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64)
964화. 하늘을 뒤덮는 불꽃 (4)
“…….”
눈을 감고 원무치상결에 집중하던 기우희의 눈이 다시 뜨인 것은 유시(酉時) 말쯤이었다.
잠시 후.
“들어가도 되겠는가.”
“네.”
문이 열리고 공공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우희가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허허, 알고 있었는가?”
“근래 조금 예민해져서요.”
원무치상결 덕분에 허술했던 상단전이 단단하게 여물었다.
거기에 타고난 영안(靈眼)으로 인해 주변 모든 것을 심안으로 볼 수 있는 그녀였다. 원무치상결로 한층 성장한 그녀의 영안은, 이제 성천의 고수조차도 피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물론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을 완벽히 숨긴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경지만으로도 그녀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며칠 새에 많이 야위었네.”
“맹주님의 공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닙니다.”
“그리 말하지 말게. 죽어 가는 환자를 살리는 것만큼 성스러운 일이 어디 있다고. 본맹에서 기 각주의 업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네.”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흐릿한 미소. 확실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공공대사는 그녀의 피로를 모른 척했다. 그녀가 그것을 원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앉으시지요, 맹주님.”
“그럼 잠시 실례하겠네.”
잠시 후.
약초를 우린 차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가만히 기우희를 보던 공공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 각주를 봤을 때가 떠오르는군.”
“저요?”
“그때 자네는 참으로 불안해 보였지.”
기우희가 고개를 숙였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몹시 안정적으로 보이네. 참으로 좋은 일이지.”
“과찬이십니다.”
“빈승은 어떻게 보이는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와중에 본 맹주도 아닌 빈승이라고 하였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갑작스러운 질문.
기우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가부좌를 튼 명왕(明王)처럼 보입니다.”
공공대사의 질문은 그녀의 영안에 본인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묻는 것이었고, 기우희는 그 의도를 알고 이렇게 답했다.
“그런가.”
“하지만 복잡해 보이십니다.”
“음.”
“분노한 형상이나, 표정은 인자합니다. 가부좌를 튼 채 사방에 불이 가득하되 어떤 불도 몸에 닿지 않았습니다. 두 눈을 모두 감았으며, 손에는 항마검(降魔劍)이 들려 있지 않습니다.”
“…….”
“그리고 가부좌를 튼 다리 위에는 금으로 빛나는 석장이 놓여 있습니다.”
공공대사가 탄식을 터트렸다.
부동명왕의 들끓는 불꽃은 진리에 닿은 지혜를 상징한다.
하지만 사방에 불꽃이 들끓고 있되 몸에는 닿지 않았다고 한다. 지혜에서 멀어졌음을 뜻한다.
명왕의 두 눈은 수행의 상태를 의미한다. 한쪽 눈만 뜨고 있다면 끊임없는 수행 상태를, 두 눈을 다 떴다면 수행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자한 표정이되 두 눈은 감았다고 한다. 수행의 완성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고, 오히려 두 눈을 다 감아도 부족한 수행 상태라는 뜻이다.
항마검이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은 온갖 번뇌를 끊어 낼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명왕의 다리 위에 승려들이나 쓰는 석장이 있다는 건, 그가 승려도 명왕도 되지 못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참으로 신통하구나.’
기우희의 영안은 단순히 그 사람의 본질만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미래, 혹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도 볼 수 있다. 지금 기우희의 말은 누가 뭐라 해도 후자였다.
공공대사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법(法)에서 멀어졌으니 그리 보일 만도 하지. 해서 무한 무극에 들지 않으려 하였고 맹주 위에 오르지 않으려 하였네.”
“그러나 후회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렇다네. 산중과 속세의 구분을 두는 것부터가 수행의 편협함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네.”
“맹주님께서는 위대한 불자십니다.”
다시 눈을 뜬 공공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그 말, 분명한 위로가 되었네.”
“아닙니다.”
기우희가 담담하게 물었다.
“제게 따로 하교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서.”
“어떤 것 말씀이신지요?”
“정확히는…… 모르겠네. 이것도 내 나름의 육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단순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어.”
“…….”
“군사는 말했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이해요?”
“신화교주의 황궁 공격 사태로 우리는 연가주와 팽가주를 보냈네. 묵룡부주에게도 연락하여, 묵룡부의 병력까지 황궁으로 향했지.”
기우희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화교주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공공대사가 말을 이었다.
“그간 신화교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신화교주의 급작스러운 황궁 공략 사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네. 나는 그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지만, 군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보니 과연 그럴 만하다고 보았네.”
“그러시군요.”
“그래서 더더욱 연가주를 추천했다고 했네. 연가주의 심검은 어떤 사태 앞에서도 단 한 번만큼은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네. 자네는 무인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연가주님의 심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저도 알고 있어요.”
실제로 기우희는 무극에 오른 연위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몹시 놀랐다. 무극에 오르기 전에 비해 상단전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위용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졌기 때문이었다.
심신의 조화가 제대로 맞았다고 할까. 그 상단전에 자리 잡은 거대한 검 한 자루는, 물리적인 파괴는 물론 인간의 감정과 사상까지도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신(神)의 힘을 담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고수와의 결전에 있어서 절대적인 전략 병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나의 영안과 비슷하지만, 또 달라.’
영안은 타인의 존재를 들여다볼 뿐, 타인을 조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위의 심검은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강제할 수 있다. 근원은 같지만 쓰임새는 전혀 다른 신기(神技)라 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함을 느꼈네.”
“이상함이라 하심은?”
“그렇지 않은가? 신화교는 중원 무림의 난적일세.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을 벌였던 혈교의 후신 중 하나지. 삼교 중 하나의 전력만 따져도, 준비되지 않은 중원을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네.”
“…….”
“그만한 조직의 수장이 느닷없이 황궁으로 온다고? 대체 왜?”
기우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 따로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물론 그렇겠지. 원하는 것이 있지 않고서야 그만한 사람이 황궁으로 갈 리는 없네. 다만, 그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겠지.”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는 목적 아닐까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지. 나도 그랬고.”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몇 번을 곱씹어 봐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
“……?”
“한 종교의 종주라도, 아니 종주이기 때문에 더더욱 직접 움직여서는 안 돼. 지금 상황에서 그만한 위치에 있는 자가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아무리 많아도 둘을 넘지 못하네.”
“…….”
“교도들을 이끌고 총공세를 취하려는 경우, 혹은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말미암은, 유희에 가까운 전략적 나들이.”
“그렇군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가지 경우를 벗어난 상황이라는 게지. 총공세는 당연히 아니며, 유희에 가까운 전략적 나들이도 혼자라면 모를까 굳이 어정쩡한 병력을 대동한 채 중원으로 들어올 리가 없잖은가.”
기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면 대체 무엇일까? 그는 왜 황궁으로 가려는 것일까? 차라리 중원 무림 한복판으로 향했다면 전략적인 기만술 정도로 이해했을 걸세.”
“맹주님 말씀은……?”
“우리는 왜 신화교주가 황궁을 공격한다고 생각했을까?”
“네?”
“신화교주가 황궁으로 향한 것은 맞네. 하지만 그가 황궁을 공격할 거라고 인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기우희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적측의 최중요 인물을 공략하려는 것은 당연한…….”
“당연하지. 하지만 말했듯, 그러려 했다면 진즉 그럴 수 있었네.”
“그럼?”
“통천진인일세.”
“……?!”
“통천진인은 신화교주가 황궁을 공격할 거라고 했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탁무자 어르신께서는 다급히 우리에게 연락을 취하셨어.”
“……!!”
“그냥 넘길 일이 아니지.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도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네. 말하자면 작은 외통수야. 그걸 알기 때문에,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최소로 최고의 효율을 내는 이들만 파견한 것이라네.”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대사님 말씀은 신화교주의 황궁 공격 자체가 거짓일 수 있다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코 공격적인 의도는 아닐 거라 생각하네.”
공공대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신화교주에게 드높은 경지를 구축한 절대자로서의 격이 있다면 말이지.”
“……!”
“내 그래서, 그것을 자네에게 확인해 보려고 온 것이야.”
“제, 제가 어떻게 그것을?”
“자네는 오랜 시간 의술을 연마하다가 중원으로 와서 환자들을 치료했네. 내공심법도 그때 익혔다지?”
“그렇습니다.”
“아무리 주변을 잊고 살았을지라도 자네 아버지 되는 이에 대한 기억을 다 잊지는 않았을 것이네. 아니, 오히려 자네만 한 상단전의 소유자라면 뚜렷하게 기억하겠지.”
“물론 기억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떠한가? 마냥 무섭기만 하였던가?”
민감한 질문이지만, 공공대사의 얼굴에 미안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기우희는 과거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인자한 분이셨어요. 단호하지만, 인자하셨지요.”
“그리고?”
“하지만 그 모습은 제가 열 살 때쯤을 기점으로 변했어요.”
“변했다니?”
“저는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저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걸. 그러나 애써 멀리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죠.”
“…….”
“그러다 어느 순간 점점 저를……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뭣하지만 천하게 보시는 것 같았어요.”
“음.”
“그때를 기점으로 의학에 파고들었어요. 피가 천하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왜 사람의 피는 다를까 싶어 파고들었던 것이 제 의술의 시작이거든요.”
“그러셨구먼.”
“그리고 그때…… 사음교주도 보았지요.”
공공대사의 눈이 번뜩였다.
기우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사음교주의 그 눈빛을.
너무나도 사이하고 독한, 천하에서 가장 낮은 곳에 거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준비가 된 진짜 악마의 눈빛을.
불꽃을 담은 푸른 눈에 강렬한 위엄과 인간 같지 않은 냉혹함이 가득했던 아버지와 사악함 그 자체를 형상화해 놓은 듯한 사음교주의 존재.
그 눈빛이 너무나 매서워서, 그녀는 굳이 사음교주를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이후 중원으로 와 처음으로 사음교주를 떠올린 것이 바로 연호정을 보았을 때였다.
처음 연호정을 보았을 때, 영안에 포착된 그의 존재감이 아버지와 사음교주의 그것에 비해도 부족하지 않음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신화교주가 사음교주와 친분이 있었던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시점에 사음교주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지요.”
“자네의 영안에, 부친은 동일 인물이었나?”
“물론이에요.”
“…….”
“아니, 사실은…….”
기우희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그 경지에 오른 자들의 상단전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허락해 주지 않으면 저의 영안도 존재를 포착할 수가 없어요. 지금의 맹주님처럼요.”
“그렇구먼.”
“하지만 아버지가 분명했어요. 그 외양만으로도…….”
“광혈교의 사제장들은 타인의 몸에 강신하여 같은 외양을 한 타인이 되어 버렸지.”
“……!!”
공공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지금…… 겉만 보고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