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69)
969화. 늪에서 (2)
당상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팽대호는 입을 헤 벌렸고, 오구문과 제갈준의 눈썹은 이마 끝까지 올라갔다. 검을 닦고 있던 남궁표 역시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연호정이 차분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다들 오랜만이오.”
“연제!”
헐레벌떡 달려간 모용우가 느닷없이 연호정을 안았다.
연호정이 턱을 움츠렸다. 날렵한 턱선에 잔주름이 가득 생겼다.
“어허, 왜 또 이러실까.”
반가움의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그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모용우가 이럴 때면 천하의 연호정도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용우가 연호정의 어깨를 잡았다.
“너, 괜찮은 거냐?”
“그럼 안 괜찮을 게 있겠습니까.”
“청해 신마림으로 가지 않았느냐?”
모용우의 말투는 어느새 완전히 동생을 대하는 듯한 투로 바뀌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잘 풀렸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한데 행색을 보아하니 청해에서 곧장 온 듯한데?”
감정적으로는 가깝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의형제라 불릴 만큼 자주 붙어 다니진 않았다.
그런데도 모용우는 연호정의 행색만 보고도 그가 어딜 거쳐 왔는지, 쉬기는 했는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만큼 연호정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것이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온다. 흩어지는 구름 너머 창공이 보이는데, 묘하게 어둡게 느껴졌다.
“맹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중간에 형님이 소뢰음사의 병력을 막으러 갔다길래 이곳으로 틀었습니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형 걱정 해 주는 건 아우밖에 없구나.”
“구경이나 온 겁니다. 걱정은 무슨.”
말은 저렇게 해도, 연호정이 자신을 걱정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다만, 연호정은 자신과 다른 후기지수, 그리고 창룡단과 대룡단의 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어 직접 왔다는 것은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용우는 그런 것보다 연호정의 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무슨 일이라니요?”
“표정이 좋지 않다.”
순간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모용우가 아니라 다른 누가 말했어도 감정적인 동요를 느꼈을 것이다.
‘사부님.’
오랜만이었다. 누군가로 인해 이렇게까지 감정이 가라앉은 적은.
그에게 있어 스승 천인룡은 언제나 특별했다. 그저 삶이 바빴기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끊임없는 고뇌와 싸움이 일상이었기에 떠올리는 횟수가 많지 않았을 뿐, 스승이 없었다면 결국 지금의 그도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혈옥을 정화하고 그 능력을 자신에게 부여해 주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중원은 삼교와 훨씬 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연호정은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저 자신과 제 사람들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백 번을 넘게 회귀했다 한들 삼교를 막을 수 있었을까.
결국 연호정을 가르친 천인룡이야말로 본래라면 삼교의 화력에 휩쓸려 버렸을 중원이 거대한 성벽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준, 중원 무림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삼백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곳에서는 부디 이승의 난삽한 일로 골머리 썩지 마시고 편안히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자주 뵙지 못해서, 살가운 대화도 많지 않아서 유독 더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승의 생각에 빠져 해야 할 일도 못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연호정이 제갈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힘드냐?”
“형님.”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는 제갈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가 무척이나 날카롭다. 죽고 죽이는 전쟁 속에서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겠다.”
“…….”
“그래도 무너지지 마라. 아프고 힘들지언정 제갈세가의 소가주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 정도로 포기해서야 쓰겠느냐.”
연호정의 말은 따끔한 한마디로 바른길이 무엇인지 제시해 준 모용우에 이어, 제갈준의 자신감에 불을 지펴 주었다.
제갈준이 미소를 지었다.
“힘들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만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 있고, 노력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가치가 없어지는 일이 있다. 네가 앉은 자리는 전적으로 후자에 해당한다. 노력하고, 쟁취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연호정이 팽대호를 보았다.
팽대호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밖에서 보니까 더 반갑수다.”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소.”
“으잉?”
“지금 만호보다 그쪽이 더 볼만하오.”
팽대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렴. 쪽팔리게 동생만도 못하면 안 되지. 안 그러면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은 세월이 너무 아깝잖소.”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한 연호정이 오구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구문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오.”
“맹에 있을 적보다 기도가 출중하오. 고생이 많으셨소.”
“고생이야 모두가 했지.”
“그 또한 맞는 말이오.”
연호정의 눈이 이번엔 남궁표에게 닿았다.
멍하니 연호정을 보던 남궁표가 이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말 없는 인사였다. 처음 무림맹으로 가다가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인생을 살게 된 사람이 그였다.
연호정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동생, 남궁현과는 불편한 관계지만 검제 남궁승의 가르침 덕분인지 남궁표의 자만심도 많이 수그러든 듯했다.
그리고.
“군장님.”
당상아의 차분한 목소리에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묵룡부 소부주야. 군장 아니야.”
“오랜만에 뵙네요.”
당상아의 얼굴에도 확연한 반가움이 일었다.
그녀는 연위의 휘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연호정은 당관과 함께 많은 위험을 헤쳐 나왔다. 나아가 연위와 당관이 깊은 우애를 나누었으니, 두 사람 역시 의남매를 맺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그만큼의 친분이 있으니,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도 전혀 낯설지 않다.
“대단한데.”
“네?”
“아버지한테 듣긴 했지만, 최초로 당가에 여성 가주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당상아가 피식 웃었다.
“당씨 문중이 얼마나 폐쇄적인데요. 아버지도 많이 바뀌셨지만, 아직 전통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에요.”
“전통을 뒤흔들면 한자리 맡아 보겠다는 의미인가?”
“짓궂은 건 여전하시네.”
“하하.”
당상아는 연호정의 강렬한 존재감을 느끼고도 성천에 올랐음을 축하하지 않았다. 무력에 관한 칭찬은 연호정에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 이전에 사람이다. 무력을 언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상아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반갑고도 짧은 인사가 끝났다.
“한데, 아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음?”
제갈준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 형님이 그러셨습니다. 후퇴도, 싸움도 벌일 생각이 없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그랬지.”
“그게 무엇인지 고견을 들어 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고견씩이나. 너도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예?”
“저들이 싸우지도, 후퇴하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을 정도로 나약한 놈들이었느냐?”
“그건…… 아닙니다.”
연호정이 당상아를 가리켰다.
“당씨 문중 최고의 기린아가 직접 정찰까지 하고 돌아왔다. 이 사람 말로는 딱히 전의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급해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
“후퇴도 안 하고, 당장 싸울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휴식만 취하기에는 적들이 시야에 훤히 보이고. 그런데도 편하고.”
“……!”
“답은 하나잖아?”
제갈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설마…… 원군?!”
그의 말을 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이곳으로 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소뢰음사는 새외의 소림이야. 삼교를 제외하곤 단일 무력으로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오히려 위상만 치면 소림 이상이라 할 수 있다.”
“그, 그렇다면?!”
“이쪽 병력을 완전히 짓눌러 버릴 수 있을 만한 고수, 혹은 압도적인 규모의 지원 병력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헉!”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잠시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성천급이 오는 거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놈들이 저만큼 여유를 부리고 있다면, 최소 성천급에 달하는 고수나 성천급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전자로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분쇄한 적의 숫자만 삼백이 넘는다. 원래는 그 정도가 아니었는데, 무림맹이 예측한 것보다 더 많은 지원 병력이 시시각각 몰려들었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소뢰음사가 아무리 커도 중원으로 파견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다?”
“진짜 전쟁이라면 모르지. 하지만 지금 저들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고 했다. 말 그대로 포교, 사이한 교리로 미리 민심을 홀리기 위한 사절단에 가깝다.”
“사절단치고는 숫자가 너무 많긴 하지만,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사실, 무극의 고수가 온다는 것도 이해하기는 힘들다. 저들이 이곳 산서로 이동한 것은 성동격서에 포교 활동도 할 겸 찾아온 것이야. 거기에 무극수가 끼어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하다.”
“그게 소뢰음사의 의지입니다.”
“의지?”
“신마림으로 가던 길에 소뢰음사의 고수들을 만났습니다. 제왕급 고수 하나, 삼군보다 뒤지는 고수 하나가 있었지요.”
“……!”
“그들이 말하더군요. 삼교와 손을 잡은 것은 대세를 위함인 동시에 동대륙의 기름진 땅을 자신들만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모두의 눈에 살벌한 한기가 어렸다.
“말하자면, 놈들은 지금 중원의 어느 땅이 본인들에게 맞는지 직접 보고 확인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무극수를 보내 의지를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지요.”
“허어.”
“소뢰음사의 무극수라면 필시 배분이 높은 강자일 터. 소뢰의 교리에도 정통했을 테니, 시국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빨리 왔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우우웅.
연호정의 어깨에 걸쳐진 광룡부가 희미한 울음을 토해 냈다.
“섬서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번씩 말 못 할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 불안감은 묘하게 익숙했지요. 아마 이곳으로 오는 길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제 감각을 흐리게 만들 만한 고수가 평행으로 이동하고 있었을 겁니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다고?”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쉽지 않습니다. 심력 소모도 극심하고. 다만, 원하는 것을 구현하고 바라보는 능력을 배운 터라. 물론 항상 제대로 작동하는 건 아닙니다.”
상단전의 힘이다.
스승과의 대화만으로 이전보다 한층 높은 경지에 오른 그는, 실제 무공 단계의 상승보다 순수한 깨달음의 발전을 겪었다.
원리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스승이 자신의 황룡을 느꼈을 때처럼 같은 선상을 노니는 고수들에 대한 감각이 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연기를 수월하게 다루는 이들. 그런 이들에 한정한다면,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도 신기(神氣)의 조화로 알아챌 수 있음이라.
다만,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곧장 기운을 놓치곤 했다.
절대적인 능력을 주면서도 개인의 역량에 따라 순간순간에도 편차가 생길 수 있는 무공.
그것이 황룡신왕공이었다.
“감당키 힘든 초고수는 제가 붙잡아 둘 테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싸움을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