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43)
943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3)
“…….”
흐르는 선기에 몸을 맡긴 채 사흘이 넘도록 명상에 접어들었던 탁무자가 눈을 떴다.
후우웅.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묘하게 섬뜩하게 들렸다.
“허어.”
뒷짐을 진 노인이 탁무자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 심상치 않은 공기외다.”
탁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오셨구먼.”
“손님이라면?”
“설마하니 먼저 이곳까지 올 줄은 몰랐네. 언제고 만날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사형이 하는 말은 도통 알아듣기가 힘드오.”
“통천이 오고 있네.”
순간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탁무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연호정 그 녀석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는구먼.”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마치 어제 나눈 대화처럼 생생했다.
‘차라리 통천진인을 찾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노선배가 작정하고 잡으려 들면 못 잡을 것도 아닐 텐데.’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만, 고생하는 사람들이 눈에 밟히기는 해도 아직까지 천도(天道)가 뒤틀린 것 같지는 않아.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바꿔 말하면, 천도가 뒤틀릴 것 같으면 그때는 나서실 거란 뜻입니까?’
‘그 전에 나서야겠지.’
탁무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연 선기 때문에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천하를 굽어다 보던 자가 어찌 지금 오는가.’
의아했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통천도 그와 같았다. 평생 그 삭막한 절벽 위에서 살 줄 알았거늘 직접 이곳까지 올 줄이야.
하물며 자신이 직접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사제들은 은림(隱林)으로 들어가시게.”
“괜찮으시겠소?”
“예끼, 이 사람아.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노인이 피식 웃었다.
“차라리 사형이 명상을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면 이런 걱정까지는 안 할 것이오.”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한숨 푹 자고 오시게.”
“알겠소.”
노인이 안개 뒤로 사라졌다.
탁무자가 손으로 허공을 쓸었다. 안개처럼 흐르는 선기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조류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 같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탁무자가 눈을 감았다.
‘다시금, 천하가 요동치기 시작하려는가.’
눈을 감은 탁무자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속세와 다른 이 봉우리는, 속세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느리게 흐르기도 한다.
지금은 어떠한가?
탁무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밤이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지만 안개처럼 퍼진 선기 때문에 아리따운 밤하늘을 구경하긴 힘들었다.
대신 밤이 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품은 자가, 어느덧 탁무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빼빼 마른 외관. 피부는 검게 죽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펑퍼짐한 의복은 어둠보다도 어두운 흑색이었다. 어떤 염료를 쏟아부었는지 모르겠지만, 몸뚱이가 있을 곳에 시커먼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일 만큼 진하디진한 흑색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 선해(仙海) 속에서 오래 버티긴 힘들 텐데, 한시라도 빨리 찾아온 용무를 꺼내야지 않겠는가?”
탁무자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잔잔하고 순수한 아이의 그것처럼 장난기가 넘쳤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달랐다. 호수처럼 깊고 깨끗했던 눈은 평소와 달리 무섭게 곤두서 있었다. 귀신도 놀라 달아날 만큼 위엄 가득한 눈빛이었다.
사내, 통천진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구려.”
목소리가 탁했다. 가래가 낀 것도 아닌데 쇳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정갈했던 머리카락도 여기저기 빠지고 얇아져서 두상을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검붉은 피부 위로는 시퍼런 핏줄이 잔뜩 돋아 있어서, 심장 약한 사람이 보면 대번에 졸도할 외양이었다.
탁무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에 드시는가?”
“무엇이 말이오?”
“새외의 잡신을 들여 망가져 버린 자네의 그 외양 말일세.”
통천진인의 입꼬리도 탁무자처럼 위를 향했다.
비쩍 마른 와중에 피부도 탄력을 잃어서, 입꼬리를 따라 얼굴 거죽이 모조리 딸려 올라갔다. 기괴한 표정이었다.
“우리 정도 되면 인세의 외관에 집착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이오.”
“볼 줄 아는 눈이 있고, 생각할 줄 아는 머리가 있는데 어찌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관만 봐도 자네가 모시는 신의 위험을 알겠네.”
“하나만 보고 아홉을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는바. 삼풍진인 이래 최고의 도사라 불리던 분께서는 어찌 속세의 못 배운 이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시오?”
“하나만 보고도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모르는 모양이군.”
“자신의 도(道)와 다르다 하여 타인의 도를 매도하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오.”
“내가 진정 그런 사람이면 소림의 권신과도 배척하며 지냈겠지. 도(道)도 다 같은 도가 아닌 법, 마도(魔道)에 물든 자네의 몰골을 보니 도고일척(道高一尺)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는 말이 새삼 와닿네그려.”
“편협한 시각이시오.”
“그리도 힘들었던가?”
“음?”
“신이(神異)한 능력 따위, 도사가 추구할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작 그 능력을 잃고 나니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나?”
통천진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엄 가득했던 탁무자의 눈빛에서 은근한 안타까움이 배어 나왔다.
“용두방주에게 들었네. 과거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더는 천기가 보이지 않았다고.”
“그만하시오.”
“도(道)를 좇아야 마땅할 도사가 그런 신통한 법술 따위에 의지해서야 쓰겠냐며 혀를 차던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전해 들었지.”
“…….”
“전진(全眞)의 맥을 이었다는 자네가 무엇이 아쉬워 쌓아 올린 도성(道城)에 구멍을 내었는가?”
가만히 탁무자를 노려보던 통천진인이 차갑게 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귀하처럼 속세에 잔뜩 물들어 있었기에 완전하지 못했던 모양이오.”
“…….”
“하지만 완전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또 다른 도에 눈을 뜰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겠지.”
“도대체 그깟…….”
“그에 관한 얘기는 이만합시다. 서로를 비방하기 위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것이 아니오.”
물끄러미 통천진인을 바라보던 탁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게.”
“교섭을 위해 왔소이다.”
“교섭이라?”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다. 교섭이라니?
“아시다시피 귀하께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통에 우리 쪽이 움직이기가 힘드오. 물론 그것은 귀하도 마찬가지겠지만.”
기실 탁무자는 통천진인이 타락하기 전에도 이곳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껏 누구에게도 그 이유를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현재 무당의 장교를 맡은 승현진인에게도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즉, 통천진인이 아니더라도 탁무자는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 천하가 전화(戰禍)에 휩쓸릴 것 같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갔겠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하물며 통천진인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재앙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기에 차라리 잘됐구나 싶기도 했다.
‘모르는군.’
탁무자는 확신할 수 있었다. 통천진인은 오직 본인 때문에 무당 최고의 고수가 이 봉우리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통천진인이 말을 이었다.
“탁 터놓고 말하겠소. 내가 죽어 주겠소.”
“……?!”
탁무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죽어 주겠다고?”
“그렇소. 내가 아무리 혈신(血神)의 종이 되어 천하를 주시하고 있다 한들, 육신이 없으면 더는 그와 같은 짓거리를 할 수 없지 않겠소? 그러니 내가 죽어 주겠소이다.”
자신의 목숨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도를 이룬 도사들도, 법을 이룬 승려들도 이렇게나 순순히 죽겠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시 한번 마도가 지닌 위험성을 체감하며, 탁무자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죽어 사라지면 귀하도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을 터. 귀하 측에서는 천하가 골병이 들기 직전으로 보일 터이니 하산하지 않을 수 없을 게요.”
“…….”
“내려가서, 신화교주(神火敎主)를 죽여 주시오.”
점입가경이었다.
탁무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신화교주라면 삼교 중 하나요, 그대의 우군이라 할 만한 자일 텐데 어찌 죽여 달라 하는가?”
통천진인이 조소를 지었다.
“우군이라고? 누가 그럽디까?”
“뭐?”
“잠시 먼 길을 떠난 주인을 잊고 주인 행세를 하는 놈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오.”
“……!”
“그러나 신화교주의 무공은 대단하오. 솔직히 당신네들이 성천이라 부르는 이 중 그와 상대라도 가능한 건 삼제(三帝) 정도일 것이오.”
대단한 고평가였다. 주인의 자리를 뺏은 고약한 자라고 말하면서도, 실력만큼은 확실하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탁무자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성천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사교도들이 모시는 주인 정도는 삼군급에서 정리가 가능할 듯싶네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구려. 음제 하은교가 사음교주의 손에 사로잡혔소이다. 사음교주가 입은 피해라고는 약간의 내상과 몇 개 안 되는 생채기뿐이었소.”
“그렇겠지. 교주와 붙기 전까지 온갖 전투를 치러야 했을 테니.”
“부인하지 않겠소. 그러나 장담하건대, 설령 만전의 상태였다 한들 음제는 사음교주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오.”
“하하하하!”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탁무자.
통천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그리 우스운 것이오?”
“천기를 헤아리는 지혜의 눈을 가졌어도 무극무한(無極無限)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했으니,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
“사음교주가 내외상을 입었다고 했나?”
“약간의 손해를 입었지.”
“만전의 상태가 아닌 몸으로 사음교주에게 그만한 상처를 입혔다면, 순수한 기량에 있어서 최소한 박빙이란 뜻이라네.”
“재미있는 말이구려.”
“세상이 성천을 두고 신선제왕이니 삼군이니 부르고 있지만, 기실 우리 사이에 뚜렷한 무공 격차는 없다네. 오히려 경우에 따라 권신도 사왕(四王)에게 패배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싸움이야. 아, 이제는 오왕(五王)이 되었던가?”
“…….”
“그래도 같은 권속이라고 띄워 줄 요량이라면 그리 말하지 않아도 괜찮네.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내 눈으로 보이는 세상만 볼 테니까.”
통천진인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이건 어떻소?”
“뭐가 말인가?”
“본디 신화는 황궁을 손에 넣으려 하였소. 하지만 실패했지.”
“천도(天道)가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라네.”
“그래서 신화교주가 직접 움직였소.”
“……?!”
탁무자의 표정이 돌변했다.
바뀐 그의 표정이 재미있었을까? 통천진인 역시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가 신화교주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소이까? 그래, 그의 곁에는 광혼의 귀군이 있지. 하면, 신화교주가 황제의 목을 뽑기 위해 혼자만 갈 것 같소?”
“……!!”
“이제야 좀 대화가 될 것 같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