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68)
968화. 늪에서 (1)
“후우.”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용우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감돌았다.
남궁표는 제법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기대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이지만, 하얗게 질린 낯빛에 피범벅이 된 의복은 그가 상상도 못 할 격전을 치렀음을 증명했다.
오구문은 큼직한 칼을 땅에 박은 채 절벽 아래의 넓은 세상을 바라보았고, 팽대호는 위험천만하게도 절벽 끝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각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했지만, 기실 이것은 휴식이 아니라 전투 준비였다.
산서에서 벌어진 소뢰음사 병력과의 전투.
그 전투에서 많은 적을 죽였고, 많은 무사를 잃었다. 무림맹 소속 육룡단 중 창룡단(蒼龍團)과 대룡단(大龍團)의 무사들은 강했지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적과의 난전에선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소뢰음사는 강했다. 미리 점령할 지역을 순찰할 겸, 혹은 포교할 겸 왔다고는 하지만 데리고 온 병력은 창룡과 대룡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천만다행으로 몇 번의 접전 끝에 양측 모두 물러나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하여 미세하게나마 아군 측의 우세가 예상되니, 경험이 많지 않은 후기지수 장수들을 이끌고 온 그들로서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낸 셈이었다.
“마지막이군요.”
모용우가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제갈준. 깊고도 강건한 기도는 이번 전투로 인해 몇 배는 더 사납게 제련된 상태였다.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런가?”
제갈준이 손으로 절벽 너머 평야를 가리켰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붉은 옷과 깃발들. 오백여 명의 병력이 집결한 곳이었다.
“지금껏 우리는 저들이 산서 중심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모든 방위를 막아 가며 싸웠습니다. 생각보다 저들의 공세가 격렬했지만, 다행히 한 명의 적도 이 방어선을 뚫지 못했지요.”
“그랬지.”
“저들의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우리가 저들이 치고 들어올 곳을 다 막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저들 역시 산서 중심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즉, 더는 뚫고 들어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남은 병력을 한데 모아 집결했을 리가 없지요.”
“음.”
“물러나거나 총력전을 벌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겁니다.”
“자네의 생각은?”
제갈준의 눈도 모용우만큼이나 깊고 신중해졌다.
“높은 확률로 싸움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왜지? 저들이 광신도와 비슷하기 때문인가?”
“대마(大馬)의 꼬리가 잡혔기 때문입니다. 저쪽에도 병법을 아는 자가 있으니, 대놓고 후퇴하다가 꼬리를 잡히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퇴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후퇴하는 군대를 추격하여 공격하는 것만큼 쉽게 승리를 거머쥐는 방법은 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고래로 많은 군대가 강도 높은 후퇴 훈련을 시행했다. 경우에 따라 언제든 병력을 물릴 수 있도록, 혹은 함정까지 유인하도록.
멀리서 보면, 굳이 후퇴하는 적을 뒤쫓다 함정에 걸려 몰살당하는 군대가 멍청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함정을 파고 유인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며, 그 와중에 함정까지 이르지도 못하고 몰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즉, 후퇴하고 싶어도 쉽게 후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반드시 생긴다는 뜻이었다.
“소뢰음사의 병력은 사흘 전, 늦어도 어제는 후퇴를 모색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젯밤 또 한 번 산서 중심으로 이동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했지요.”
그 한 번의 싸움으로 승부의 추가 무림맹 쪽으로 기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뢰음사 측에게 더 심각한 일은, 여기서 도망쳐 봤자 가진 병력의 대다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네 말마따나 저쪽에도 병법을 아는 자가 있다면 이와 같은 상황 역시 예측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들의 공세, 군의 움직임을 보면 병법은 알아도 신중함은 부족한 듯하군요.”
머리가 똑똑하다고 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른 빠른 판단력과 실행 능력이다. 치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아도 분노를 못 이겨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다 몰살당한 군대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제갈준이 보기에 저들이 딱 그런 경우였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무리하게 전진하여 싸움을 유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들이 들어오면 싸우고, 후퇴하면 쫓아가서 죽이면 되니까요.”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의 소가주답네. 이번 전투에서 자네에게 크게 배웠어.”
제갈준이 멋쩍은 듯 웃었다.
“별것 아닙니다. 실제로 이런 대규모 전투는 저도 처음 경험하는 터라 실수가 많았어요.”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살아남은 창룡단과 대룡단 무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제갈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제게 더 날카로운 안목이 있었다면 잃지 않았을 병력이었습니다.”
“연제가 말일세.”
뜬금없이 나오는 연제라는 호칭.
연제가 연호정을 뜻한다는 걸 아는 제갈준의 눈이 반짝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이쪽을 향해 귀를 열어 두고 있던 남궁표, 오구문, 팽대호 모두 고개를 돌려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광동 작전 때였나?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게 꽤 인상적인 말을 해 준 적이 있다네.”
“어떤 말이었습니까?”
“무사는 단점을 줄이는 것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좋고, 전략가는 반대로 장점을 내세우기보다는 단점을 메우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했지.”
“……!”
“또한 자신의 장단점을 알기 위해서는 필요한 행위가 있다고 했네. 그것은 바로 복기(復棋)라네.”
복기란 바둑 용어 중 하나로, 이미 두었던 바둑의 경과를 검토하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순서대로 두어 보는 것을 말한다.
“복기란 후회와 엄연히 다른 터라,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깨끗한 복기가 필수라고 하였지. 연제 자신도 항상 투명한 복기를 하진 못하지만, 언제나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인지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제갈준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쉽지 않은 말이로군요. 특히 전략가에게는요.”
“그렇겠지. 군사의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고 사니까.”
“그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명한 복기를 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지 않지만 해야겠지. 그게 불가능하다면 더는 실전에 나서면 안 되는 것이고.”
“…….”
“결국 내 선택에 따라 죽은 병사들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두는지,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게 우선일 것이네. 나아가, 자네가 정말 뛰어난 전략가가 되고 싶다면 스스로 발전하여 더 적은 희생으로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관건일세.”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필연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군사라도 아무도 죽이지 않고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는 법이다. 적게든 많게든 사람이 죽게 된다. 그게 전쟁이다.
“그걸 버틸 수 없다면, 자네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전략가를 길러 내게.”
제갈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모용우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제갈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전략 전술에 관한 얘기를 지속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우선은 제갈준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행히 그의 상태는 수일 전보다 양호해진 듯했다.
그래서 이런 쓴소리도 하는 것이다. 버틸 수 없다면 앞으로 전장에 나서지 말라는.
“참 대단한 사람이 맞는 것 같소.”
모용우가 오구문을 바라보았다.
칼자루에 양손을 올려놓은 오구문의 모습은, 다른 후기지수들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내 스승이 이르시길, 이 세상에 완벽한 무도(武道)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사 역시 완벽해질 수 없는 고로, 내가 못하는 분야보다는 잘하는 분야의 달인이 되어야 하니, 그 지경에 이르면 비로소 자신만의 무도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셨소.”
“그렇구려.”
“단점은 없애고 장점을 취해 나만의 공부를 창조해 내는 것.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오. 스승의 말씀을 따라 살았지.”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이 모용우와 오구문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이들 중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개인의 용맹만 따지면 모용우조차 오구문을 따르기 힘들었다.
모용우는 신중하면서도 과감할 땐 과감했고, 오구문은 한번 물면 죽을 때까지 늘어지는 독기를 보였다.
“한데 연 소부주는 우리보다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이치를 체득했으니, 과연 천재는 타고나는가 보오.”
팽대호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천재는 많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연 소부주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소. 진짜 천재라는 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지.”
남궁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검을 닦을 뿐.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연호정에 대한 질투나 패배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조부에게 받은 가르침도 있었거니와 눈앞에서 연호정의 재능을 직접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말없이 씁쓸해할 뿐이었다.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계시네요.”
모두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막 절벽을 기어 올라온 당상아가 호쾌하게 옷을 털며 걸어오고 있었다.
제갈준이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누님?”
당상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전의가 들끓는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
이들 중에서 가장 신법이 고명한 사람은 당상아였다. 암기를 다루는 만큼 은신술 능력도 대단했다.
해서 몰래 적들의 동태를 살피러 다녀왔는데, 정작 싸울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갈준이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당상아가 모용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들 잘 쉬고 있었나요?”
“그렇소.”
그녀가 모용우를 힐끔거렸다.
탕마신검을 품에 안은 채 꼿꼿이 서 있는 모용우의 자태는 마치 연위 같았다. 한 그루의 고고한 대나무를 연상케 한달까.
당상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들의 동태가 참 이상하죠? 솔직히 이 악물고 태세 정비에 들어갈 줄 알았거든요.”
“제갈 형제도 후퇴하지 않고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 추측했소.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고.”
“직접 싸웠을 때 본 저들의 눈빛은 정말 살벌했어요. 실력 이전에 광적인 신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어긋난 불도를 따르고 있는 광신도들이니.”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여유로워 보였는데…… 뭔가 수가 있는 걸까요?”
“더 깊이 들어가진 못했소?”
“초절정고수가 있어서 내부로 침투할 순 없었어요. 혹시라도 들키면 경우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질까 싶어서요.”
그때였다.
“후퇴도, 싸움도 벌일 생각이 없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모두가 깜짝 놀라 창룡과 대룡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한 명의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모용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빛나는 인연이 거기에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채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
“연제?!”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멀리도 왔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