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54)
954화. 깨달음이란 (4)
연호정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스승님의 자세한 과거다.
‘그러셨구나.’
스승님의 스승님, 즉 연호정에게 태사부가 되는 그분은 극에 이른 정신력을 갖춘 또 다른 신인이셨던 게 분명했다.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스승님께서 위대하다 평가하는 분이라면 필경 천하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만한 성인(聖人)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황룡신왕공은……?”
“황룡신왕공은 원래부터 사신무 안에 존재했다. 구결까지 명확히 있었지.”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그가 배운 황룡은 딱히 구결이랄 것이 없는 무공이었다. 말 그대로 깨달음의 신공이라, 유사한 법문 정도는 있어도 진기 운용법이나 신공의 틀을 알려 주는 구결은 전혀 없었다.
천인룡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기존의 황룡신왕공은 미완성이었다.”
“아!”
“본디 황룡신왕공은 중단과 하단을 다스리는 황룡기(黃龍氣)와 상단을 다스리는 신왕기(神王氣)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래서 황룡신왕공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그래.”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었는데도 어느새 봉우리를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래도 두 사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땅을 두 번째 밟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두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색지옥공은 혈교는 물론 마도 무림 역사상 최강, 최악의 마공이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괴한 운용법을 자랑했지.”
“그걸 고치셨군요.”
“정확히는, 황룡신왕공의 구결과 오색지옥공의 구결들을 분리하여 합쳤지.”
고급이라는 단어 앞에 초(超)라는 말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두 신공과 마공을 분해하여 하나로 조합했다는 뜻이다.
연호정 역시 무공의 구현이나 술식의 변형에 있어서 무척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스승의 능력에 도달하진 못했다.
“두 무공을 합친 후, 나는 고민했다. 이것을 정녕 구결로 남겨야 할 것인지를. 사신무 자체가 천하 최강의 반열에 오른 무공인데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 깨달음으로 싸우는 신공까지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변화였다.
혈교의 후계자로서 힘이 없는 정의는 공허할 뿐이라며 냉소 짓던 사람이, 지나친 힘에 위화감을 느끼고 구결 제조를 포기하기까지 했다.
강철처럼 단단했던 주관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 분명한 변화는 스승의 깨달음이 궁극을 엿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사신무도 바꾸었다.”
“예?”
“네가 연마한 사신무, 사신기(四神氣)는 이 사부가 미세 조정을 거쳐 새로이 만든 무공이다. 선대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지닌 신공으로서 기능하게 되었지.”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자신이 익힌 사신무가 기존의 것과 다른 무공이었을 줄이야.
“그리 놀랄 것 없다. 애초에 사신무 자체가 전장의 무도였기에, 대(代)가 이어지며 수많은 개조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나라고 그것을 건드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느니라.”
“……그러셨군요.”
“기존의 사신무와 달리, 네가 연성한 사신무는 황룡신왕공의 구결을 전부 품고 있다. 다만 사신기 하나하나의 구결이 기존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해졌고, 그 방대한 구결 사이사이에 황룡신왕공의 운용법이 흩어져 있기에 쉬이 도달하지 못할 뿐이다.”
“즉.”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황룡신왕공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사신무 전체를 완전히 분해하여 자신만의 깨달음과 일치시키고, 이후 새로이 창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천인룡의 얼굴에 대견함이 떠올랐다.
“네가 황룡에 오른 방법이 정확히 그러했듯이.”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능력.
비록 창조자의 의도대로 황룡을 깨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깨달음 하나로 거기까지 도달했으니 충분히 대종사라 할 만하다.
연호정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무인이 그렇게 발전하고 성장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더 큰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다.
“어떠냐?”
“예?”
“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 사신무 말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사신무의 본질이 어떠하든, 저의 인생을 바꿔 준 무공이란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기존과 같든 다르든, 그로 인해 내 사람들을 지켰고 나 자신을 보호했으니 충분합니다.”
“허허.”
스승에게 받은 무공이니 좋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천인룡은 연호정의 솔직한 태도가 좋았다. 기실 자신에게 받은 무공이라 좋다는 마음은 이미 서로가 다 알고 있기에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저 제자가, 자신이 전수해 준 무공으로 나름대로 올바르게 성장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긴 합니다.”
“무엇이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라는 듯, 천인룡의 목소리에는 넉넉함만이 가득했다.
“사신무는 전장의 무도로, 어떤 전쟁이든 종식시킬 수 있는 물리력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사신무의 무공이 어떤 무공보다 전투적이고 우월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실력이 높다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겠습니까? 정녕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사신무 때문이 아니라 그 무공을 익힌 사람의 경지가 높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공손하면서도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그리고 연호정의 그 물음은, 천인룡이 꼭 말해 주고 싶었던 내용과 통했다.
“수천, 수만 명이 부딪치는 전쟁을 혼자만의 힘으로 끝낼 수 있다…… 정녕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수십 명끼리의 집단전은 끝낼 수 있다. 무극에 이른 고수라면 수백의 집단전까지도 깔끔하게 무마시킬 수 있다.
그러나 수천의 싸움이라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의 수준 하나하나가 별 볼 일 없다면 몰라도,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전세(戰勢)는 바꿀 수 있을지언정 전쟁을 끝내지는 못한다.
결국 강한 무력으로 사람을 상케 하는 능력과 전쟁을 끝내는 힘은 다른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천인룡 같은 규격 외의 강자라면 몰라도, 사람인 이상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말이 옳다. 한 개인이 수만, 아니 수십만 명이 부딪치는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본다면 말이다.”
“그렇습니다. 물리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신무장들은 항상 전쟁을 끝내 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혼자가 아니니까.”
“예?”
천인룡이 걸음을 멈추었다.
“말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 너에게 사신무를 전수했는지.”
“……?”
“무재만 본다면, 너는 고대의 신공을 전수하기에 부족한 녀석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천품을 보았다. 너의 성품을 보았어.”
“예?”
“사신무를 연마한 자를 어째서 무인(武人), 무신(武神)이 아니라 무장(武將)으로 부를까?”
“……?!”
“장수이기 때문이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신무에 달통한 자, 어떤 전장에서라도 수월하게 적을 살상할 수 있다. 살상력만 따지자면 아마 고금 제일을 논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더 강한 위력의 공격을 가한다고 살상력이 높은 게 아니다.
무공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 아주 작은 힘으로도 적의 급소를 가격하면 적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법이다.
사신무는 그런 무공이었다. 극도로 자유로운 형으로, 최소한의 힘을 이용해 적을 무너트리는 기예(技藝)이자 살법이며 전투술의 총화인 것이다.
“주작, 현무, 백호, 청룡. 네 가지 무공이 저마다 특색이 다르다지만 극에 이르면 공방과 회피, 반격 모든 부문에 있어서 자유자재로 반응한다. 그 말인즉슨, 어떤 순간에도 최선의 길을 찾아 적을 말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런 무공을, 성품이 좋지 못한 살인마에게 전수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희대의 살성이 되겠지요.”
“모든 무공이 다 그러하지. 그러나 사신무는 더 심해. 무공 자체가 싸움에, 살인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이는 혈교의 마공보다도 더 강한 유혹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바, 후계자의 재능보다 천품을 우선으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절제할 줄 아는 성품을 갖춘 자, 필요할 때 용맹한 기질을 발휘할 수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사신무는 최고의 무공이 된다.”
“……!!”
“그리고 대개 그런 성품을 지닌 자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출중한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마련이니라.”
느닷없이 내리꽂힌 벼락이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사신무장은 언제나 선봉에 선다. 가장 힘든 전장에서, 가장 힘든 적을 맞아 싸우게 되지. 하면, 그러한 장수의 등 뒤에 아무도 없을까?”
천인룡이 턱을 당기며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시대를 거스르기 전, 너는 홀로 살아남았느냐?”
그렇지 않다.
연호정에게는 언제나 곁을 지켜 주는 사람이 있었다. 전우가 있었고, 친구가 있었다.
흑제성 역시 본디 그가 만들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이 모였고,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단체를 만든 것이 바로 흑제성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시대를 거스른 지금, 너는 홀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의 곁에는 아버지와 동생 외에, 무수히 많은 친구가 있었다.
흑제성 시절의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그전에는 대화 한번 해 본 적 없던 많은 사람과 연을 맺고 삼교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언제나 선봉에 섰다.
마치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을 종식시켰던 스승과 같이.
“나아가 사신기는 심장과 폐장, 간장과 신장으로 스며들어 오장육부를 튼튼히 한다. 과거 네가 말했듯 오장육부를 튼튼히 하여 중단전을 바로 세우니, 사신기가 균형을 이루면 본래의 성품과 들어맞아 오욕칠정을 다루는 데에 누구보다도 수월해진다.”
“동시에, 한 감정에 지독히 몰입하여 과격해질 수도 있지요.”
“적을 맞이할 때는 그런 감정도 필요한 법이지.”
연호정이 탄성을 질렀다.
어떤 일에도 큰 놀라움 없이 적을 분석하고 아군의 안전을 꾀하던 자신.
그것은 천품, 경험, 타고난 지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해 준 것은 사신기였다.
또한 적을 맞이함에 있어 부동심을 깨고 한계까지 분노를 끌어올려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깨부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도 사신기의 공능이었다.
‘그래서!’
사신무는 전투 무공의 총화라고 불리지만, 전장의 무도에 적합하다고 한다.
지금껏 연호정이 살아왔던 방식, 발휘했던 모든 능력이 사신무 안에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신무는 전장의 무공이다.
사신무를 익힌 자는 장수가 된다.
“그리고 사신무를 초월하여 황룡에 이른 너는, 이제야 비로소 신공의 힘을 넘어 너 자신의 의지대로 삶과 무공을 지배하는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
“내가 너에게 바랐던 모습 그대로 컸구나.”
연호정이 침을 삼켰다.
황룡신왕공. 상상력만으로 무공의 위력을 조절하는, 진정한 의미의 신공(神功)이다.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사신기는 황룡신왕공에 이를 수 있는 교각인 동시에 그 자체로 나 자신을 완성시켜 주는 거대한 체계의 공부였던 것이다.
천인룡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어울리는 자의 손에 천고의 보검을 쥐여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세상에 나고 자란 보람을 느낀다. 내 어찌 등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