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65)
965화. 하늘을 뒤덮는 불꽃 (5)
일행이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황궁의 수문위들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들은?”
연위가 모두를 대표하여 무림맹에서 준 사절단용 방문첩을 건넸다.
방문첩을 확인한 수문위가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연위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 떨어진 뒤에 서 있던 양천은 정신을 집중하며 황궁을 둘러보았다.
“……이런.”
팽무강이 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양천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놀라움과 호승심, 나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도 엿보였다.
“엄청나군. 이 열양기(熱陽氣)는 도대체……?”
“열양기라 하심은?”
양천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줄 정신이 아니었다.
‘엄청나구나.’
황궁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곳에 별다른 소란이 없다는 것을 기감으로 느낀 그였다. 그것은 연위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신화교의 병력이 도달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어떠한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황제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 버렸을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 그들은 더욱 속도를 내서 시간을 훨씬 단축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죽었을 리는 없었다. 그의 곁에는 수많은 고수가 있으며 결정적으로 광혼귀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황궁 앞에 도착한 양천은, 웬만한 마을보다도 더 거대한 황궁 내에 압도적인 강자 한 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도.’
너무 멀리 떨어져서 존재감을 느낄 수도 없다. 오히려 광혼귀군의 것으로 유추되는 사기와 그와 엇비슷한 열양기의 흔적은 훤히 읽혔다.
하지만 미약한, 아주 미약한 기도 한 줄기가 양천의 예민한 감각에 잡혔다.
광혼귀군 곡경이 느끼지 못한 것을, 양천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파편에 불과한 진기의 농도만으로도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다니.’
양천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흑사자기가 저절로 발동되려 한다.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긴장하는 이 기분.
사음교주와 일전을 벌인 이후, 이 정도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설마?’
잠시 후.
“들어오시되, 정사 연합군은 황궁 외성 인근에 주둔해야 하오.”
“고맙소.”
애초에 자리를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황궁으로 들어갔다.
연위와 팽무강, 그리고 양천은 병력과 떨어져 내궁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궁성 내에서 뛰어서는 안 된다는 법도가 있지만, 일행에게 그런 법도는 의미가 없었다. 당장 황제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일일이 법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황궁 수비대 무장의 인도에 따라 어전으로 향하는 세 사람.
달리면 달릴수록, 연위와 양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엄청나군요.”
“그러게나 말이오.”
연위의 눈이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귀군과 비슷한 강자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용암 같은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요. 만에 하나 싸움이 벌어진다면, 선배님이 아니면 확실한 승리를 장담키 힘들 듯합니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승리를 장담키 어렵다는 뜻.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 인물은 따로 있소이다.”
“예. 엄청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군요.”
양천이 놀란 눈으로 연위를 보았다.
“연가주도 느꼈소?”
“미약하지만…… 예. 느낄 수 있습니다.”
“허!”
“삼군, 아니 이제는 이군이지요. 이군의 힘과 엇비슷한 고수가 용암이라면, 이 미세한 기운의 주인은 가히 태양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군요.”
“대단하시구려. 지금 연가주의 경지로는 느끼기 힘들 거라고 보았는데, 과연 심검은 위대하오.”
“과찬이십니다.”
팽무강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는 모르겠군요. 그 문제의 인물이 누구입니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겠소?”
“설마?!”
연위의 손이 저절로 제국검에 닿았다.
“대체 신화교의 수장이 어찌하여 어전에 있는지 모르겠소.”
* * *
찻잔을 내려놓으며, 황제가 말했다.
“어떤가.”
“…….”
“짐을 지키기 위해 무림에서 파견한 병력이라네.”
계단 밑에서 편히 앉아 차를 홀짝이던 기천웅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대단한 강자들이로고. 천화지경(天火之境)에 이른 고수가 둘에, 한 명은 엄청나게 연마되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짐도 무공이라는 걸 배워 볼 걸 그랬군. 언제 봐도 신기해. 그 감각 말이야.”
“무공을 배웠다면, 황제도 보통 고수가 되진 않았을 거라네.”
잠시 후.
“폐하.”
무장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황제가 말했다.
“들라 하라.”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어전의 문이 열렸다.
훅!
문밖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어전 내부의 촛대를 마구 흔들었다.
연위와 팽무강이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짐 또한 그러하다. 그사이에 더욱 출중하게 연마되었음은 무공을 몰라도 알 수 있겠어. 고생이 많았느니라.”
황제의 뒤에 시립한 곡경 역시 연위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맹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괴물 부자가 따로 없군.’
그리고.
“그대는.”
마침내, 황제와 양천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불경하게도 양천은 오체투지를 하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볼 뿐.
황제 역시 곧장 예를 취하지 않은 양천에게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눈을 보고, 서로를 느끼려 했다.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분위기는 황궁 전체를 날려 버릴 정도의 고수들이 집결한 가운데에서도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로구나.”
“…….”
“좋은 눈이다. 촛불을 담은 두 눈, 매서운 야수성과 절대자로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도다.”
“…….”
“탐욕으로 가득한 욕망의 화신일 거라고 짐작했거늘 이리도 사내다운 고수일 줄은 진정 몰랐다.”
황제의 말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양천의 입도 열렸다.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황위에 올라 지닌바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만민을 위해 힘써 온 성군이었으나, 어느 날부터 주색을 탐하고 정사를 내팽개치니 문무백관이 개탄하는 암군으로 돌변하더라.”
연위와 팽무강의 눈이 흔들렸다.
황제의 얼굴에 흥미가 일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기천웅의 얼굴에도 묘한 미소가 어렸다.
양천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암군으로서 이길 수 없는 적들의 눈을 피해 낸 그가 비로소 때가 이르렀음을 깨닫고 그간 입었던 오물을 벗어던진 후 다시 빛으로 돌아왔으니, 하늘이 내린 군주의 자질을 되찾아 끝이 없는 천하에 평화와 법도를 다시 세우게 되리라.”
“…….”
“많은 이들이 폐하를 두고 그리 말하더이다.”
팽무강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존대도 아니고 반존대다. 곧장 불같은 호통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가?”
“그렇소.”
“하면 세인들의 평가를 제하고, 그대가 보는 짐은 어떤 사람인가?”
“아직 그럴듯한 대화 한 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소이다.”
양천은 사람이라 했다.
천자는 하늘이 내린 신인이다. 그런 이를 두고 이런 자리에서 명백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었다.
그러나 이번 역시, 황제는 웃으며 양천의 말을 받았다.
“우리쯤 되면, 대화 없이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밑그림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은가?”
“폐하께서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셨소?”
“수십 년이 되었지. 내가 암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
“해서, 자네에게는 그 눈이 없는가?”
가만히 황제를 보던 양천이 천천히 오체투지를 하였다.
“대륙 남부 흑도 무림 연맹, 묵룡부의 부주를 맡고 있는 양천이 제국의 주인을 알현하나이다.”
“하하하!”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 있어, 양천의 목숨을 건 호탕함과 빠른 인정은 천상의 감로주보다도 달콤한 선물과 같았다.
“연호정, 그 젊은 영웅이 난데없이 혼사를 논하기에 이놈이 짐을 이용해 먹으려 하는구나 하고 잠시지간 노여움을 품기도 했느니라.”
“…….”
“하나, 황실의 부마도위가 될 인재를 이렇게 보니 강동 연씨 가문에 수만의 금과 수십만 평의 전답을 내려 줘도 부족할 듯싶다. 백문이 불여일견, 흑도 무림의 총수가 시대를 타고난 거인임을 짐은 똑똑히 보았다.”
양천의 평가가 황제의 기분을 크게 살렸다면, 황제의 평가는 양천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거인과 거인의 만남.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니, 긴장감 넘치던 어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운 부드러움으로 가득 찼다.
“이만 일어들 나게.”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말할 것 없겠지. 이런 자리에서 법도를 따지는 짐도 아니니, 내 집처럼은 무리더라도 편하게 있도록 하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그러나 결코 방심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연위의 눈에 푸른 기운이 어렸다.
두근두근.
용상 아래, 편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금발의 백의 차림 사내가 보였다.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시야에는 두 배, 세 배씩 커지는 듯하다.
사람 자체가 크다. 무언가 탈속한 듯한 느낌을 주기에 더더욱 커 보이는 존재감이었다.
연위의 눈에 비치는 금발의 사내는 그러했다. 그리고 연위만큼은 아니지만, 팽무강 역시 눈앞의 사내가 비범하기 짝이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양천은 달랐다.
‘타오르는구나.’
양천의 눈에 금발의 백의인은 사람이 아니라 불이었다.
거대한 불이 시시각각 색을 바꿔 가며 끊임없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얼굴에 화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서로가 다른 것을 보지만, 세 사람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난적의 정체를, 아니 저 거인의 정체를.
“대단하군.”
탁.
찻잔을 내려놓는 손가락은 서역인의 커다란 뼈대를 갖고 있음에도 섬섬옥수라 불릴 만큼 고왔다.
“이 경지에 오른 이들의 싸움은 찰나지간에 승패가 나뉘지.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도 있지만, 실수 한 번에 그간 쌓아 온 노력이 다 사라질 수도 있는 경지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천화수(天火手)들 셋은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고 강렬했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워, 귓가로 파고드는 순간 사지의 힘을 풀어 낸다. 기묘한 목소리였다.
“내가 틀렸군. 중원의 천화수들이 모두 그대들과 같다면, 본교의 병력만으로는 무리였겠어. 광혈과 사음의 악귀들이 수십 년 동안 밑 작업을 하겠다고 난리를 친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대들 둘이라면 방심치 않아도 내 목숨이 위험해. 어릴 적부터 중원 무림의 저력이 용암과도 같다고 들었건만,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이야.”
스르륵.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리는 신화교주.
여전히 맨발에, 풀어진 앞섶 사이로 허연 근육이 다 드러났다.
용상을 가린 몸. 용상 좌우의 밝은 촛대가 그의 금발을 사자의 갈기처럼 보이게 하였다.
연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화교주.”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천웅이라 하네.”
연위가 제국검을 들었다.
뽑지는 않았지만, 검병에 올려 둔 손은 언제라도 벼락같은 발검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천웅의 푸른 눈이 어둡게 물들었다.
“뽑아 볼 텐가?”
연위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어디 죽어 볼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