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1)
981화. 공백을 만들다 (6)
“진짜 뜬금없긴 하구만.”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폐하는 왜?”
오히려 황제를 쉽게 입에 올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연호정의 모습이 제갈준에게는 더 충격적이었다.
‘하긴 형님이니까.’
그간 불가능할 것 같은 온갖 임무를 성공시킨 무림 제일의 해결사가 아닌가. 하물며 서른 이전에 무극에 오른 천재요, 무림을 넘어 황궁 사태까지 개입해서 천하를 놀라게 한 기린아다.
당장 해결한 일만 나열해 보면 사실상 성천의 어떤 이름보다도 윗길에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다. 해낸 일에 비해 명성이 한참이나 모자란다는 것이 제갈준의 생각이었다.
‘그러고도 명성에 취하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러 온 천하를 뛰어다니고 계신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신념 아래.’
누구도 이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젊은 나이에 천하를 논하는 명성을 얻었다면, 그 명성에 취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 마련이다.
연호정에게는 그러한 허세도, 으쓱댐도 없었다.
제갈준이 입을 열었다.
“신화교가 황궁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연가주님과 팽가주님, 그리고 묵룡부의 부주까지 황궁으로 향했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양천은 대외적으로 연호정의 사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양천을 묵룡부주로 칭하는 것은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속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었다.
“신화교 전체가 나서지 않는 이상, 작지만 알짜로 모인 정사 연합군을 뚫긴 어려울 것입니다.”
“나아가 황궁의 전력도 엄청나지. 온갖 독에 화포는 물론 군병들까지 싹 몰려 있는 판국이니까.”
“예. 신화교 전체가 나서지 않는 이상은 뚫기 어려울 것입니다.”
“음.”
“한데, 정작 나선 사람이 신화교주입니다.”
“그래, 그것도 안다.”
“제게는 너무나도 먼, 평생 무공을 익혀도 근처에나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득한 경지에 도달한 형님이 보시기에 신화교주의 무력이 황궁의 방벽을 뚫고 폐하께 도달할 수 있는 수준입니까?”
연호정은 사음교주를 떠올렸다.
그는 강했다. 강했고 철저했으며 지독했다. 나아가 연마한 무공 자체가 워낙 위협적이어서, 동수(同手)의 고수라면 패배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 사음교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광혈교주와 신화교주라면, 그 무위가 진정 하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
제갈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연호정의 아버지, 연위 역시 무극에 오른 초고수다. 거기에 투왕 양천에 광혼귀군 곡경까지 있는데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란 말인가.’
삼교 수장들의 무공이 그만큼 대단하다면, 정말 이번 전쟁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진정 천외천이로군요.”
“천외천이기는 하나, 그것이 아버지와 사부님을 압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실력 차이는 크면서도 미미하니까. 뚫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반대로 막힐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반선들의 싸움이니.”
“……그렇군요.”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한데 폐하를 묻다가 뜬금없이 신화교주에 대해 묻는구나.”
“사실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폐하는 왜?”
제갈준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오랜 시간 정사를 멀리하고 주색을 탐하셨던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지개를 켜기 위함이었다고요.”
“이런저런 생략된 것들이 많지만, 그렇지. 그 말이 맞다.”
“만약 그때 연가주님과 팽가주님, 그리고 제 누님을 보내지 않았다면 폐하께서는 아직도 본신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셨을까요?”
“뭐 때문에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봤을 때, 폐하께선 이미 한계에 도달해 계셨어.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할까.”
“그랬습니까?”
“외양은 중년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연배다. 다시 날개를 펴기 위해 수십 년을 인내하고 사셨는데, 어느새 노년으로 접어드셨으니 사람이라면 초조해하지 않을 수 없지.”
“…….”
“인간의 수명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수명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 따위, 천하에 존재하지 않아.”
좌도의 술수, 편법을 쓰지 않는 이상.
연호정은 굳이 뒷말까지 하진 않았다.
“후, 좋구만.”
대화를 하면서도 용케 죽을 다 먹었다. 연호정이 숨을 푹 내쉬었다.
“배고픈 줄도 몰랐는데, 막상 먹고 나니까 힘이 돈다.”
“저는 폐하께서 누구보다 오래 사시길 원합니다.”
“음?”
“소가주 수업을 받으면서 제국의 치세에 관해 많이 배웠습니다.”
“그랬겠지. 다른 어디도 아닌 제갈세가니까.”
“주색에 빠지기 전, 폐하의 능력은 역사상 어떤 군주들보다도 빼어나셨습니다. 가히 고금 제일의 명군이라 할 만하셨지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연호정은 황제를 떠올렸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진지함, 민초들을 향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압도적인 위엄과 여유로 가려 버린 용안(龍眼).
‘대단한 분이지.’
황궁이 적의 세력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도 웃고 떠들며 주색을 탐한 지 수십 년.
멀쩡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한데 황제는 그걸 해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수십 년을 와신상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저는 폐하께서 건강을 되찾으시고, 꼭 천하를 위해 뜻을 펼치시길 바랍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이 사라진다고 해도?”
“예?”
“황제 폐하께서 만민의 안위를 위해 무림을 없애고 진정한 제국을 만든다고 하면, 너는 그래도 폐하를 응원할 수 있느냐?”
제갈준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으음?”
“만민을 위해 살아간다, 만민을 위해 희생한다. 그것은 우리 백도 정파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협과 정의라는 단어는 언제나 민중을 기반으로 하며, 또한 목표로 하지 않습니까?”
“…….”
“세상의 형태가 어떻게 되었든, 민초들이 더 잘살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강호고 무림이고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이 녀석 봐라?
연호정은 놀란 눈으로 제갈준을 바라보았다.
무림 명문 제갈세가의 소가주이자, 출중한 재능으로 벌써부터 명가주가 될 거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속세의 욕심 따위는 없이, 고집스럽게 민중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네 부친이나 누이나 지혜롭고 명석한 사람들이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고집도 갖추었다.”
“…….”
“이제 보니 그 정신은 가풍이요, 핏줄 그 자체였구나.”
제갈준은 얼떨떨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제갈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걸었다.
“밥이나 한 그릇 더 먹으러 가자.”
“예? 아, 예. 그런데요, 형님.”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냐, 또?”
“……괜찮으시겠지요? 정사 연합군이요.”
모용우가 물었을 때, 연호정은 무사 연위를 걱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저 한 명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웠다.
“괜찮으셔야지. 반드시.”
* * *
차를 마시던 연위는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양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느닷없는 행동에 기천웅과 팽무강은 의아해했다.
“왜 그러시는가?”
연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기운은…….”
양천의 얼굴에도 긴장이 피어올랐다.
“엄청나게 깊군.”
기천웅의 눈이 번뜩였다.
“굉장한 고수가 오고 있는 모양이군.”
굉장한 정도가 아니다.
바람에 실려 온 평온하면서도 깊고 깊은 두 개의 기운.
무력이 아닌, 그 사람 자체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 주는 기운이었다. 무도란 곧 삶과 닿아 있으니 보여 주는 무공의 성격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을 유추해 볼 수 있다지만, 지금 느껴지는 두 사람의 기운은 완전히 반대였다.
누구보다도 정의롭게 살았다. 누구보다도 협의 있게 살았으며, 또한 누구보다도 희생하며 살았다.
그러한 삶이 기운에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느껴지는 무력도 엄청났지만, 그 대단한 무력의 수치를 더듬어 볼 생각조차 들지 않게 만드는 성인(聖人)의 기도였다.
그리고 그 두 줄기 기운에서, 연위와 양천은 상대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나가시지요.”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조만간 어전 앞에 도달할 것입니다.”
팽무강이 당황하여 물었다.
“대체 누구기에 그러시는 거요? 아니 그 전에, 지금 황궁은 아무나…….”
“아무나가 아니오. 허락을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오.”
양천이 탄식을 토해 냈다.
“신선(神仙)이라…….”
얼마나 지났을까.
무수히 많은 경비병 뒤로 네 명의 고수가 섰다.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그러나 웅혼하기 그지없는 기도를 지닌 두 명의 고수가 다가온다.
이제는 기천웅도, 팽무강도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고수들이 얼마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지.
잠시 후.
몇 차례 검문 검사를 지나니 경비병들이 좌우로 길을 터 주었다.
“……!!”
연위의 눈이 떨려 왔다.
나타난 사람은 노인 둘이었다. 하지만 외양이 너무나도 달랐다.
한 명은 마른 몸에 풍성한 가사를 걸친 노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신선의 풍모를 한, 그러나 얼굴만큼은 젊어 보이는 도사였다.
노승에게서는 산사의 불향이 났다.
노도사에게서는 싱그러운 숲의 향이 났다.
노승의 기도는 거대한 산을 떠올리게 했다. 강하고 위엄찬 느낌 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솟아 있을 것 같은 산봉우리가 떠올랐다.
노도사의 기도는 흐르는 구름을 떠올리게 했다. 흐리고 모호한 기색 없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문득 고개를 들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흘러가고 있는 자유로운 구름이 떠올랐다.
산과 구름. 두 노인의 기도는 서로를 거리낌 없이 침범하면서도 상생하여 각자의 색을 흐리지 않았다.
그저 조화로웠다. 사방에 펼쳐져 있는 운무를 뚫고 올라선 태산의 형상,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대자연을 눈앞에 둔 것처럼 심장이 날뛰었다.
“놀랍구먼.”
마른 외양과 달리 노승의 목소리는 깊고 잔잔했다.
“천하를 상대로 날뛰는 위엄찬 사자는 물론이요, 그간 본 적 없는 신검 한 자루에 맹호의 기세를 품은 칼까지 있어. 천지에 비범한 이가 많다지만, 이렇게 대단한 후배들을 눈으로 보니 비로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다.”
아득한 목소리였다.
웃음기 어린 그 목소리는 마치 차분한 마음으로 외우는 불경 소리와 같았다.
이어서 노도사가 말했다.
“세 사람도 뛰어나지만, 저 용암과도 같은 고수는 정말 놀랍군. 단순 무력만 보면 땡중 자네와 붙어도 누가 이길지 장담 못 하겠는데?”
“엄살떨지 말게나. 태극검 일초에 아끼던 염주를 끊어 먹은 자네 실력은 어떻고?”
노도사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나야 여기에 이상이 있지 않나. 못 싸워, 저런 괴물하고는.”
“흥미롭긴 하네. 다행인 것은 걱정과 달리 황궁이 멀쩡하다는 것인데.”
노승, 무허대사가 웃으며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용암께서는 벌써 굳어 땅이 되셨소? 아니면 시커먼 불씨를 살려 두고 계시오? 대답 여하에 따라 여독을 풀지, 관절을 풀지 선택을 내려야 하는데 말이오.”
기천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권신과 검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