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58)
958화. 깨달음이란 (8)
하북을 통과하고 안국현까지 이동한 일행.
그곳까지 가며 양천은 연위와 팽무강에게 크게 놀랐다.
‘과연 만만치 않아.’
대화를 나눌수록 연위의 식견에 놀라게 되고 팽무강의 용인술에 감탄하게 된다.
처음에는 연위에게만 눈이 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팽무강에게 더 감탄할 일이 많았다. 어쩌면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더 큰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 중 하나이자 흑도 무림의 총수인 양천의 눈에 들 정도로 빼어난 인재들이라는 것이다.
‘묵룡에는 이만큼 제대로 연마된 사람이 많지 않아.’
무공으로도, 인품으로도.
나아가 사람을 부리는 능력은 물론 철저한 자기 관리까지.
‘슬슬 물갈이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지만.’
십이지신을 제외한 묵룡부의 실제 고수들은 원로와 전투 부대의 좌장 자리에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흑도의 특수성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흑도는 개별 문파마다의 역사가 백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배신을 밥 먹듯 하고, 모든 것을 생사의 싸움으로 결정짓는다.
당연히 한번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권위를 위해 온갖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말하자면 대다수의 조직이 공포 정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택하는 순간, 권위를 손에 넣은 자는 쇠퇴를 맞게 된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고, 수틀리면 잡아 죽이면 그만인 자리. 심지어 아랫것들 중 누구도 그러한 구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권력자들이 모이면?
당연히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양천이 처음 묵룡부를 세우면서 측근에 흑도 문파의 좌장들이 아닌 십이지신들을 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조직이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특성에 맞는 인선을 배치했다. 그러면서도 십이지신 휘하에는 최소한의 사병 조직만을 허가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의 묵룡부는, 무림맹 같았으면 수뇌부가 되어야 했을 문파의 좌장들이 중견층으로 내려갔다.
불만을 품지 않겠느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투왕 양천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 어떤 불만도 튀어나올 수 없었다.
이 또한 또 다른 형태의 공포 정치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묵룡부가 지금까지 크기를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초고수들인 원로들에게는 사병조차 금지되었으며, 오직 꿈과 열정, 그리고 상당한 양의 월봉으로 묵룡부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전투 부대.
묵룡부 최강의 부대인 용아철기단을 중심으로 훈련받은 수많은 부대의 좌장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무력을 지녔다.
말하자면 십이지신과 전투 부대의 좌장들이, 무림맹 봉공들의 역할을 둘로 나눠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흑도의 태생 때문에라도 무림맹과 같은 의견 수렴은 불가능하다. 흑도의 수장 자리엔 언제나 가장 강한 사람이 앉아야 해. 그러나…….’
패왕대는 물론 묵룡부의 부대원들과도 시시덕거리며 육포를 뜯는 팽무강을 보며, 양천은 생각을 굳혔다.
‘도입해도 되겠어.’
제갈문호가 묵룡부의 과감하기 짝이 없는 일 처리에 감명받아 하루빨리 무림맹주를 세우고자 했던 것처럼.
양천 역시 무림맹의 봉공들을 보며 느낀다. 흑도에도 저런 식의 화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미있는 사람이지요?”
연위의 말에 양천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게나 말이오.”
“저희 봉공회의를 할 때는 그다지 말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과는 무척 격의 없이 지내지요. 해서 봉공들은 보기보다 팽가주를 많이 신경 씁니다.”
“여론 때문에?”
“예. 팽가주와 친분을 맺은 사람이 워낙에 많은 까닭이지요. 그런 사람이 한 번씩 침묵을 깨고 의견을 제시하면, 봉공들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정치를 아는 사람이로군.”
“딱히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팽가주의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성품을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의 정치가 아니겠소. 연가주 말마따나 그 정도 모습도 의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육가의 가주라 불리기는 어려웠을 것이오.”
연위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렇다면 저는 육가의 가주로서 실격이로군요. 그런 계산을 할 줄 모르거든요.”
“그럴 리가. 스스로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뿐, 남을 분석할 때는 귀신처럼 날카롭겠지.”
“과찬이십니다.”
“나아가, 그 연배에 그만한 깨달음을 얻은 것만으로도 그대는 육가의 가주로서 차고 넘치는 사람이외다.”
“하하.”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이어 가자 멀찍이서 팽무강이 다가왔다.
“두 분께서는 무슨 재미있는 대화를 그리들 하십니까?”
양천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를 흉보고 있었소이다.”
“엇! 그러셨습니까?”
팽무강이 날카로운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연가주.”
“뒷담화라는 것이 은근히 재미가 있더이다.”
“접수했소. 나중에 군사랑 같이 연가주 헐뜯는 재미로 살아야겠소.”
피식 웃던 연위가 팽무강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패왕대와 묵룡부의 용조단(龍爪團) 무사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작 이틀 만에 많이들 친해졌소이다.”
“그러게나 말이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비슷비슷한 것이지.”
양천이 은근한 눈으로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사실 팽가의 무사들과 묵룡부의 무사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팽무강의 활약 덕분이었다.
딱히 연설을 한다거나 눈에 띄는 무언가를 하진 않았는데, 그가 중간에서 밥을 먹고 내공 없는 비무 따위로 교류의 장을 여는 순간 흑백은 하나가 되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팽무강은 중간중간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 같을 때마다 절묘하게 끼어들어 분위기를 유화시켰고, 때로는 서로를 강하게 압박하여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거야말로 의도한 게 아니겠지.’
양천이 볼 때 팽무강의 사람 다루는 기술은 타고난 것이었다.
‘본부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까.’
그때, 팽무강이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연가의 무사들은 언제 오는 거요?”
양천이 놀라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가의 무사들도 오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사태가 사태인 만큼, 한가롭게 강동 땅에서 수련이나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허어.”
“언제고 무림으로 출정시켰어야 할 이들입니다. 황궁이 위험에 처했으니, 강호 출도의 기회로 이만한 순간이 없겠지요.”
“흥미진진하군. 내 듣기로, 연가의 세력은 육가 중 가장 작지만 검사들 개개인의 수준은 어디보다도 뛰어나다고 알고 있소이다.”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진신절기까지 그대로 전수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요.”
“……!”
양천은 연위의 배포에 또 한 번 놀랐다.
연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는 길이 달라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개방을 통해서 연락했고, 산동을 타고 올 테니 그리 늦지는…….”
그때였다.
삐이이이익!
저 하늘 높은 곳 어딘가에서 매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얼굴을 본 양천과 팽무강의 얼굴도 저절로 진지해졌다.
“황궁이오?”
“예.”
잠시 후.
저 멀리서 시커먼 매 한 마리가 빠르게 활공하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하강했다.
그 속도가 초절정고수의 신법보다 훨씬 더 빨랐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다소 느려 보일 뿐, 실제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상까지 내려온 것이다.
펄럭!
널찍한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온 매가 살짝 날아오르더니 연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연위는 매의 발목에서 연통을 떼어 낸 후, 바로 열어서 돌돌 말린 서신을 꺼냈다.
빠르게 내용을 읽은 연위가 양천과 팽무강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두 사람의 눈이 번쩍였다.
“시작되었군.”
“속도를 올려야겠습니다.”
양천이 소리쳤다.
“황궁이 공격당하고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갈 것이니, 모두 긴장토록 하라!”
* * *
황궁에도 고수는 많다.
특히 이전에 큰 고초를 겪은 황궁의 무장들은 사방으로 임무를 떠났던 무장들과 고수들의 칠 할 이상을 불러들여 중앙을 수비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황궁 수비대의 총대장, 황궁 소속 최강의 고수인 금헌태의 눈이 번뜩였다.
“저기로군.”
이미 황궁 인근 마을의 주민들까지 모두 대피시키고, 그들의 마을에 첨병들과 첩보원들을 깔아 둔 상태였다.
덕분에 그들은 적의 출현을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알 수 있었다.
쿠르릉.
금헌태의 눈에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먼 거리였지만, 오랜 전투 경험으로 적의 숫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 바로 가늠할 수 있었다
‘천 명?’
분명 일천 내외의 병력이었다.
금헌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하니 고작 저 정도 병력으로 황궁을 도모해 보겠다고 한 것인가.’
물론 그는 구대문파 장문인급 이상, 무극을 코앞에 둔 초고수인지라 무공을 제대로 익힌 이가 얼마나 무서운 전과를 쌓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단전과 전쟁은 다른 법이다. 나아가 군문에서 배우는 집단 전술과 무림인들의 집단전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무림인 열 명과 제국군 열 명이 싸우면 무조건 제국군이 진다.
무림인 백 명과 제국군 백 명이 싸우면 이 또한 제국군의 패배가 확실하다.
그러나 무림인 천 명과 제국군 천 명이 붙으면, 그때는 승부를 장담키 어렵다.
만 명, 이만 명 등등 숫자가 늘어날수록 군문 전술의 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그 어떤 기상천외한 무공 앞에서도 대응할 만한 이들이 바로 제국군인 것이다.
나아가 황궁에도 천하에 이름을 알리지 않은 엄청난 수의 고수들이 존재한다.
한 번의 실수로 황제 폐하의 목숨이 위험해졌지만, 두 번의 실수는 없다. 괜히 천하로 퍼진 제국군과 고수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필경 뭔가 수가 있겠지. 설령 사교의 수괴가 성천십삼좌급의 고수라 한들, 저 정도 병력으로는 황궁을 뚫기 어렵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오히려 금헌태는 긴장했다.
신화교에서 파견한 세작이 오랫동안 황궁에 있었으니 그들이라고 황궁의 진정한 힘을 모를 리 없다. 즉, 천 명 정도로 공략이 가능할 거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병력이 황궁의 다른 지역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드디어 때가 되었다.
금헌태가 부장에게 말했다.
“깃발을 올려라. 사방군(四方軍)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봉화도 피우거라.”
“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끄덕인 금헌태가 다시 적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어?’
그는 삼백 장이 훌쩍 넘게 떨어져 있던 일천 무리의 적들이 벌써 이백 장 앞으로 다가왔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무리의 후방에서 무언가가 고속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도.
화살도 아니요, 검이나 창도 아니다.
‘……불덩이?!’
무려 이백여 장을 격하고 쏘아진, 작은 바위만 한 불덩이.
금헌태가 외쳤다.
“성문에서 물러나라!”
콰아아앙!
벼락처럼 날아온 불덩이가 그대로 성문을 박살 내며 사방으로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형용 불가한 무공이었다.
금헌태의 상식으로는 설령 성천에 달한 고수라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힘을 구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적의 후방에서 근엄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를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