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53)
953화. 깨달음이란 (3)
별빛 가득한 밤하늘 아래.
증오와 한으로 오염되어 탁하기 그지없는 영혼으로 스스로를 망치고 있던 어린 제자가, 분명하고도 당당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물어온다.
스승은 누구시냐고.
천인룡에게 있어 연호정은 인생 최초로 삼은 제자이자 마지막 제자였다. 거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건네주었으니, 가히 유일제자(唯一弟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하나뿐인 제자를 말끔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마음과 별개로,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천인룡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삼백 년, 아니 혈교 시절부터 생각하면 삼백육십 년을 넘게 산 강호 역사상 최고령의 고수였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았다고 하여 어려운 것이 쉬워지지 않는다. 나아가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려면 나름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천인룡은 타고난 재능을 가꾸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 그 외의 것들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제자를 만나고서야 자신이 삼백 년이 넘는 시간을 허투루 썼다는 걸 깨달았다.
사제지간을 맺고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렸지만, 정작 제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은 것은 스승인 자신이었다.
제자를 마주하며 하루하루 또 다른 세상을 배워 가던 천인룡은, 제자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설령 가능했다 한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그런 것이 가능했대도 일부러 상처를 치료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병을 인위적으로 치료해 줘 봤자 그것은 표피의 상처만 봉합하는 것일 뿐 진정한 치료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자신을 하나뿐인 제자는 그렇게나 존경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무기만 쥐여 주고 세상 밖으로 보냈던 제자가, 어느덧 천하 정점에 올라 무신(武神)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을 한 채 당당하게 서 있다.
연호정이 스승을 보고 눈이 부셨던 것처럼.
천인룡 역시 하나뿐인 제자의 성장에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느끼고 깨달음을 상실하기도 했지만, 제자의 멋진 성장을 보기 위해 감내한 세월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은 그야말로 선물과도 같았다.
그런 멋진 선물을 준 제자의 물음에, 스승으로서 말을 대충 흐릴 수는 없는 법.
“사신무의 역사는 천 년을 헤아린다. 어쩌면 그보다도 오래되었을지도 모르지.”
“…….”
“내가 사신무를 익힌 것은 그 옛날 총단 인근에 나타난 한 명의 선인(仙人) 덕분이다.”
총단.
연호정은 스승이 말하는 총단이 바로 혈교를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 관해 얘기하려면 혈교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천인룡은 이미 자신의 제자가 혈교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나아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편안히 말했고, 그래서 담담하게 충격적이었다.
“혈교는 존재해선 안 될 집단이었다.”
천인룡의 어조는 단호했다.
어찌 보면 혈교라는 집단 자체가 천인룡의 집안이요, 역대 교주들은 그의 선조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집안이, 그 피가 대물림되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한다.
“혈교의 초대 교주는 혈옥이라는 마물을 손에 넣고 시공을 주물러 역사상 최악의 집단을 만들었다.”
“…….”
“대가 이어져 내려오며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초대부터 몇 대 동안 혈교에는 여러 축제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인신 공양(人身供養), 음혈 보양(飮血補陽)을 들 수 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인신 공양은 사람을 제물로 삼아 하늘에 바치는 의식을 뜻하고, 음혈 보양은 피를 마셔 몸 안의 양기를 보한다는 뜻이다.
즉, 혈교는 해마다 인신 공양으로 죽은 사람의 피를 마셔 양기를 보했다는 뜻이 된다.
“마도(魔道)…….”
“아니, 그것은 마도라 칭할 만한 자격조차 없는 행위였다.”
“……?”
“한낱 권위를 위해 교도들을 우민화(愚民化)시키려던 권력자들의 욕심이 낳은 악행악도(惡行惡道)에 불과했지.”
“악행악도.”
“거창하게 역천이니 뭐니 할 것도 없느니라. 그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바보들의 잔행(殘行)이었을 뿐이지. 거기에는 어떤 대단한 의미도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천인룡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 그러나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스승이 초기 혈교의 권력자들을 혐오했고, 또 한심하게 여겼다는 걸.
“하지만 마도만이 역천은 아닌 법. 천하에 많은 악도와 잔행이 있지만, 대개 그러한 행위들은 천리(天理)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또한 세상사의 일부, 인간사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
“혈교는 달랐다. 그들의 악행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가 대를 이어 진행되는 순간, 그들의 악행악도는 비로소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행위로 인식되어 하늘의 주시를 받게 되었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천리니 역천이니, 지금의 연호정으로서는 쉬이 믿기 힘든 개념이다. 당장 스승처럼 영혼에 대해 논하지도 못하는 그였기에, 스승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이 되었기에 연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혈교에도 사람은 있었다. 팔 대였는지 구 대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아마 구 대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인신 공양과 음혈 보양 같은, 듣기에도 끔찍한 축제는 사라져 버렸지.”
“그렇군요.”
“하지만 이미 하늘은 혈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격이지. 게다가 잔혹한 축제를 금했을 뿐 이혼대법은 물론 시공까지 주무를 수 있는 혈옥은 그대로였기에 혈교의 패망은 운명이 되었다.”
천인룡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대 혈교주들이 점점 자식을 보기 힘들어졌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무자비한 악행으로 역천을 이룬 그들의 피를, 이 세상이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광혈마가는 혈교주의 피를 이었다. 하지만 광혈교주들은 대대로 자식이 귀했다고 한다.
스승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마공의 부작용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틀렸다. 그들이 자손을 보기 어려웠던 이유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역천이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군.’
세상에는 정말 천리라는 게 있었던 것일까.
긴가민가했던 연호정은, 순간 과거 황룡에 오르기 전 스승의 사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이미 인간의 탈을 벗고 신선이 된 자가 남긴 선기 그득한 산에도 다녀왔다.’
한 인간의 정신에 사념 조각을 넣어 황룡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게 하는, 그야말로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행위를 두고 그것이 어찌 가능하냐고 묻는 연호정의 질문에 대한 스승의 답이었다.
그렇다. 스승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분이다.
그 어떤 믿지 못할 행위를, 능력을 보여 줘도 스승이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육신을 갖고 태어나 신선의 반열에 오른 분이니, 아직 여물지 못한 사람의 인식을 지닌 연호정에게 있어 스승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승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런 혈교의 악행이 극에 다다랐을 때 태어났다. 얄궂게도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실제로도 그랬지. 나는 약관에 이르기 전 혈교의 모든 마공을 집대성했으며 성마(成魔), 즉 당대 중원인들이 무극이라 부르는 경지에 발을 걸쳤다.”
연호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가 이십 대의 몸으로 무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의 깨달음을 그대로 안고 왔기 때문이다. 몸만 이십 대 청년이지, 실제로는 오십이 넘은 초로의 사내인 것이다.
스승은 달랐다.
시간 역행 따위가 아닌, 오직 재능과 오성만으로 이십 대 직전에 무극의 경지를 엿보았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었다. 무인의 상식으로는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천재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때부터 나는 본교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마공서는 물론 술법과 진법, 고대 성인들의 글을 독파해 나가며 혈교가 지극히 비정상적이라는 집단임을 분명히 했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도 그 집단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집단이 엇나가도 그것을 바로잡기 힘들어한다.
천인룡은 달랐다.
그는 누구보다도 냉철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으며,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혈육은 나를 못마땅해했다. 나의 재능으로 천하를 독식할 수 있음을 알았건만, 후계자로서의 배움을 등한시하고 걸핏하면 세상에 나가는 나를 제어하려 들었다.”
“…….”
“혈육의 바람과 나 자신의 길 사이에서 방황했을 적, 나는 비로소 스승을 만났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천인룡의 얼굴에 은은한 그리움이 떠올라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된, 등선을 코앞에 둔 신인에게도 그처럼 아릿한 감성이 남아 있었던 걸까.
“스승은 사신무의 계승자 중 가장 좋지 못한 재능을 타고난 분이었다. 당시 연배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사신무의 극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셨지.”
“…….”
“그러나 무공보다도 더 위대한 힘을, 스승님께서는 갖추고 계셨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른길을 볼 줄 아는 눈.”
“……!”
“그 길이 올바르다는 확신이 들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정심(貞心)을 지닌 분이었다.”
천인룡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순간 연호정은 스승의 눈에서 별빛을 보았다.
“삼 년이었다. 나는 삼 년 동안 스승님께 사신무를 배웠다. 혈교의 후계자이자 자칫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악의 화신이 될 자의 내면에 옳은 길이 있음을 보신 그분은, 기꺼이 내게 사신무를 전수해 주셨다.”
“…….”
“나는 삼 년 만에 사신무를 대성했다. 그러나 스승님의 발치에도 도달하지 못했어.”
사신무의 극의를 이루지 못한 스승.
삼 년 만에 사신무의 극의를 이룬 제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는 스승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력적인 측면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올바른 정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마음이 스승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는 뜻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육신의 강함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없다고 생각했다. 힘이 없는 정의는 공허할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혈교인이었던 게지.”
“지금은 다르십니까?”
“다르다.”
“힘이 없는 정의라도 좋다는 것입니까?”
“정의가 없는 힘은 올바르지 않지만, 힘없는 정의는 나약할지언정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강하다.”
“……!!”
“그간의 너처럼.”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후, 스승님께서는 내게 사신기(四神氣)를 전해 주시고 돌아가셨다. 그간 연성하고 있던 마기가 너무 거세어 언제고 힘에 취할 수 있음을 경계하셨던 것이다.”
“…….”
“스승님은 내게 빛을 보여 주셨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려 주셨어.”
천인룡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난 혈교의 후계자에서 천 년 역사의 또 다른 교각을 세우는 사신무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