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59)
959화. 깨달음이란 (9)
“시작되었습니다.”
황궁은 엄청나게 넓었고, 당연히 사방에 세워진 성문들 간의 거리도 상상을 초월해서 어느 정도 무공을 익혀 감각이 예민해진 이들도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곧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곡경은 달랐다.
그는 저 멀리 북방의 성문에서 시작된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곡경의 말에도 황제는 태연했다.
옆에 둔 잔을 들어 천천히 비우는 그의 모습은 몹시 나른해 보였다.
‘모르겠군.’
곡경은 오랜 세월 황제를 모셔 온 사람이었다. 어떠한 직책도 없이 암중에서 황제만을 지키는, 말하자면 황제의 개인 호위였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황제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곡경조차도 이런 순간에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무극 무한, 인간의 영역에서 한 발을 뗀 절대자의 눈에도 속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황제의 정신력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곡경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 할 때.
“곡경.”
“예, 폐하.”
곡경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한 번도 곡경의 이름을 대놓고 부른 적이 없었다. 남에게는 몰라도.
곡경을 부를 때면 언제나 ‘곡 호위’라는 직책을 붙여 주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어떤……?”
“연가의 장남 말일세.”
뜬금없이 연호정에 관해 묻는 황제였다.
곡경은 순순히 대답했다.
“좋은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지. 내 말은…….”
황제가 직접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진정 천하를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
곡경은 황제가 연호정과의 대화를 곱씹고 있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그랬다. 훗날 삼교와의 전쟁이 끝나면 천천히 무림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천하에 법도, 도의도 없이 움직이는 이들을 가만히 놔두면 분쟁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을 연호정에게 했고, 연호정 역시 그 말을 납득하고 천하를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하를 위해 싸우겠다는 것이지, 천하를 위해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녀석답군.’
연호정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천하의 안녕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했다.
다만, 그 자신의 능력과 목표를 정확히 알기 때문에 삼교를 정리하는 것까지가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곡경이 말했다.
“폐하께서 그러라 명을 내리신다면 천하에 누가 있어 어명을 거부하겠습니까.”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입에서 그런 꿀 바른 소리도 나오고,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
“제국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어. 사실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라 봐도 무방할 걸세. 황궁이 그나마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역사를 그리워하는 무수히 많은 문관과 무관들 덕분이겠지.”
그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곡경은 굳이 그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황제가 눈을 감았다.
“강동 연씨 가문의 가주는 지금껏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한 의협심의 소유자였네.”
“예.”
“그의 피를 이은 장남 역시, 겉으로는 건방져 보일지라도 제 애비를 닮아서 그런지 뜨거운 협심으로 가득했었지.”
곡경은 황제의 안목을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보기에도 연호정의 협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다만 그놈 자신이 제대로 인정하지 않을 뿐.
“처음에는 그 아비를 갖고 싶었네. 하지만 포기했어. 어명으로 묶어 놓는다 한들 그 사람이 내게 제대로 된 충성을 주겠는가.”
“폐하에 대한 충성이 없었다면 어찌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겠습니까.”
“정확히는 황제라는 위치 때문이지. 내 개인에 대한 선호는 없었어.”
“…….”
“설령 내 곁에 둔다 한들, 내게 충성을 바친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네. 그 사람은 어딘가에 매어 둘 만한 사람이 아니더군. 오히려 천하를 위한다면 자유롭게 풀어 두는 것이 훨씬 더 좋을 듯했네.”
“…….”
“그러나 미련이 남더구먼. 해서 아들을 보았네. 놀랍게도 아들 녀석 역시 아비 못지않았어. 어떤 부분에서는 아비를 훌쩍 넘어서기도 했었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호랑이가 아니라 용을 낳아 버린 셈이랄까.”
“…….”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네. 위험했지만 흥미로웠지. 해서 여기저기 찔러 보았는데…….”
눈을 뜬 황제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소심한 녀석이더구먼.”
곡경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연배에 그 무공이라면 고금에 다시 없을 재능임이 분명해.”
“물론 그렇습니다.”
“안목 역시 지극히 뛰어나더군.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지는 않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어. 특히 정쟁의 능력이 뛰어나 보였네.”
황제가 다시 잔을 비웠다.
“의아한 것은 그것이었지. 누구도 그 연배에 그만한 두뇌를 갖기 힘들다네. 한번 본 것을 다 외우는 등의 두뇌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있기에 발휘되는 극단적으로 발달된 분석력이랄까.”
“그렇습니까.”
“나이 많은 노인이 확실하게 젊은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경험으로 배운 삶의 지혜라고 할 것이네. 말도 안 되는 고집으로 존중받지 못할 사람도 많지만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녀석은 서른도 되지 않았어. 하지만 백 년을 살아온 노인의 지혜를 품고 있었네. 그런 것은 책이나 무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철저한 경험 없이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지식이자 지혜일세.”
“……!”
“하지만 그 또한 타고난 재능이라면, 녀석은 고금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게 맞네. 무공의 재능 따위를 웃도는, 진짜로 무서운 재능인 것이지.”
잔을 놓은 황제.
곡경이 조심스레 태사의로 다가가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네.”
“…….”
“알고는 있는 듯했네. 그러나 제대로 끌어다 쓰지는 못하는 것 같았어. 대화가 지속될수록, 자신이 가진 재능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구먼.”
“그러셨군요.”
다시 태사의 밑으로 내려온 곡경이 물었다.
“하면 소심하다는 것은……?”
“그만한 재능을 갖고도 천하를 제패할 생각은커녕 삼교와의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소일거리를 찾아 여생을 산다고 하니, 이처럼 소심한 녀석이 어디 있겠나.”
“…….”
“소심함이든 제 능력에 대한 외면이든,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괜찮다는 말씀은?”
“만약 그 재능을 완전히 개화한 후 자칫 위험한 생각이라도 품는다면.”
“……!”
“천하는 분명 신음할 걸세. 어쩌면 삼교 이상으로 대륙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게야.”
곡경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지난날, 녀석이 삼교를 상대로 행한 일을 보고받았네.”
“…….”
“자네가 말해 보게. 대륙 전체를 누비며 삼교의 전략 전술을 깨부수고 소속 고수들을 모조리 참살해 버린 그 능력이, 단순히 머리가 좋고 무공이 강하며 운이 따라 준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나?”
곡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도와주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 그러나 그 사람들이 없었어도 어떻게든 지금 상황까지는 끌고 왔을 걸세. 그야말로 타고났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
쿠릉.
황제는 느끼지 못하는, 곡경만이 느낄 수 있는 진동이 또 한 번 일었다.
곡경이 고개를 숙였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예?”
황제는 며칠 전, 화로에서 피어오른 청록빛 불꽃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형상화된 거인의 목소리와 위압감도.
“본격적인 싸움은 제대로 된 대화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벌어지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때였다.
곡경이 어전 밖 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오고 있는가.”
“황궁 수비대 소속 무장인 듯합니다.”
“바로 들라 하게.”
잠시 후.
“폐하.”
곡경이 손을 뻗었다.
덜컹! 끼이이이이익!
거대한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신통방통한 술수로군. 허공섭물이라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그렇게 편리한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나도 소싯적부터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걸 그랬네.”
타다닥.
어도를 지나 융단 끝에 선 무장이 무릎을 꿇었다.
“폐하. 현재 외세의 적군들이 북성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곡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격을 받았나?”
무장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놈들이 거대한 불덩이를 쏘아 내 성문을 부쉈습니다. 무려 이백 장 밖에서였습니다.”
황제의 눈에 반짝였다.
무장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적군에게 연원을 알 수 없는 화약 병기가…….”
“무공이다.”
“예?”
곡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화기 따위가 아니야. 그것은 무공이다. 신화교의 주력 무공이 열양공이라는 것은 천하가 아는바.”
“하, 하지만!”
“실제로 신화교의 고수들은 맨손으로 불을 뿜고 불덩이를 날릴 줄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곡경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피어올랐다.
“이백 장 밖에서 쏘아 낸 불덩이로 북성의 성문을 부술 정도라면, 이는 인간의 경지가 아니로군.”
어떤 무공인지는 몰라도, 설령 같은 무공을 익혀 무극에 올랐다 한들 곡경 역시 이백 장 밖에서 불덩이를 던져 목표를 맞출 자신은 없었다.
심지어 부서진 북성 성문은 사방 성문 중 유독 더 단단한 문이었다. 그걸 일격에 부쉈다고 하니, 적의 능력은 가히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곡 호위 자네가 긴장할 정도라면, 신화교주라는 자가 직접 찾아온 것이 맞기는 한 모양일세.”
“그런 듯합니다.”
황제가 무장에게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보고는 끝이옵니다만…….”
무장은 망설이고 있었다.
곡경의 눈이 차가워졌다.
“어느 안전이라고 우물거리는 것이냐. 오기 전에 제대로 정리도 못 한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적의 요구가 너무 황당하여 황궁 수비대장이 귓등으로 넘겨 버린 것이 있사온데…….”
“호오.”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어떤 요구를 하였느냐?”
“……폐하의 존안을 직접 뵙고 싶다고, 해서 뫼셔 오라는…….”
화아아악!
곡경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사기가 돌풍이 되어 무장을 덮쳤다.
무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황궁 수비대 휘하, 초절정고수인 그조차도 곡경의 기세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곡경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무엄하기 그지없는 놈들이로군. 감히 누굴…….”
그때, 황제가 말했다.
“다 좋은데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해, 이놈의 태사의는. 여기저기 쑤시는구먼.”
“……폐하?”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한옆에 둔 용포를 대충 걸치며 계단을 내려왔다.
곡경은 당황했다.
“폐하!”
“황비를 중심으로 모두를 피신시킨 이유가 달리 있었는가?”
“하지만…….”
“황궁은 내 집이요, 제국 신민들이 우러러보는 신전과 같다네. 손님이 오셨으면 집주인이 직접 나서서 맞는 것이 도리지. 안 그런가?”
“……!!”
크게 기지개를 켠 황제가 뒷짐을 졌다.
“날도 좋은데 북성까지 걸어가도록 하세.”
“……제가 모시겠습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호탕한 결단과 달리 황제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교의 주구라…… 어떤 낯짝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