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0)
980화. 공백을 만들다 (5)
연호정이 전장 근처에 도달했을 때, 이미 싸움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 싶어서 빠르게 왔건만, 막상 와 보니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무림맹 병력이 소뢰음사 병력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팽대호 말이 맞군.’
소뢰음사는 중원에 나각뢰와 맞상대할 고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사기가 뒤흔들릴 지경인데, 병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나각뢰는 오지 않았다.
나아가 적들의 파상공세는 효율적이고 막강하여 막을 방도가 없었다.
소뢰음사 최고수의 부재, 한 차례 꺾인 사기.
그걸로 승부는 끝이었다. 그렇다고 다 연호정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맹주 후보생들과 두 전투 부대의 공격력이 너무나도 빼어났다.
‘좋아.’
아군 사상자가 얼마나 나는가의 문제일 뿐, 애초에 무림맹 병력에게 이 싸움은 승리를 전제로 한 전투였다.
문득 연호정의 시선이 당상아에게 닿았다.
촤라라락!
신들린 듯한 움직임.
‘놀라워.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저 정도 무공이라면 묵비에 준하는 수준이다.
특히 저 빠르고 유려한 몸놀림은 무극에 오르기 전 당관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손에 쥔 붉은 비수에 독기를 담아 휘두르는데, 마치 사람 탈을 쓴 나찰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눈에 보이는 먹잇감들을 해체하는 것 같았다.
엄청난 살법이었다. 당가의 무공 같긴 한데, 당상아 본인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했다.
‘초일류의 무공이다. 당상아도 그렇지만 무공 자체가 뛰어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길어도 이십 년 안에 당가 역사상 최고의 여고수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어.’
연호정의 눈이 맹주 후보생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당장에 눈에 띄는 것은 오구문이었다. 스승인 도제 종리백이 연호정과 비무를 벌였을 당시 구사했던 무공을 단호하고 직관적으로 풀어 내는데, 그 호쾌함이 보는 이마저 설레게 할 정도였다.
‘참혼교도…… 대성은 진즉에 이뤘어. 남은 건 깨달음뿐이군. 저렇게나 공격적인 성향인 줄은 몰랐는데.’
다음은 남궁표.
‘좋아. 나쁘지 않아. 전장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공(功)을 세우는 것보다 지키기 위한 싸움이군.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그는 당상아, 오구문 두 사람보다도 더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연호정은 남궁표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의 자신감이 과하여 자만심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개인의 성품 이전에, 시쳇말로 저 잘난 맛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더 많은 적을 잡아 공을 세우려 하지 않고 아군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점이 놀라웠다.
‘노선배께서 가르침을 안겨 주셨는가.’
검제 남궁승은 그가 봐 왔던 남궁씨들과 전혀 다른 인품을 지닌 진짜 검객이었다.
하지만 만인이 추앙하는 검제라도 손주를 정신 차리게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남궁표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한번 머리가 굳어진 사람이 그간의 껍질을 벗고 변화를 맞이하기란 고급 무공을 대성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든 남궁승의 가르침이 확실했든, 지금의 남궁표는 한 명의 어엿한 정파 무림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남궁표의 모습을 보며, 문득 연호정은 깨달았다.
자신도 바뀌었음을.
스스로의 가능성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타인을 질투하기만 바빴던 그는 가문이 무너지고 세상에 나가 스승을 만났고, 이후 흑도에 투신해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믿었다. 애초에 그만한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평생 패배감에 젖어 그저 그런 사람으로 죽었을 테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남궁표의 변화는 이변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평생을 천재라 떠받들어지며 아버지와 가인들의 기대를 받아 성장한 화초였으니까.
더하여 못난 동생이라도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모욕을 줄 정도였으니, 빈말로도 성정이 좋다는 소리를 듣긴 힘들었다.
그런 그가, 아군을 위해 욕심을 버리고 저리도 아름다운 검결을 뿜어내고 있다니.
‘모용군도 그랬던 것일까.’
모용군이 어떤 계기로 마음을 돌려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변했다는 것이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기대되는 만남이었다.
마지막으로.
‘형님.’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당상아와 오구문은 돌격대장처럼 나아가 적을 몰아치고, 제갈준은 그 뒤에 서서 전방을 조율하며, 팽대호와 남궁표는 공격을 감행하면서도 수비에 치중해 있다.
대룡단과 창룡단은 각 조직에 맞는 진법을 구사하며 적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만 보면 마치 띄엄띄엄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토록 허술해 보이는 전술로 소뢰음사의 요승들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는 대장으로서 모용우의 병력 운용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정말 대단해.’
직접 전방으로 뛰어나가 적을 죽이기도 하고, 귀신처럼 후방으로 물러나 수비진에 가세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전장 전체를 시야에 두고 있어, 취약한 지점이 생기기도 전에 명령을 내려 전술의 구멍을 막아 내고 있었다.
전장 속에서 공격적으로 전술을 이끄는 사람은 제갈준이지만, 전체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모용우였다.
그야말로 대장군이라는 칭호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이 많은 병력을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서운 능력이었다.
‘허술해 보이지만, 실상 지극히 뛰어난 형태다. 형님의 압도적인 전술안 아래 어떤 진법보다도 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어.’
말하자면 모용우 한 명의 존재로 인해 저토록 자유분방한 진형이 가능하다는 것.
모용우가 없었다면 더 각이 지고 탄탄한 진형을 갖춰 돌격해야 했을 것이다. 정면으로 부딪쳤을 테니 당연히 사상자도 많이 나왔을 것이다.
‘놀랍구나.’
모용우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모용우에 관한 것은 전 무림에서 모용군과 함께 제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이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라면 정말로…….’
전술안, 전략안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저런 진법에 전술안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용우 없이는 발휘하기 힘든 형태이되, 모용우를 향한 모두의 신뢰가 없었다면 능력이 있어도 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차기 맹주라.’
도제 종리백의 유일제자 오구문.
자존심으로는 제일이라는 사천당가의 여식 당상아.
오만 그 자체였던 천하제일검가의 장남 남궁표.
호쾌함으로 이름 높은 하북 명가의 장남 팽대호.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들이 모인다는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준까지.
하나하나 특색 있고 만만치 않은 천재들이 자발적으로 모용우를 따르고 있다. 강압으로는 절대 따르게 만들 수 없는 천재들이 자존심을 접고 모용우를 대장으로 삼았다.
무공과 전술을 떠나 저것이야말로 모용우의 진짜 힘이다. 지금껏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던, 그러나 서서히 천하(天下)를 직시하기 시작한 모용우의 매력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역시.’
연호정의 얼굴에 확신이 깃들었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잠시 후.
푸화악!
당상아의 염왕비가 마지막 남은 요승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녀가 모용우를 돌아보았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당상아가 환하게 웃으며 염왕비를 들었다.
“이겼다!”
“우와아아아!”
무사들의 함성이 작은 평원을 넘어 산서 전체로 울려 퍼지는 듯했다.
싸움이 끝나고 하루 뒤.
“후우, 정신이 하나도 없군.”
모용우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전투에서 이겼다고 끝이 아니었다.
한두 구라면 몰라도 이 많은 시체가 썩어 가면 병이 돌 수 있다. 인가(人家)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멀쩡한 무사들과 함께 요승들의 시체를 묻었고, 중요해 보이는 물건들은 전리품으로 취했다.
나아가 다친 무사들을 돌보았으며, 중상을 입은 이들은 가까운 무림맹 지부로 이송했다.
그 과정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여기요.”
지친 몸을 검 한 자루에 기대어 하늘을 보던 모용우 앞으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기죽 한 그릇을 든 손이 나타났다.
당상아였다.
모용우가 쉬고 있는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모자라지 않소?”
“넉넉해요. 지부로 갈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네요.”
“음.”
식량이 부족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단다.
그것은 죽은 무사들 때문이었다.
오백의 요승들을 전멸시켰지만, 동시에 창룡단에서 삼십, 대룡단에서 오십 명이 죽었다.
거기에 중상을 입고 지부로 이송된 이들의 숫자가 오십이요, 그들의 이송자 역할로 함께 떠난 이들 역시 오십이다.
지부로 향한 인원을 제외해도 팔십 명이나 빠졌으니 식량이 넉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릇을 받은 모용우는 심란한 눈으로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 서린 피로와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승리의 기쁨, 전우를 잃은 슬픔, 극심한 피로가 겹친 얼굴들이었다. 그러고도 웃고 떠드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애써 힘을 내고자 하는 까닭이었다.
“모용 공자 때문이 아니에요.”
모용우가 당상아를 바라보았다.
당상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들 모두 명예를 알고 무사의 도(道)를 아는 이들이에요. 슬퍼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잘못이 수장에게 있지 않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답니다.”
“수장의 잘못이 맞소.”
“모용 공자.”
“상상키 어려운 변수가 터져 피치 못하게 내 사람들이 불운을 겪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수장의 잘못이오. 하물며 전투임에야.”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버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수장 자리는 아무나 맡으면 안 되는가 보오.”
당상아가 모용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착잡해하면서도 강인함은 줄지 않았다. 두들길수록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 보이는 눈빛으로 세상을 보는 거인이 그곳에 있었다.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수장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 보이세요.”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장 맡은 자리가 그러하니 어떻게든 감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자, 앉으세요. 오랜만에 편하게 식사나 하자고요.”
당상아는 억지로 모용우를 앉혀 같이 밥을 먹었다. 딱히 별말도 없는 조용한 식사였지만, 어색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멀리 나무에 기대어 두 사람을 보던 연호정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어쩐지 두 사람이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어느새 다가온 제갈준의 말에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선남선녀가 서로를 위하는 모습,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지.”
“그러기에는 형님도 나이가 꽤 차셨잖습니까?”
“됐다. 할 일이 아직 많아, 나는.”
“그거야 저 두 사람도 같지요.”
“제갈세가에서는 전략 전술 배우기 전에 말발부터 가르치나 보지?”
“이게 말발 축에나 듭니까? 무림 최고의 구공(口功) 연성자는 형님 아니셨나요?”
“얼씨구.”
제갈준이 죽 그릇을 건넸다.
“드세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잖습니까.”
“오, 좋구만. 양은 넉넉하지?”
“네 그릇까지는 괜찮습니다.”
연호정이 웃으며 죽을 떠먹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제갈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식사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체하라고 밥 가져다준 거냐?”
“형님 정신력이면 체할 일 없으시잖아요.”
“너 진짜 많이 컸다.”
“그러게요.”
“그래, 뭐가 그리 궁금하냐?”
“조금 뜬금없을 수는 있는데…….”
“그러니까 뭐?”
제갈준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