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3)
973화. 때가 오다 (3)
이 심경을 말로든 글로든 표현할 수가 있을까.
야하륵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났구나.’
앞에는 신화교주, 뒤에는 연가주.
앞에는 천상에 올랐다가 떨어진 반쪽짜리 화신(火神)이 있고, 뒤에는 땅 밑을 전전하다가 하늘로 날아오른 검신(劍神)이 있다.
당장 연위만 해도 승패를 장담키 힘든 고수였다. 거기에 주군으로, 아니 신으로 모셨던 기천웅까지 있으니 자신의 작전은 실패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뜻밖의 후련함을 느낀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죽음도 목표를 이룬 이후에야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왜 이리 차분해졌을까? 왜 후련하고 안심이 되는 것일까?
“엇나갔구먼.”
야하륵이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양 무릎에 팔을 걸친 기천웅의 모습은 웅크린 화룡을 보는 것 같았다.
“연가주가 분명 자네에게 마지막 선택권을 주었을 텐데.”
“……역시.”
야하륵이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의미의 미소인지는, 마주 보고 있는 기천웅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몰랐지.”
기천웅은 솔직했다.
“상단전이 무너지고 영안의 뿌리마저 상실한 지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임과 동시에 능동적이지 못한 화포 병기나 다를 바 없네. 누군가가 방향을 가리켜 줘야 쏠 수 있지.”
“…….”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안타까워할지언정 현실을 외면한 적은 없네. 눈먼 봉사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의 눈이 되어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기천웅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야하륵은 신처럼 떠받들었던 인간의 눈빛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대였지.”
“…….”
“그러나 정작 내 눈이 되어 줄 줄 알았던 사람은 주인이 봉사가 된 틈을 타 강도질을 하려 들고, 거래를 위해 찾아간 장사치 쪽에서 내 눈이 되어 주었군.”
야하륵이 심상치 않은 상태라는 것을 기천웅에게 알려 준 사람은 바로 연위였다.
다만 그때까지는 연위 역시 야하륵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당연했다. 알고자 하면 다 알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누구의 손에도 쥐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대비는 할 수 있었고, 연위는 곧장 기천웅에게 그 말을 전했다.
처음 기천웅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직접 야하륵과 대화를 나눠 보겠다고 했다.
그것을 거부한 것은 황제였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이미 마음을 다잡고 온 길이라면 그것이 어떤 일인지 알아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저 주시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야하륵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마주한 자리에서도 참과 거짓을 구분치 못할 만큼 기천웅의 눈치가 없지는 않다.
다만, 야하륵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이는 기천웅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원 전체의 문제와 직결될 수 있으니 두고 보자는 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
그간의 사정을 몰랐던 야하륵은 연위의 꼬임에 넘어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렇군요.”
“자네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사람일세.”
“…….”
“만약 내가 자네를 불러 독대했다면, 자네에게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챘을 것이야.”
“그러시겠지요.”
“자네를 두고 본 것에는 여러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네. 하지만 그것은 황제의 생각일 뿐, 저기 연가주가 자네를 지켜보자고 한 이유는 달랐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이는 자네에게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네. 나를 위해 참고 다른 선택지를 제공해 준 것이지.”
야하륵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호의 판관검이라 불리는 절대검객. 이전까지는 유하게 대했을지언정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그는 그 별호처럼 엄중한 판관이 되어 하나의 목표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만반의 준비가 완료된 상태. 남은 것은 기천웅과 야하륵의 마지막 대화뿐이다.
“왜 그랬나.”
“…….”
“나를 속인 이유가 무엇인가?”
“…….”
“내 목적을 알고서도 따라온 것은, 나를 따르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대의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나?”
야하륵의 눈이 벼락처럼 반짝였다.
“대의라고 하셨습니까?”
“…….”
“그렇습니다. 대의였습니다.”
“무슨 대의를 말함인가?”
“신화교가 신화교답게 천하를 석권하는 대의 말입니다.”
천하라는 말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
“신화교는 불입니다. 화염이고 염화입니다. 부덕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정화해 줄 수 있는 신의 화염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교리는 그러하지.”
“교리 정도가 아닙니다. 교주님께서는 정녕 이 세상이, 천하가 불길 조금 일으켜서 본 생태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고 보십니까?”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썩었습니다. 그 무엇도 증명하지 못하며, 그 무엇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 북해(北海)만이 아니라 남대륙은 물론 천하 어디도 같습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우리의 주적인 남대륙의 무림입니다. 그리고 그 무림은 어느 순간 황제의 명예를 되살려 천하 안위를 바로 세우려고 했지요.”
“천하 안위를 바로 세운다는 자네 말이,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과 반대되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야하륵의 말은 확정적이었다.
“이 세상은 미쳤습니다. 어느 하나의 명확한 이치가 생겨나도 그 이치를 따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해도 그저 그 말이 전부인 줄 알고 홀린 듯 침을 흘리는 자들만이 가득한 세상이 아닙니까!”
화아악!
야하륵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계단에 걸터앉은 기천웅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의 강렬함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연위는 이 기운의 밀도만으로 작은 숲을 활화산처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엄청난 화기의 파도.
연위가 떨리는 눈으로 기천웅을 볼 때, 그는 애써 흔들림 없는 눈으로 야하륵을 노려보았다.
“어느 하나의 이치가 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 작용한다고 보는가?”
“적어도 그간 교주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신 이유를 생각하면, 제가 행할 무언가가 훨씬 더 가치 있을 수 있겠지요.”
야하륵의 발언은 공격적이었다.
이미 죽음을 무릅썼기 때문일까? 야하륵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신화교는 썩었습니다.”
“…….”
“소교주의 만행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신화교는 그 어떤 목표도 없이 그 자리를 배회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주님께서 폐관에 드신 이후, 강자들은 약자를 잡아먹으며 힘을 불리는 데에만 전념하기 시작했지요.”
그 말에서 기천웅은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야하륵이 불을 뿜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러한 상황은, 세상은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더 강한 자가 더 높은 권력을 얻는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소교주는 자신의 정치력으로 이 상황을 제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이었지요.”
“그래서 황제를 죽이겠다고?”
기천웅의 발언은 화살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네놈이 한 말이, 네가 앞으로 저지르려는 일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
“교주님!”
“황제가 죽으면 이 세상이 올바르게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면 대체 왜 황제를 죽이려 하나?”
황제 시해.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단어의 조합이 처음으로 기천웅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야하륵은 그 진실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거짓으로 얼룩지게 만들지 않았다.
“황제가 죽으면 대륙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
“그때부터는 전략 전술이 필요치 않지요. 황제의 죽음은 곧 대륙의 멸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걸 원했는가?”
“제가 원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화르륵!
야하륵의 두 주먹에서 무시무시한 불길이 치솟았다. 신화교 최강의 권공, 화룡강신권(火龍降神拳)이었다.
그리고 그 화룡강신권은 기천웅의 진신절기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불태워 증발시킨 후, 그 자리에 신성하기 그지없는 신화교의 씨앗을 심는 것.”
“그래서 황제를 죽이려 했다?”
“그렇습니다!”
어떤 단어로도 설득할 수 없음을 느꼈을까?
야하륵이 버럭 소리쳤다.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망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 상황이 되어야만 하고, 모든 것이 불살라져 마땅한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
“교주님이든 소교주든 상관없습니다! 광혈교가 끼든 사음교가 끼든, 그조차도 상관없지요. 차라리 다른 세력의 앞잡이가 될 바에야, 모든 것을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화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 백만 배는 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야하륵은 뒤가 없는 것처럼 소리쳤다.
분노, 혹은 광기에 사로잡혀 외치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얼굴을 보는 연위는 그가 생각보다 격양되어 있지 않음을 느꼈다.
‘왜지?’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의 주군이었던 신화교주 기천웅을 상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쏟아 내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어찌하여 저자의 목소리에는 후련함 이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영안을 잃었다 해도 평생 열양공을 연마하며 신화교에서 살아온 기천웅이, 소리치는 야하륵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죽고 싶은가?”
“예! 죽이십시오! 그것이 교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
기천웅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오히려 자네가 원하는 것 같은데.”
“……!”
“지금까지 자네가 했던 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지?”
“…….”
“그저 상대방이 대의를 이해해 줄 것 같지 않기에 마구 내뱉은 말에 불과하지?”
야하륵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참으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올바르다는 연위조차도 야하륵처럼 일희일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야하륵을 노려보던 기천웅이 툭 던지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접을 수는 없나?”
“…….”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인가?”
그때였다.
차아아앙!
화려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연위의 제국검이 뽑혔다.
천라제국검.
이 시대, 이 나라의 황제가 무인에게 선사한 최초이자 마지막 명검.
연위가 야하륵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기회는 이미 사라졌소. 남은 것은 당신을 치죄하는 일뿐이오.”
“…….”
“마지막 할 말이 있소?”
야하륵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연위의 눈빛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올곧았다.
“할 말은 없지만, 그대 같은 고수와 시원하게 싸워 보고 싶소이다.”
“미안하오.”
연위가 검을 내렸다.
“그것은 불가능하오.”
“내가 죄인이라 그렇소?”
“이미 그대를 베어서 그렇소.”
“……?”
그게 무슨 말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야하륵은 순간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베인 것이 아니라, 시야만 딱 골라서 어지러워졌다. 귀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는 야하륵.
연위가 그의 목덜미에 검을 가져다 댔다.
“그대가 포기한 그 마음을, 이 내가 한 번 더 베었소.”
“……!”
“훗날 가서 술 한잔 사리다.”
연위가 시원하게 검을 당겼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