린 움직임이니 빨라도 이틀은 걸릴 것이오.”
“알았다.”
“혹시 모르니 내일 정오 이후로는 안가 입구 쪽에서 대기해야 할 거요.”
“그래.”
“그럼.”
황풍정의 정보원이 사라졌다.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 있던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지.”
명허림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굳이 모용군과의 거래나 명성 때문이 아니라 언제고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명허림의 재능이라면 명천만큼이나 빨리 가짜 사신공을 익힐 것이다. 스스로의 변화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익힌다면, 훗날 관계없는 사람들이 많이 다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신무의 종사(宗師)로서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묵비…… 허, 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팔공산에 안휘혈궁, 묵비가 있다는 걸 알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왔다. 하지만 묵비가 속한 조직에서 이런 난장판을 벌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일단 목숨은 살려 놨지만…….
‘억지로 잡아끌 순 없는 노릇이지.’
혹시라도 혈사(血事)를 일으킬 계획이었다면, 충분히 얘기를 들어 본 후 그냥 놔둘지 도울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이후, 다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도 생각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팔공산에 거하고 있다면? 그때도 어떻게든 설득해서 내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묵비의 재능이나 과거의 친분 때문이 아니었다. 사음교를 막기 위해서는 그가 잘 아는 전력이 필요했다. 실제로, 과거에 묵비를 전략적으로 가장 잘 활용했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당장 억지로 데려가기가 힘들었다.
거리로 나온 연호정이 청사루 후원 이 층으로 향했다.
“아, 오셨습니까?”
“아이는 어떻소?”
중년의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데 몹쓸 독까지 중독되었군요.”
“어떻게, 해독은 가능하겠소?”
“어렵지만 못할 건 없습니다. 하나 몸 상태까지 끌어올려야 하니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회복 정도를 봐야겠지만, 못해도 일 년은 잡아야 할 것입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군.”
“다행도 천만다행이지요. 하루 이틀만 늦었어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뻔했습니다. 천지신명이 도우셨어요.”
“아이의 아비가 많이 노력했소.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 모양이오.”
“아! 그렇군요. 어? 그런데 아비는 어디에 있답니까?”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허억! 허억!”
침상에는 백궁천이 누워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상처 입은 곳은 전부 치료했지만, 생명력이 다한 몸이었다.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허탈함 때문일까. 그는 급속도로 기력을 잃어 갔다.
가만히 백궁천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등을 돌렸다.
주르륵.
묵비, 아니 백향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나 때문이에요.”
“뭐가?”
“내가, 내가 재능이 없었다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너의 사정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냉혹한 말이었다. 백향이 젖은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보며 연호정은 말 못 할 감정에 휩싸였다.
‘죽었군.’
눈이 죽어 있다.
슬픔과 후회로 몸부림치는 와중, 두 눈이 점차 감정의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저 빛이 완전히 꺼지면 그것이 바로 묵비의 눈빛이었다.
묵비는 책임과 도리를 알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훈련된 반사 행동에 가까웠다.
다만 자신을 비롯한 흑제성의 무장들과 어울리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평소에는 여전히 남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묵비는, 사음교주과 함께 동귀어진한 자신의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군이자, 어쩌면 그녀에겐 유일무이했을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연호정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넌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
“너는 감정을 쉬이 드러낸 적이 없었지. 하지만 네게 감정이 아예 없진 않았어. 오히려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무인이었지.”
짙은 슬픔 속에서도 백향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 청년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난 네가 좋았다. 적어도 그때의 넌 너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길이 고통스러웠지만,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지.”
“무, 무슨 말을…….”
“난 너의 과거를 몰랐다. 이럴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 이상을 알아보려는 건 오지랖일 뿐이겠지.”
“……?”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다만 난 끔찍한 미래가 될 과거를 고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의 나와는 다른 내가 필요한 법이지.”
“……?!”
“묻겠다. 넌 어떻게 살고 싶으냐?”
백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활을 잡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시위를 당겼다. 이후 그녀의 삶은 예신이 되기 위한 귀궁수로서 결정되었다.
그저 그렇게만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다른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질문을 다시 하지.”
“…….”
“넌 그 예신이라는 존재를 믿나?”
“……!”
“역시 그렇군. 너나 저 침상 위의 궁사나, 예신이란 존재를 믿지 않아. 그런데도 되려고 하지. 그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백향의 얼굴에 충격이 깃들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네가 새 인생을 찾고 싶다면 개방의 지부에 들러서 내 이름을 대면 된다. 너의 인생을 책임져주진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을 거야. 물론 대가는 받겠지만.”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내 이름은 연호정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나섰다.
쿵.
문이 닫히자 백궁천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백향은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몰아치던 폭풍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그 폭풍이 남기고 간 말들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때였다.
“쿨럭! ……라가.”
깜짝 놀란 백향이 백궁천을 바라보았다.
“그, 그를 따라가.”
“오라버니!”
재빨리 일어난 그녀가 백궁천 앞에 섰다.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들어요?”
“정신은…… 아까부터 들었지.”
백향이 백궁천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정신이 들었다면 어서 자세를 바로잡으세요! 제가 진기를 도인해서……!”
“그러지 마라.”
“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난 곧 죽는다.”
백향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
백궁천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향아.”
“……네, 오라버니.”
“향아, 향아, 향아.”
그는 몇 번이고 백향의 이름을 불렀다.
그 애절한 목소리와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감정에 백향은 고개를 숙였다.
백궁천이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무뚝뚝한 얼굴에 그러한 미소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기억나느냐? 넌 어릴 적부터 우리 형제들의 귀염을 받았지.”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를 향한 형제들의 눈은 차가워졌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의 재능이 우릴 한참이나 넘어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어른들은 네 실력을 보고 경합을 미뤘다. 너의 재능이 아까웠기 때문이야. 그래서 오 년 전의 경합은 흐지부지 끝나 버렸지.”
“오라버니.”
“하지만…… 그 말은 너의 화살에 우리가 다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냐? 나는 그 결정이 싫었다. 해서 너를 더더욱 증오했다.”
백궁천의 손 위로 백향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널 증오해선 안 되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라버니.”
“널 증오할 게 아니라 관일곡을 나왔어야 했다.”
“……!”
“예신이 되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했어야 해. 그것이 귀궁수의 삶이다. 하지만 난 죽음을 각오하지 못했다.”
백궁천이 웃음이 희미해졌다.
“타성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싫었다면 곡을 나왔어야 했고, 그곳에 남아 있으려면 죽음을 받아들였어야 했어.”
“…….”
“그런 나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은 아내를 만났을 때였다. 그리고…….”
백궁천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내게 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다.”
자신의 딸이 아니다. 하지만 딸로서 대했다.
충격은 컸지만 백궁천은 이름 모를 소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내 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아주 잠시라도 내 뜻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고맙다.”
“오라버니…….”
“원하는 삶을 살아라.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나처럼 세상으로 나가라. 너도 내가 느꼈던 그 황홀한 기분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흐흑.”
백궁천의 손을 잡은 백향이 소리 없이 통곡했다.
그가 백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의 머리를 얼마 만에 쓰다듬어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만일 시간이 더 남았다면, 가령이의 머리도 이렇게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날 일으켜 세워 다오.”
백향이 백궁천의 상체를 들어 주었다. 백궁천이 침상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향아.”
“……네, 오라버니.”
“오랜만에 네 궁술이 보고 싶구나.”
“네?”
백궁천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백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머지는 다 내 손에 죽었다. 백소경이 마지막이었어.”
“오라버니!!”
“예신합전의 생존자가 곡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적이 꽤 있었다. 아마 곡에서 널 추적하려 하겠지. 하지만…….”
백궁천의 눈에 힘이 실렸다.
“연호정, 그 청년이라면 당분간 널 지켜 줄 수 있을 거다. 난 그에게서 그만한 힘과 가능성을 보았어.”
“안 돼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어떻게 제 손으로 오라버니를……!”
“그 정도 각오도 없었더냐?”
“……!!”
“그 정도 각오도 없이 경합에 참여했느냐? 죽지도, 죽이지도 않은 채 승자가 되길 빌었던 것이냐? 그렇다면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일이다.”
“오, 오라버니.”
“난 연호정이란 청년에게 약속했다. 개방도에게 사죄하기로. 내가 죽으면 대신 사죄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래서야 안 되겠지.”
백궁천이 눈을 감았다.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조금도 갚지 못했어. 그렇다면 약속이라도 지키고 싶다.”
“흐흐흑!”
백궁천이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감은 채 웃는 그의 모습은 몹시 초연해 보였다.
“부탁한다.”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내던 백향이 일순 거리를 벌렸다.
츠츠츠.
아무것도 없는 활시위에 무형의 화살이 돋아나는 듯했다.
백궁천이 찬탄을 내뱉었다.
“무형탄(無形彈)! 역시나 대단하다!”
백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쏘거라.”
“…….”
“어서!!”
백향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시위를 놓았다.
티이이이이잉! 퍽!
* * *
“헉헉!”
숨을 헐떡이며 어두운 산길을 오르는 사내가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도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상거지 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몹시 날랬다. 호흡이 그렇게 흐트러졌는데도 한 마리 범처럼 쉼 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다 왔다!’
사내의 눈에 희열이 솟구쳤다.
‘안가! 이제야 살았어!’
그때였다.
“명허림.”
순간 사내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소리가 들려온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뒷짐 진 손에 무지막지한 도끼를 쥔 청년이 서 있었다.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