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9)
979화. 공백을 만들다 (4)
주르륵.
입가를 훔치는 연호정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역시 그냥 당해 주진 않는군.’
연호정은 옆구리를 더듬었다.
양팔을 잡고 박치기를 해 버렸지만, 쓰러지는 가운데 암장(暗掌)을 날렸다. 피하면 쓰러트릴 수 없어 어떻게든 참고 갈겨 버렸다.
‘시큰시큰하군.’
내부로 침투한 사이한 공력이 혈도 일곱 곳을 노리며 마구 날뛰었다.
황룡기로 제압하는 게 반 박자 느렸다. 몰아내고 있긴 하지만, 침투경을 완전히 증발시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연호정은 쓰러진 나각뢰를 내려다보았다.
‘허무하군.’
박치기라는 게 일견 야만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당장 소림사에도 진지하게 철두공(鐵頭功)을 판 무공이 있다.
물론 박치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으나, 황룡기를 극한까지 담아 후려쳤다. 사실상 나각뢰의 얼굴이 날아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부수겠다는 일념으로 내리치긴 했지만…… 응?’
연호정은 문득 자신의 깨달음을 돌이켜보았다.
황룡신왕공을 깨친 후, 자신의 무공이 이제는 상단전에 기반을 둔다는 걸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두뇌, 상상력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생명까지 끌어다 쓸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인즉, 신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와 강력한 믿음이 있다면 내부로 침투한 암경도 단숨에 뽑아낼 수 있다는 뜻.
‘익숙함에 젖어 내가 가지고 있던 걸 활용하지 못한다…… 아직도 그러는군. 나는 멀었어.’
크게 숨을 들이쉰 연호정이 의념에 집중했다.
‘나가라.’
꿈틀.
혈도를 찌르고 들어온 암경이 주춤했다.
연호정이 눈을 부릅떴다.
‘나가!’
화아아악!
파도처럼 밀려든 황룡기가 나각뢰의 암경을 모조리 증발시켜 버렸다.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연호정의 얼굴은 밝았다. 무공 구현만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에 작용하는 어떤 요소도 마음먹기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연호정은 땅에 떨어진 광룡부를 들어 나각뢰를 겨누었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쓰러진 상대를 앞에 두고 잘 가라느니, 나쁜 놈이느니 떠들 까닭이 없다.
연호정은 평소처럼 냉정하게 상대를 죽이는 데에 집중했다.
그가 힘차게 광룡부를 휘둘렀다.
쩌엉! 콰득!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나각뢰의 몸 주변 땅에 실금이 번졌다.
하지만 나각뢰는 죽지 않았다. 놀랍게도 양팔을 들어 광룡부를 막았는데, 막은 방식이 기가 막혔다.
혈공신주가 꿰어져 있던 강철의 실, 염주 실로 광룡부의 두꺼운 도끼날을 막은 것이다.
‘언제?!’
상대가 정신을 차린 것도 몰랐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적은 있어도, 보고 있는데도 상대의 상태를 읽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할 새가 없었다. 이 정도 고수와의 싸움에서 당황해 시기를 놓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연호정의 수는 단순했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 전체가 금빛으로 가득해졌다. 마치 본래부터 황금빛 피부를 타고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콰득!
나각뢰의 몸이 더 깊게 땅으로 파고들었다.
달리 다른 수가 필요치 않다. 연호정의 선택은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갈라 버리는 것이었다.
‘이익!’
나각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박치기 한 방에 정신을 잃었지만, 동시에 벼락처럼 정신을 차렸다.
혈불대염력은 악불을 향한 강력한 신앙심이 바탕이 되어야 익힐 수 있다.
신앙심 역시 크게 보면 상단전의 영역이고, 자연히 그의 상단전은 어떤 고수 못지않게 비대했다. 그 신앙이, 위기의식이 단번에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붉은 구슬들이 둥실 떠올랐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혈승이란 놈과 싸울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저 구슬들, 아주 쓸모가 있어 보이는군.”
순간 나각뢰의 눈이 흔들렸다.
“네놈! 내 사제를 아느냐?!”
“반쯤 작살이 나고 도주했지. 그놈도 너와 비슷한 무공을 썼더랬다.”
“이놈!”
“다른 건 몰라도 네놈의 저 암기는 탐이 나는군. 잘 써 주마.”
“닥쳐라!”
후웅!
연호정의 허리가 살짝 뒤로 꺾였다.
늙은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팔십이 근 광룡부를 염주 실로 밀어 내는 괴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각뢰의 허리가 반쯤 땅에서 떨어진 순간.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콰아아앙!
염주 실이 반듯하게 잘려 나가고, 거대한 도끼날이 맨땅에 박혔다.
연호정이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떠 있던 틈을 이용해 벼락처럼 몸을 날렸지만, 도끼날에 왼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하지만 나각뢰의 표정은 밝았다.
“끝이다.”
어느새 혈공신주의 전권 밖으로 나간 그였다.
서서히 영역을 줄인 백팔 개의 혈공신주는 연호정의 일 장 거리 안쪽에 몰려 있었다. 말하자면 주변 전체가 혈공신주로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나각뢰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심하지 않은 것 같더니, 기어이 방심하고야 마는구나.”
“…….”
“그래도 너만 한 강적은 오랜만이었다. 비록 팔 하나를 잃었지만, 승리의 과실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 그 정도로 너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니 응당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
“혈승…… 사제와 어디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 말마따나 내 사제를 짓눌렀다면 그 빚은 사형이 갚아 줘야지.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으니, 내 기억에 연호정이라는 난적은 죽을 때까지 기록될 것이다.”
“그런가.”
나각뢰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호정의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 담담했던 것이다.
‘포기했나.’
고수들 간의 승부에선 자세 한번 흐트러진 것만으로도, 불어오는 바람에 움찔하고 몸이 경직된 것만으로도 빈틈이 생겨 패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변수도 통용되지 않는 확실한 우위가 나뉘는 경우는 없는 것인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렇다.
백여덟 개의 혈공신주는 저마다 보이지 않는 진기로 이어져 있었다. 구슬과 구슬 사이에 큼직한 틈이 있지만, 그 사이로 빠져나가려 하는 순간 모든 구슬이 연호정의 몸통을 꿰뚫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죽고 움직여도 죽는다. 생사여탈 자체가 나각뢰에게 있는 것이다.
한데 왜일까?
연호정의 표정을 보며, 나각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수가 있는 것인가.’
그때,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 기억, 이제 곧 끝나겠군. 네놈은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허?”
“그런데 이 구슬, 언제 내게 쏘아 낼 건가?”
“……오만하구나.”
나각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그와 같은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일이지. 마지막 가는 길, 추하게 애걸복걸하지 않았으니 고통 없이 보내 주마.”
퍽!
‘응?’
말을 끝마친 나각뢰는 난데없는 통증에 제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뭔가가 삐죽 나와 있었다.
‘돌?’
날카롭게 부서진 돌이었다. 거의 단검 수준이었는데, 싸움 중에 부서진 땅에서 튀어나온 돌인 듯했다.
‘근데 이 돌이 왜?’
그때였다.
파지지지지지직!!
백여덟 개의 혈공신주가 부르르 떨렸다.
혈불대염력, 무형의 진기가 가로지르던 허공에 수많은 번갯불이 튀기 시작했다.
“쿨럭!”
복부를 잡은 나각뢰가 비틀거렸다. 신장을 찌르고 들어온 돌은 장을 지나 배꼽 옆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내공 운용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차라리 면적이 좁은 칼이라면 모를까,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보다 굵은 돌이 튀어나오지 않았나.
그리고 그 틈을 노린 연호정이, 허공에 뜬 백여덟 개의 혈공신주에 내력을 침투시킨 것이다.
불안정한 혈불대염력은 황룡기를 이기지 못하고 튀어 나갔으며, 결국 대부분의 혈공신주는 연호정의 황룡기로 장악되었다.
나각뢰가 몽롱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광룡부를 들지 않은 손을 중단까지 든 그의 모습.
강탈당한 혈공신주들이 그의 몸 주변을 서서히 돌고 있었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방심? 누가 방심을 한다더냐?”
“…….”
“오랜 실전의 부재 때문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늙은이의 성정 자체가 떠벌리기 좋아하는 것 같군. 이 늙은이야, 확실하게 죽인 게 아니면 방심하지 말아야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나처럼.”
“커헉!”
나각뢰가 무릎을 꿇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꺼운 돌멩이에 복부가 뚫렸다지만, 바다와도 같은 내공을 지닌 자신이 척추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이리 무력하게 쓰러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왜?!’
그때, 나각뢰는 느꼈다.
이미 단전 주변의 혈도가 온통 파괴되어 있음을.
‘……!!’
혈도가 파괴된 것도 놀라웠지만, 혈도를 파괴한 암경의 방식이 더 놀라웠다.
돌멩이에 실린 암경이 뱀처럼 파고들어 주요 혈도를 파괴하는 이 방식. 세상에 여러 침투경이 있다지만, 대혈(大穴)과 소혈(小穴)을 연달아 파괴하는 이 침투경은 오직 하나뿐이다.
“아, 악심장(惡心掌)?!”
“그게 악심장이라는 무공이었나? 그것참, 네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무공명을 그따위로 짓는 거냐? 뭐, 본인들이 악을 추구하겠다고 당당하게 공표하는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호쾌해서 좋다만.”
“네놈이 어떻게?!”
“배웠다.”
연호정이 자신의 옆구리를 힐끔거렸다.
“쓰러지기 전 네놈이 한 방 먹여 줬잖느냐. 그때 배웠다.”
“마,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는 건 목숨을 건 승부에서 섣불리 승리를 확신한 네놈의 정신머리지. 그런 성정으로 용케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서장 무림은 꽤 평화로웠나 보지?”
나각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연호정의 말에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다시 한번 경악했기 때문이었다.
위이이이잉!!
백여덟 개의 혈공신주가 제자리에서 고속으로 회전했다.
대기를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속도. 나각뢰의 손에서 펼쳐졌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무려 백여덟 개의 구슬을 한 번에 회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나각뢰를 경악게 했다.
“백팔혈영탄(百八血影彈)까지……?!”
“다시 쓸 일은 없을 거다. 나와는 맞지 않는 무공이야. 다만 이 구슬들 하나하나는 보물이니, 잘 녹여서 좋은 곳에다가 쓰겠다.”
눈알의 핏줄이 툭 터졌다.
피눈물을 쏟아 내며, 나각뢰가 버럭 외쳤다.
“이노옴!!”
“잘 가라.”
퍼버버버버버벅!!
백여덟 개의 구슬에 난자가 된 나각뢰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언뜻 허무해 보이는 승부였지만, 연호정 역시 이토록 섬세한 기공술을 동반한 승부는 처음이었다. 치고받는 걸 넘어 상대의 내공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침투시키고 조종하는 것까지, 나각뢰의 무공 초식보다도 훨씬 더 큰 배움이었다.
주르륵.
연호정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상단전을 너무 과하게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코피를 닦은 연호정은 혈공신주를 회수한 후 몸을 돌렸다.
우우웅.
잠시 몸을 점검한 연호정이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끝나 가는군.’
적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반면 무림맹 병력의 사기는 더 오르지 못할 곳까지 올라 거대한 화염처럼 넘실거렸다.
파아아앙!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한 명이라도 더 다치지 않게 남은 적이라도 맡아 줄 생각이었다.
연호정이 떠난 싸움터.
열 개도 남지 않은 살점의 흔적이, 한때 서장 무림의 절대자가 중원에 왔음을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