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5)
975화. 때가 오다 (5)
번쩍!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빛이 돌변한 것을 본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원 전투 준비.”
제각기 휴식을 취하던 맹주 후보들도, 창룡단과 대룡단의 무사들도 눈빛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상아가 물었다.
“적이 온 건가요?”
모용우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북서쪽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군요. 예상대로입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 정도 고수와의 싸움에서 전략 전술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싸워 이길 뿐이지요.”
“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이길래?”
“중원 무맥과 워낙 다르게 발전해 온 터라 이 정도 수준이다, 하고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보는 것과 느끼는 것도 다르지요.”
“음.”
“다만 굳이 수준을 논하자면.”
슥.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언제나, 누가 봐도 기가 질리는 크기를 한 일세의 거병이 희미한 광택을 발했다.
“삼군 이상, 신선제왕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모용우는 물론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간 침묵했던 남궁표가 입을 열었다.
“소뢰음사에 그만한 고수가 있다고?”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소. 어디에 어떤 고수가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당장 신마림의 대공자가 무극에 오른 마인이었을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소.”
“……!”
남궁표가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에 고수는 많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막연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고수들이 줄줄이 등장하면, 그 충격은 굉장했다. 당장 무림의 미래를 짊어질 천재들이라고 칭송받은 사람만도 몇 명인데, 정작 껍질을 까 보면 그런 천재들을 웃도는 괴물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눈앞의 연호정만 해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도검의 제왕들과 싸워서 박빙을 이룰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놀라운 일이지만, 또 이상한 일은 아니지.”
모용우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자신의 재능, 자신의 위치,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명확히 아는 자의 목소리였다.
“연제가 말했던 것처럼, 삼교가 소뢰음사를 장악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는 것은 소탕하려 드는 순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야. 이는 곧 소뢰음사의 병력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맞습니다.”
“당장 소림에도 권신 노선배와 맹주님이 계시네. 소림이 제힘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무극에 이른 고수가 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누구도 확신하지 못해. 우리 세상도 그러한데, 저쪽 세상이라고 다를 바는 없을 것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못 본 사이에 더 똑똑해지셨습니다.”
“이놈아, 밥을 먹어도 너보다 한 끼는 더 먹었을 텐데 네 발치는 따라가야 할 것 아니더냐.”
“그렇게 띄워 주셔도 저는 달리 해 드릴 게 없어요.”
“됐다.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부담스러울 지경이야.”
모용우의 얼굴에 서서히 긴장이 어렸다.
“하면, 소뢰음사의 수장이 직접 온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요.”
“음.”
“다만 포교 및 사전 답사를 위해 오는 길이니 이 또한 중차대한 일이라 할 수 있을 터. 만약 저들이 승리하면 소뢰음사 역시 중원 땅 일부를 차지할 것이고, 그 땅에서 소뢰의 요승들을 관리할 믿음직한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일을 맡길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부모 형제에 준하는 신뢰를 지닌 자. 나아가 저만한 고수가 당대에 흔치는 않을 터이니, 칩거한 전대 고수를 불러낸 모양입니다.”
“전대를 불렀다…… 사활을 걸었군.”
“조직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합니다. 물론 직접 보기 전까지 확신할 수는 없지요.”
연호정이 천천히 어깨를 돌렸다. 그 무거운 광룡부를 들고도 어깨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나뭇가지를 든 것처럼 보였다.
“달리 말하자면, 조직의 사활을 건 저들마저 물리치면 당분간 소뢰음사는 감히 병력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 하게 된다는 것이로구나.”
“아마도 그렇겠지요.”
“생각보다 훨씬 더 거창한 싸움이 되어 버렸군.”
“이제 그것을 확인해 보면 되겠지요.”
잠시 후.
히히히힝!
말들을 이끌고 절벽 밑으로 내려온 무림맹 병력. 소뢰음사의 병력과 이백 장 거리를 두고 진을 친 그들의 기세는 삼엄하고 흉흉했다.
병력의 선두에는 모용우와 제갈준이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몇 차례 싸움에서 준수한 활약을 벌였다. 무력으로는 모용우와 오구문이 쌍벽을 이루었으나, 병력을 부리는 데에는 두 사람의 능력이 우선시되어야만 했다.
그들의 능력은 자존심 강한 후기지수들이 인정할 정도로 특별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용우 역시, 자신을 보는 남들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기세가 만만치 않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갈준의 눈이 깊어졌다.
“우리 역시 체력을 회복했지만, 저쪽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사기가 올랐어.”
“그렇습니다.”
“소뢰음사의 절대고수가 참전했으니 패배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강력한 신앙심에 무적의 고수가 함께하니 사기가 오를 만도 하지.”
그때, 팽대호가 말했다.
“가짜 사기요.”
“음?”
“저들의 사기는 대단하긴 하지만, 어딘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오.”
사람들이 놀라서 팽대호를 바라보았다.
팽대호의 눈은 형형했다. 적에게 완전히 집중한 그의 모습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신중하고도 날카로워 보였다.
“불처럼 강하지만 한번 꺾이면 수습이 안 되는 종류의 사기 같소. 신앙이고 뭐고 다 좋긴 한데, 자신들의 힘만으로 우리를 이기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군.”
당상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것도 알 수 있나요?”
“안다고 하긴 그렇고, 그냥 그렇게 짐작하고 있소.”
“대단하네요.”
“대단한 거 아니오. 아버지한테 허구한 날 뼈가 부러지도록 얻어터지다 보니, 한 번씩 이번 승부는 조금 힘 빼도 되겠구나 싶더라고. 한데 그걸 아버지는 귀신처럼 알고 더 패더군.”
“…….”
“어떻게 그런 걸 알까, 하고 고민하다 보니 기세의 질을 파악하는 눈이 길러지더구만.”
표정을 보면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참으로 황당하고도 신기한 방법으로 놀라운 능력을 개발했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당상아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남궁표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사기라도 한번 무너지면 다시 불붙기 어렵소.”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적의 상태를 아는 것은 좋지만, 사기 한번 꺾었다고 방심해서는 안 될 일이지.”
팽대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만에 하나 적이 쉽게 꺾이더라도 다른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두고 싶었을 뿐이오. 애초에 불붙은 사기를 꺾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변함은 없소.”
“정확하오.”
서로가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무인으로서의 완성과도 거리가 있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연마 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어느새 그들 역시 크게 성장했다. 이는 무공의 성장보다도 더 귀한 경험으로, 훗날 그들이 거친 강호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크나큰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무림맹 병력이 전투 준비에 열을 올리던 와중이었다.
훅!
소뢰음사 병력 측에서 이질적인 기세가 피어올랐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왔군.”
땅이 미세하게 울렸다.
오백 병력이 좌우로 길을 트자, 그 너머에서 한 명의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백 장이나 떨어진 거리지만, 모용우는 상대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노인?’
구불거리는 회색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승이었다.
굵고 긴 수염을 두 갈래로 땋았는데, 끝에는 금빛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그 장신구까지 세밀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보통 보물이 아닌 듯했다.
노승의 체구는 작았고, 입은 가사도 헐렁했다.
목에는 크고 작은 염주 세 개를 걸치고 있었는데, 워낙 마른 몸이라 목에 부담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왼손은 기괴한 지인(智印)을 맺고 있고, 오른손은 뒷짐을 졌다. 주름이 많아서 적게 잡아도 칠십은 넘어 보이는 외양이었다.
뚝. 뚝.
고삐를 쥔 모용우의 손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강하다.’
기세만 느꼈을 때도 너무 이질적이라 긴장했는데, 막상 실체를 확인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엄청난 강자야. 연제의 말이 맞았다. 마치 검제나 도제 어르신을 봤을 때와 비슷해.’
사실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익히고 있는 무공 때문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사기(邪氣)가 대단해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저릿해질 정도였다.
무려 이백 장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그뿐만이 아니다.’
늙은 요승 뒤, 유독 검붉은 가사를 입은 중년승 일곱 명이 보였다. 요승의 기도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들 역시 상당한 고수인 듯했다.
한 명, 한 명의 기세도 대단했지만, 한데 모여서 더 강한 힘을 내는 이들이다. 제자나 수족처럼 부리는 직속 수하들임이 분명했다.
‘이거 만만치가 않은데.’
오백 병력과 붙는 것만으로도 사상자가 꽤 나올 텐데, 저만한 고수들 일곱이 참전했다면 싸움이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방법은 없다. 부딪쳐 승리할 뿐. 어떠한 전략 전술도 필요 없는 시점이니, 남은 것은 서로의 힘을 겨루는 것뿐이다.’
모용우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무림맹 병력 역시 좌우로 길을 열었다.
치리링!
낯선 듯하면서도 왠지 익숙한 쇠사슬 소리.
광룡부의 창대 끝에 교룡쇄를 묶은 연호정이 산뜻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모용우는 연호정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는 필요치 않은 듯하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쪽은 입이 근질거리는 듯한데.”
기다렸다는 듯 요승의 입이 열렸다.
“빈승은 소뢰음사의 나각뢰(那覺雷)라 한다.”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킨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림맹 무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진동이 내공까지 닿고 있었다.
요승, 나각뢰가 말을 이었다.
“긴말 안 하겠다. 동대륙의 무사들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라. 불필요한 싸움이라는 건 그대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피를 볼 요량이라면…….”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자신 있었으면 그냥 달려와 덤볐을 놈이 어디서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놀리고 지랄이야.”
화아아악!
연호정의 목소리는 나각뢰보다도 강렬했고, 그보다 훨씬 더 거센 힘을 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황룡기를 담아 일갈하는 연호정. 그 신공(神功)의 힘이 나각뢰의 요기(妖氣)를 분쇄하고 무림맹 무사들의 긴장을 확 풀어 냈다.
나각뢰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어차피 뒈질 텐데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시게, 이 장작개비야.”
“뭐라?”
“그래도 알고 싶다면, 좋다. 알려 주지.”
쿠르르릉!
연호정의 발밑에서 소용돌이치던 황금빛 기운이 단숨에 승천하는 용으로 화했다.
“사신무의 이십육 대 계승자, 당대의 사신무장 연호정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