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66)
966화. 하늘을 뒤덮는 불꽃 (6)
삽시간에 어전의 분위기를 냉골로 만들어 버리는 대치였다.
뜻밖에도 황제는 흥미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천하 정점에 오른 절대고수들의 긴장감 넘치는 대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특별함은 남다르다 볼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무엄하오.”
시간이 지날수록 하강하는 온도를 멈춰 세우는 한마디.
용상 옆에 시립해 있던 곡경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자께서 계시는 자리외다. 폐하께서는 그대들에게 법도를 신경 쓰지 말라 하셨으나, 그대들이 진정 폐하를 생각한다면 그런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될 것이오.”
곡경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가만히 연위를 바라보던 기천웅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칼 내려놓게. 내가 좀 심했군.”
연위의 알 수 없는 힘에 반응한 그였다.
분명 자신보다 아랫줄인데 이해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는 남자. 폐관에서 나온 이래, 저도 모르게 상대를 도발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위가 천천히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는 기천웅이 있었지만, 그의 사과는 황제를 향해 있었다.
“폐하의 어전에서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황제가 아무렇게나 손을 저었다.
“괜찮네. 한 산에 두 마리의 범이 살 수는 없는 법. 그대들이 만나 신경전을 벌이는 거야 무인으로서의 당연한 호승심 아니던가.”
이 정도면 황제의 이해심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하기도 어려웠다.
말만 황제지, 하는 행동만 보면 담백한 성정의 거부와 다를 바가 없다. 최소한의 권위를 제외하면 딱딱한 분위기를 결코 만들지 않으려는 성정이었다.
기천웅이 한옆에 털썩 앉고는 찻잔을 들었다.
용상 아래에 앉아 있지만, 자세가 너무 편안해서 그런지 도통 황제의 아랫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연위와 양천, 팽무강은 기천웅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정좌했다.
자연스럽게 문무백관이 좌우로 늘어서는 자리에 앉은 그들.
기천웅은 세 사람을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차를 마시면서도 그의 감각은 세 사람의 기도를 미세하게 훑고 있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들 많았네.”
팽무강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더 빨리 오지 못해 황송할 따름입니다.”
“괜찮네.”
황제가 세 사람을 보다가 다시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호젓한 곳에서 대화나 나눠 보고 싶네만, 없는 시간 쪼개서 예까지 온 그대들에게 상황 설명 정도는 먼저 해 줘야겠지.”
황제가 입을 닫자 곡경이 입을 열었다.
“처음 신화교주가 북방 성문을 무너트린 후…….”
이후 곡경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자세했지만, 워낙 조리 있게 설명해서 그런지 장황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날카로운 성격으로 다가가기조차 힘든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황제의 곁을 지키면서 많은 능력을 쌓은 그였다.
곡경의 얘기를 다 들은 일행은 제각기 다른 눈으로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눈, 흥미로운 눈, 그리고 불신 가득한 눈.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황제까지야 그렇다 치지만, 차후 함께 손을 잡을 사이인데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지금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
친구 대하듯 편하게 말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말투였다.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던 연위가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말씀하시게.”
“차기 부마도위가 될 사람과 오붓한 대화를 나눠 보시겠습니까?”
곡경이 눈을 부릅떴다.
“이보시오, 연가주.”
“좋지.”
황제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양천을 바라보았다.
“첫 만남부터 마음에 쏙 들었네. 나 역시 한시라도 빨리 흑도 무림의 거장과 대화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이야.”
“하면, 소인이 신화교주와 밤바람을 맞으며 따로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는지요.”
“짐이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지.”
황제가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첫 만남이 제법 골치 아플 거라는 생각은 했다만, 이 정도 취급이라니 참으로 답답하군.”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대화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곧바로 전에 썼던 숙소로 돌아가 여독을 풀어도 괜찮네. 내일은 또 올 테니까.”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연위가 팽무강과 함께 어전을 나갔다.
기천웅 역시 찻잔을 놓곤 뒷짐을 진 채 어전을 나섰다.
어전 밖.
웅장하게 잘 닦인 어도 옆으로 엄청나게 길고 화려한 담벼락이 늘어서 있었다.
연위가 팽무강에게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 않고.”
“신화교주와 진한 얘기를 나누어 볼 기회가 또 언제 있겠소?”
히죽 웃고는 있지만 팽무강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연위가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아직 저 멀리서 여유로이 걸어오는 기천웅.
뒷짐을 진 채 밤하늘을 보는 그의 자태는 숨 막히도록 장중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익숙지 않은 이국의 미남자였지만, 바람결에 따라 흩날리는 금발과 당당한 체격, 고스란히 드러낸 맨발과 하얀 의복이 마치 신화 속의 영웅신(英雄神)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다가왔을까.
“좋군.”
기천웅이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아주 좋아. 엄격하면서도 참 맑군. 중원의 맑은 공기 위로 황제가 쌓아 둔 법도가 그림처럼 그려지는구만.”
연위는 생각했다.
‘불꽃 같다.’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느새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자유로이 넘실거리다가 천지 사방을 불태우고 짧지만 화려한 생을 살다 가는 불꽃 그 자체의 형상이었다.
“그래서.”
어느새 연위의 일 장 앞까지 도달한 기천웅.
멀리서 봤을 때도 컸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크다.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골격부터가 중원인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단순히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기다란 팔다리와 떡 벌어진 골격 자체가 사람을 크게 보이도록 만드는 듯했다.
“나를 따로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천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 이 나를 혼내 주고 싶기라도 한가.”
“그대를 혼내 줄 수 있는 자가 온 천하에 몇이나 되겠소?”
“존재하기나 하겠나?”
“다만, 죽이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기천웅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었다.
연위가 덤덤하게 말했다.
“보이시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군.”
기천웅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팽무강의 얼굴에는 긴장이, 연위의 얼굴에는 특유의 무심한 기색이 가득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
“상단전이 왜 그 모양이오?”
기천웅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연위는 끈기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게 보이는가?”
“지금도 훤히 보이오.”
기천웅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씁쓸함과 감탄, 서글픔과 애환이 묻어 나오는 묘한 미소였다.
“대단하군.”
“…….”
“황제에게 듣기로, 그대의 아들이 본교의 아해들을 많이도 잡아 죽였다고 하더군.”
“그럴 만한 사이였으니까.”
“자네 아들이 본교에 피해를 준 걸 탓하고자 꺼낸 말이 아니야.”
“…….”
“자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들 나이가 많아도 서른을 넘긴 정도일 텐데, 얼마나 대단한 천재기에 그런 것이 가능한지 의심했었네.”
“…….”
“이리 보니 알겠군. 아비 된 자의 재능이, 그 능력이 이리 출중하니 그 피를 이은 자식의 능력이라고 평범할 리가 있겠는가.”
“내 아들은 나보다 강하오.”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사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
“그러나 생사결을 나누는 대상이라 한다면 자네만큼 위험한 상대는 없겠어.”
“보이지 않는다더니.”
“보이진 않지만 조금은 느낄 수 있지.”
기천웅의 손가락이 연위의 이마를 가리켰다.
“자네의 상단전에 무서운 것이 도사리고 있어.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어떤 상대라도 일격에 무력화시킬 수 있을 듯하네.”
“그럴 틈을 준다면 말이오.”
“물론 그렇지.”
기천웅이 몸을 돌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발이며 옷이며 희한할 정도로 깨끗하다. 연위도 기천웅의 옆에 앉았다.
팽무강은 괜스레 어색해서 담벼락에 기대어 서기만 했다.
“십오 년 동안 폐관에 드셨다고 했소?”
“그랬지.”
“더 강해지기 위해서?”
“강함의 획득 이외의 사유로 폐관에 드는 무인은 없지.”
“강해지셨구려.”
“동시에 약해졌네.”
“내가 알고 싶은 건.”
연위가 기천웅을 돌아보았다.
문득 그는, 자신이 온 중원을 공포로 물들일 수 있는 희대의 괴수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실감은 연위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신이 실수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손에 당한 것인지요.”
“…….”
“투왕 양천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나의 능력을 속속들이 파악했소.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하는군. 필시 상단전의 절반이 대파되었기 때문일 거요.”
“…….”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화정 덕분이야.”
기천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교에는 화정이라는 기술이 있네. 화정을 완성하고 그 경지를 끌어올리면, 어지간한 치명상을 입고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지.”
“그걸로 상단전의 붕괴마저 막은 것이오?”
“막았지만, 오래 살지는 못한다네.”
솔직한 말이었다.
연위 성격에, 제아무리 적장이래도 초면부터 공격적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한데도 그가 이리도 강하게 나간 이유는 기천웅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기이했기 때문이다.
필시 마도의 주술이나 사특한 마공을 이용해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훗날을 위해서라도 단호한 결의를 내려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나눠 보니, 기천웅에게서는 어떠한 사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허허롭고 씁쓸한 감정을, 강렬한 존재감과 조금은 날카로운 어휘로 가리고 있었다.
“도대체 사음교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소?”
“사음교를 탓하기 전에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것이겠지.”
“…….”
“나아가, 군주로서도 좋지 못했네. 의도만 좋았지.”
“…….”
“결국 다 내가 자초한 것이라네.”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소?”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아들의 재능은 나 이상이야. 자네 아들처럼,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이십 년도 더 전에 천화지경에 이르렀지. 지금 나이가 쉰쯤 되었겠어.”
오십의 나이, 거기서 이십 년도 더 전이라면 서른 전에 천화지경에 올랐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재능을 안고도 오랫동안 교주가 되지 못했으니, 그 불만이 얼마나 쌓였겠는가. 언제고 교주 자리에 오르게 될 거라고 말은 했지만, 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네.”
“인내심이 없었군.”
“인내심은 있었지. 욕망이 너무 컸을 뿐.”
“…….”
“그 욕망에 불을 질러 본교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바로 사음교주라네.”
기천웅의 푸른 눈에 생생한 분노가 담겼다.
“사음교주 사문향(司聞享). 그로 인해 당금 신화교는 사실상 사음교의 한 지파나 다름없게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