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40)
940화. 진실 (7)
“쿨럭!”
피 섞인 기침을 뱉는 막원의 얼굴은 지독하게 창백했다.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콜록콜록! 나는 괜찮네. 괜찮으니 싸움을…… 우웨엑!”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야혁에게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안겨 주었지만, 놀랍게도 야혁은 막원의 무자비한 검술을 맨몸으로 받아 놓고도 비슷한 수준의 반격을 가했다.
제아무리 막원이라도 비슷한 영역의 고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한 일격을 받고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천무신병기가 끊임없이 육체를 수복하고 있었지만, 침투하는 마기가 너무 지독해서 운신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그때였다.
‘……?!’
몸을 회복하던 천무신병기가 은은한 떨림을 발했다.
그 떨림은 긴장의 떨림이자 환희의 떨림이었으며, 동시에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천기(天氣)를 향한 동조 현상이었다.
‘이건?’
막원이 고개를 돌려 이 힘의 흐름을 찾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되살아난 야혁, 그리고 그런 야혁을 상대로 놀라운 무공을 보여 주는 당관.
하늘 높이 떠오른 당관과 그런 당관을 쫓아가는 야혁의 주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번쩍!
당관의 신형이 대지로 내려섰다.
막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당가주?!”
* * *
한 줄기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심검(心劍)이라고 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소. 심검이라면 심검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이름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박힌 글자일 뿐이오.’
‘그럼 그게 뭐요?’
‘모르겠소.’
‘내가 봤을 땐 그거 심검 맞소. 기가 찰 일이지. 무극에 오르지도 못한 자가 심검을 깨우치다니, 고금에 이런 일은 또 없을 거요.’
‘허허, 그렇진 않겠지.’
‘싸가지, 아니 호정이 그러더군. 사람의 이름도, 무공의 명칭도 그냥 흘려 넘길 게 아니라고. 무언가에 붙은 이름들은 다 나름의 뜻이 있으니 그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고 하더이다.’
‘으음.’
‘심검이 아니라면 따로 이름을 붙여 보시오. 또 모르잖소?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위력을 낼 수 있을지.’
‘자칫 잘못하면 그냥 넘겨 버릴 수 있었던 일을 바로잡아 주셨소. 고맙소.’
‘항상 궁금했던 건데, 그런 말 할 때 부끄럽진 않소?’
‘허허허.’
‘됐고, 뭐라고 이름 붙이고 싶소?’
‘글쎄, 이름이라……. 이 검은 바라고 또 바라는 나의 이상 속에서 태어났으니 조정연검(造淨燕劍)이라 해야겠소.’
‘조정연검? 맑은 것을 만드는 연가의 검이라고?’
‘검을 연마하는 자가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나는 평화를 바라오. 별다른 분란이 없는, 모두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세상을 바라고 있소.’
‘꿈같은 얘기군. 그런 세상이 오겠소?’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꿈꿔 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소?’
연기로 흩어졌던 당관의 얼굴이 깨진 가면처럼 군데군데 수복되었다.
당관의 눈이 흐려졌다.
‘조정검이라고.’
웃기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 먹고 처음 제대로 된 벗을 사귀었다. 하지만 그 벗은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성정으로 드높은 경지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당신답군.’
심검에 이름을 붙이라니까 기껏 생각한 것이 조정연검이라니.
우스웠다. 또한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나라면 이름을 짓지 못했을 텐데.’
연위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성정이나 무공, 키운 자식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대단한 것은 여러 목표를 갖고도 단 한 점의 의심 없이, 그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당관은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잊고 있었는데, 그저 스쳐 지나간 기억일 따름인데 어쩐지 지금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고 또렷했다.
‘나는 실패했소.’
‘취하셨구만. 실패했다니? 뭘 말이오?’
‘우리 애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소.’
‘지금 내 욕을 하는 거요?’
‘아니오.’
‘그게 아니면 뭔 헛소리요? 첫째는 천하제일 후기지수에, 둘째도 명성 자자한 천재더만.’
‘무공의 재능이 삶의 전부는 아니니까.’
‘무림인에게 무공의 재능만큼 중요한 건 없소.’
‘녀석들은 알아서 컸소. 나는 첫째에겐 딱딱했고 둘째에게는 무서운 아비였소. 무공과 학문은 가르쳤지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못했소.’
‘그래도 잘 컸잖소.’
‘애들이 잘 큰 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오. 스스로 잘 컸소.’
‘그래, 가끔 이렇게 인간적인 것도 좋군. 사람이 잘난 척도 하고 살아야지.’
‘먼저 간 아내에게 번듯하게 키우겠다고 약속했소.’
‘…….’
‘하지만 일에 치이고 세상에 치여 제대로 키우질 못했소. 결과가 잘 나왔다고 하여 과정이 불필요한 문제가 아니오, 이것은.’
‘결과나마 잘 나와서 다행이지.’
‘결론은, 내가 지금 죽어서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간다 한들 떳떳하게 그녀를 볼 수는 없을 것 같소.’
연위 인생의 최대 목표는 자식들을 바르게 잘 키우는 것이었다. 나아가 알아서 잘 살 수 있도록, 강호 무림이라는 거친 세상에서 홀로 커 갈 수 있도록 엄하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위의 삶은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연위는 올바른 시선으로 검(劍)을 보고 살았다. 언제나 자식 생각이 지극했지만, 또 다른 그는 분란 없는 세상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살았다.
그는 한순간도 자신의 목표를, 보듬어야 할 가치를 잊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돌려 세상이 망해 버리길 진심으로 빌었다면, 심검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루하루 쌓아 온 무(武), 알고만 있었던 지식을 진지하게 고찰하여 확고한 가치관으로 삼은 일세의 거인.
당관은 연위의 반대편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로는 광신(狂信)에 가까운 그 신념을, 당관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처럼 확고한 마음으로,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대는 높아졌구려.’
우우웅.
당관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진리에 가깝기 때문에 낯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협(俠)과 정의(正義)라는 주관을 마음에 품고 산 연위와는 다른, 그러나 그 근원은 같은 빛이 당관의 눈에도 신광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연가주가 아니다. 연가주처럼 될 필요는 없어.’
그러나.
‘연가주처럼 흔들리지 않는 나 자신을 볼 수 있다면.’
화아아악!
흩어졌던 연기가 다시 모여 그의 목과 가슴, 어깨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관은 무수히 많은 입과 눈의 형상으로 덕지덕지 달라붙은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
후우우우우웅!
굳건한 두 팔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더는, 남들의 시선과 혀에 나를 맞추지 않겠다.’
푸스스스스.
‘나’를 에워싸고 있던 입과 눈들이 부풀어 오르다가 퍽! 하고 터져 나갔다.
터져 나온 피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안에, 기지개를 켜긴커녕 올바르게 서 본 적도 없는 누군가가 있었다.
당관 자신이었다.
후우우우웅!
뭉친 연기가 복부를, 하반신을 이루었다.
퍼퍼퍼퍼펑!
입과 눈들이 무차별로 폭발했다. 폭발하고 남은 피 안개와 찌꺼기들이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내 몸에 들러붙었다.
당관은 그것까지 치울 힘이 없었다. 치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세상의 눈과 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가 인간 사회에서 사는 이상, 주변인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토록 험하고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나 자신의 형태라도 볼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피와 죽음이 드리워진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내가 성인(聖人)처럼 고고할 수는 없는바.
저 피와 살점으로 가득한 찌꺼기는 언제나 나와 함께할 것이다.
당관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야 나를 보았다.”
스르륵.
피범벅이 된 또 다른 내가 허리를 폈다.
주르르륵.
온몸에 들러붙은 피와 살점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검붉은 장포로 화했다.
섬뜩한 옷이었다. 그러나 그 옷을 걸친 또 다른 나는 너무나도 나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는, 그 속에서 나만의 무도(武道)를 찾을 수 있었다.
‘도무지 가주님과 어울리지 않는데요.’
‘시끄럽다, 싸가지. 아직 제대로 다루진 못하지만 이보다 내게 맞는 무공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무공의 이름이 뭐라고요?’
‘귀 파고 잘 들어라. 이 무공은 만천…….’
번쩍!
어둑한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섬광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드드드득!
두 발에 닿은 대지가 갈라지며 무시무시한 독기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쿵!
땅에 내려선 야혁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늘로 올라갔던 자가 지상으로 내려오니,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아아아아악!
당관의 몸에서 매서운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독공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절대적인 내공을 이루었던 진기의 특성, 독의 기운이 모조리 증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순간 독기가 다 빠져나갔는데도 그의 내공은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단전은 더 커졌고 품은 진기는 후천(後天)을 뛰어넘어 선천의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문을 넘지는 못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을 두들기기 시작한 그의 기운은 순식간에 성스럽게 조각되기 시작했다.
심장처럼 맥동하는 독정(毒精)은 그대로지만, 지금껏 토대가 되어 주었던 독기는 빠져 버렸다.
우우웅! 우우우우웅!
새로운 진기는 곧 본능에 따른 내공 운용과 극에 이른 깨달음으로 여태 존재하지 않았던 신공을 자연스레 토해 냈다.
제왕독공의 법문,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의 구결이 합쳐져 부드럽게 하나의 무공을 완성시킨다.
만류귀종이었다.
아버지인 암왕 당형의 깨달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은 당관의 무공은, 만류귀종의 뜻을 따라 만천을 드리우는 핏빛 전포를 만들었다.
화아아악!
당관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붉은 진기가 장포처럼 늘어지며 바람에 따라 펄럭였다.
제왕, 삼양, 귀원, 만천.
그리고 만류귀종.
당가 역사상 최강의 상단신공(上丹神功)으로 회자될 만류귀원신공(萬流歸元神功)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치리리리리링!!
사방으로 튕겨 나갔던 수백 개의 암기들이 주인의 부름을 받고 함성을 지르며 다시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묵비의 눈이 멍해졌다.
‘아름답다.’
부딪쳐서 빛나는 게 아니었다. 암기 하나하나가 찬연한 빛을 토해 내니, 수백 개의 유성이 하늘을 뒤덮은 것 같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치리리리리링!!
하늘을 뒤덮은 암기들이 제각기 돌풍을 일으키며 당관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핏빛으로 물든 만류귀원진기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펄럭이는 내공의 힘을 받은 암기들이 수십 가지의 색으로 물들었다.
“만천(滿天) 아래 모든 당씨를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종사가 되는 것.”
후우우.
나직이 숨을 뱉은 당관이 눈을 떴다.
암녹색으로 빛나던 그의 동공은 서산이 토해 내는 태양의 비명과 같은 색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당관이 턱을 들었다.
치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회전하던 모든 암기가 허공에 멈춰 섰다.
“이것이 만천의 화우다.”
“……!!”
“잘 가거라.”
퍼퍼퍼퍼퍼펑!!
폭발하듯 쏘아진 수백 개의 암기가 야혁의 몸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