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2)
972화. 때가 오다 (2)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목덜미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에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야하륵이 연위를 노려보았다.
연위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불타오르는 호교신장의 감정을 단숨에 식혀 버릴 정도로 싸늘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오?”
“지금껏 그대에게 한 말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오?”
“…….”
“있는 그대로의 질문이오. 당신이 교주의 사람인지, 아니면 소교주의 사람인지 궁금하군.”
야하륵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
“내, 강호의 어둠을 나름대로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생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했소.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그 어둠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면 나 또한 시커멓게 변색될 거라고 생각했지.”
“…….”
“한데 그게 아니었소. 나는 그저 어설펐던 것이오. 그 어둠을 감당할 자신도, 줏대도 없었던 것뿐이외다.”
“…….”
“진짜들은 다르오. 신앙에 가까운 주관을 지닌 이들은 거리낌 없이 어둠으로 몸을 던져 광휘의 씨앗을 남기지.”
지금 연위가 떠올리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아들, 연호정이었다.
과거 언제인가? 신화교의 무장을 끔찍하게 난도질한 아들을 보며,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아들이, 더 이상 내가 아는 아들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손을 썼다가는, 먼 훗날 아들의 정신이 피폐해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실제로 그 당시의 연호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알았지만, 스스로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해 방황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막강한 무공에 정신적 성장까지 이룬 연호정은 피와 어둠에 몸을 던져도 말끔하게 씻고 돌아올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정작 그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은 연위 자신이었다.
사실, 그런 일을 벌이고도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무공 경지에 상관없이 온 천하를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당신도 그렇소. 당신은 나보다도 더 어둠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오.”
“…….”
“그러니 조금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도 그리 당황하고, 얼굴에 표가 다 나는 것이지.”
야하륵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댈 뻔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연위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서 술이나 마십시다.”
야하륵은 연위의 말에 당황했다.
분명 이 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장 손을 써도 무방할 터인데 술을 마시자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갈피를 못 잡던 야하륵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알고 있었소?”
“무엇을 말이오?”
“말장난하지 마시오. 알고 있었소?”
“진심으로 모르겠소. 다만, 당신이 뭔가 이상한 상태라는 것은 보자마자 알았지.”
“보자마자 알았다면 보기 전에도 뭔가 의심할 만한 것이 있었다는 뜻인데.”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까.
야하륵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담담하고 묵직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한편에 드리워진 미세한 긴장감을, 연위는 놓치지 않았다.
“처음 궁으로 들어오기 전, 신화교주의 막강한 힘에 가려졌지만 당신의 기도 역시 느낄 수 있었소.”
야하륵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궁으로 들어오고 나서가 아니라, 들어오기 전에 느꼈다는 말.
그냥 흘려 넘길 수 없는 발언이었다. 야하륵은 연위가 입궁하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매서운 검기(劍氣)를 느낄 수 있었다.
‘거짓말인가.’
거짓말이 아니다.
야하륵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위는 그런 일로 거짓을 입에 담을 자가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지. 하지만 어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신화교주의 기도가 흔들릴수록 점점 당신의 기도에 집중하게 되었소.”
“…….”
“왠지 모르게 불안정하더군.”
“불안정했다고?”
“기(氣)는 의념이고, 의념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사람의 마음이오. 그것은 어떤 고수라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요.”
“……!”
“내 이 경지에 오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드높은 경지에 오르고도 당신만큼 기가 흔들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소. 하물며 다친 것도 아닌데, 마치 바람 앞에 놓인 호롱불처럼 마구 흔들리더군.”
야하륵은 자신의 상태가 그랬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느낄 수 있었소. 당신 거처에서 피어오르는 사이한 화기(火氣)를.”
“……?!”
“그것은 당신도, 신화교주도 품고 있지 않은 괴이한 화기였소. 애초에 사람의 육신에 품을 만한 기운이 아니었지. 농도는 낮았지만, 정신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소.”
야하륵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걸…… 느꼈다고?”
연위가 느꼈다는 화기는 바로 화화술이 분명했다.
그토록 먼 거리에서 화화술의 기척을 느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기천웅의 상단전이 멀쩡했다고 한들, 영안을 완성시키지 않았다면 그조차 알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한데 그걸 대륙의 검사가 느꼈다는 것이다.
“거짓말!”
“당신이 그걸 믿든 안 믿든 상관없소. 기실,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지.”
연위의 말과 달리, 야하륵에게 있어 그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연위가 가능하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가능할 수 있다. 신화교의 무리(武理)로는 알 수 없는, 무림 특유의 공부가 존재한다면 앞으로 화화술은 제대로 펼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연위의 다음 말로, 야하륵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당신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았소?”
“……!”
“느껴지더군. 뭔가 대단한 각오를 했음이. 흔들리는 마음에 진기까지 흔들릴 정도의 각오를 품는 무극의 고수라…….”
우우웅.
야하륵의 몸에서 작은 공명음이 울렸다.
개방하지 않았지만, 연위는 벌써부터 뜨거운 화기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대단한 내공이었다. 만약 작정하고 기공을 개방한다면, 그 즉시 반경 십여 장에 가까운 땅이 무자비한 화기로 신음할 것이다.
연위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는 몰라도 일단 차분하게 술이나 한잔하십시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연위가 모를 리 없었다.
지금 연위는 야하륵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니 술이나 한잔하자고. 술 한잔하면서 진정하라고.
‘…….’
혼란스러움에 나다움을 잊고 있었지만, 야하륵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음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지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가만히 연위를 바라보던 야하륵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연위는 속으로 탄식했다.
“연가주.”
“말씀하시오.”
“당신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오.”
“…….”
“동시에 아주 멍청한 사람이오. 나였다면 뭔가 낌새를 눈치챈 동시에 기습했을 것이오.”
“마음을 돌릴 수는 없겠소?”
“생각해 줘서 고맙소.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이 나에게 일말의 호의가 있음을 알 수 있었소.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대해 주려 노력하진 않았겠지.”
“…….”
“물론 그 호의 역시 중원의 앞날을 위해서였겠지만.”
야하륵의 눈이 어전 방향을 향했다.
연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러지 마시오.”
“교주님께서 물러가시는구려.”
“…….”
“교주님께도 화정이 있소. 나는 그분께서, 어전에서 물러나 거처로 향하고 계시는 것이 느껴지오.”
“…….”
“물론 그분 역시 나를 느낄 수 있으시겠지. 그러나 내게서 어떠한 위화감을 느끼진 못하실 것이오.”
여기서부터 온 힘을 다해 달려가 황제를 죽이려 해도, 교주는 막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주어서 고맙소.”
“…….”
“그리고 미안하오. 대의를 위한 일이나, 이해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야하륵이 문득 연위의 몸을 살폈다.
“이상한 일이오. 당신의 능력은 분명 반선에 달한 그것이나, 무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군.”
연위는 말없이 야하륵을 바라보았다.
야하륵 역시 말을 멈추고 연위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퍼어어어엉!
일순간 뿜어져 나오는 장력이 연위의 몸을 오 장 너머로 날려 보냈다.
파아아아아악!
연위를 날려 보낸 야하륵이 화신비상(火神飛翔)의 신법을 펼쳤다.
‘오랜만이구나.’
땅을 박찬 순간 이미 몇 개의 건물을 지나 저 멀리 어전이 보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신법이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신법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음에도, 야하륵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이군.’
화신비상의 신법은 신화교에서도 단 세 명밖에 익히지 않은 초상승의 신법이었다.
그리고 이 신법은 바로 신화교주 기천웅이 그에게 직접 전수해 준 무공이었다.
‘이 신법을 이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쳐 본 건 처음이야.’
나아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한 번의 임무로 자신의 목숨은 날아가 버릴 테니까.
순식간에 어전 앞까지 도달한 야하륵의 눈에, 문득 궁전의 대문이 보였다.
‘…….’
아무도 없었다.
궁문을 지키는 수문위는 물론 시녀들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였다. 그는 단숨에 궁전 담을 넘었다.
그때였다.
‘……?’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야하륵은 자신의 몸이 덜컥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야하륵의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후우우우웅.
알 수 없는 힘에 포박당했지만, 야하륵의 힘으로 못 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전 안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스르륵.
강렬한 내공으로 족쇄를 푼 그가 어도 한가운데로 내려섰다.
그리고 그의 앞.
어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기천웅이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기천웅을 본 야하륵은 눈을 감았다.
“후우.”
술병을 놓은 기천웅이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술맛이 좋군.”
“…….”
“좋은 밤, 좋은 날씨다. 황제가 먹는 술이라 그런지 보통 명주가 아니야. 마음 같아선 몇 동이 가져다가 쌓아 두고 싶군.”
기천웅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쌓아 두고 싶어도 당장에 쌓아 둘 곳이 없구먼.”
“…….”
“이보게, 신장.”
“……교주님.”
“왜 그리 멀뚱히 서 있는가?”
야하륵이 천천히 눈을 떴다.
높은 계단 중간에 앉아 자신을 굽어보는 기천웅의 자태는 언제나 봐 왔던 것처럼 기품과 위엄이 넘쳤다.
기천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올라와서 나와 술 한잔할 텐가?”
“…….”
“왜 말이 없는가?”
“교주님.”
“그러고 보니 내게 달리 예를 취하지도 않는구먼.”
기천웅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야하륵을 바라보았다.
야하륵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힘이 빠진 눈으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기천웅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언제부터 알고 계셨는지요?”
담담했던 기천웅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서늘해졌다.
야하륵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살벌한 표정이었다. 야하륵은 교주의 그런 얼굴을 자신이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였다.
끼이이익.
궁문이 열렸다.
산뜻하면서도 무거운 발걸음.
야하륵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제국검을 품에 안은 연위가 담담한 기색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습으로 날린 장력에 맞았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는 듯했다. 급하게 날렸다고는 하나 초절정고수라도 피를 토할 위력이었을진대, 소매가 조금 그을린 것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연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승에서 마실 수 있었던 그 술, 저승으로 가는 삼도천 물가에 고이 뿌려 드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