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2)
982화. 공백을 만들다 (7)
한 시진 후.
“…….”
여섯 사람이 호화로운 방 안에 모였다.
그윽한 다향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찻잔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분위기는 어색했다.
무극을 돌파한 강호의 초고수가 무려 다섯이요, 하북의 패자 소리를 듣는 명가의 주인까지 모인 자리다. 무림맹을 제외하고 이토록 놀라운 고수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는 자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와중에 분위기까지 어색하니,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잠시 자리를 살피던 양천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이만 일어나 보겠소.”
무허대사를 제외한 모두가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어색함을 참을 만한 자리는 아니로군. 혹 내게 볼일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찾아오시길.”
솔직하고 담백한 언사다.
말없이 주변 사람을 훑어보던 탁무자가 일순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숨 막힐 듯 무거웠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그저 웃음소리 하나만으로도 분위기를 바꾸는 걸 보면, 과연 시대의 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강자였다.
“흑도의 대종사답군. 몇 마디 말만 들어도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네.”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싶다면 싸워 봐야지.”
“으음? 갑자기 얘기가 왜 그리로 가는가?”
“학자는 붓으로 싸우고 무인은 칼로 싸우는 법 아니겠소? 서로를 잘 알고 싶으면 싸워 보면 되는 거요. 우리 모두 그런 세상에 살고 있잖소.”
참으로 그다운 말이었다.
말없이 기천웅만 바라보던 무허대사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칼이 없으니 주먹으로 대화해야겠군. 조만간 따로 자리를 만들어 보세나.”
양천의 눈이 불을 뿜었다.
“영광이외다.”
양천은 단순히 어색해서 자리를 피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가 투왕이라는 별호를 얻은 이유가 있다. 싸움을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싸움을 그만큼 좋아해서 얻은 별호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양천은 권신과 검선에게 강한 투쟁심을 느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반드시 주먹을 겨누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뭉클뭉클 솟구쳤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한판 붙자고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뜨는 것이다. 더 있으면 실수하게 될까 봐.
팽무강도 은근슬쩍 일어났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탁무자가 의아한 눈으로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왜?”
팽무강이 입맛을 다셨다.
“하북 어디에서도 어깨 펴고 다닐 만한 무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안에 있다 보니 고개가 자꾸 내려갑니다. 부족하다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연약하다는 생각마저 드는군요.”
“허허허!”
“말씀 잘 나누십시오.”
“자네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진정 끝을 보고자 한다면, 향후 십수 년 내로 도제(刀帝)의 뒤를 잇는 명성을 쌓을 수 있을 듯하이.”
천하의 검선이 하는 말이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팽무강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탁무자가 보기에 그만큼 자신의 공부가 잘 쌓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귀찮은 일일랑 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어 보게나.”
“그게 참 쉽지가 않더군요.”
“쉽지 않겠지. 다만, 언제고 그 자리에 있을 순 없지 않나?”
“물론 그렇습니다. 오히려 어서 벗어던지고 싶더군요, 이 가주라는 자리는.”
“허허, 자네도 어쩔 수 없는 무림인이로군. 성품이 좋고 시원시원하니, 겨뤄 보지 않아도 자네의 칼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 선명하네.”
“대결이라고 부를 만한 게 될지나 모르겠습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옳게만 간다면 좋지.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올랐느냐가 아닐세. 언제고 올라간다는 것이 중요하지.”
팽무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게 양천과 팽무강이 자리를 떴다.
연위도 슬쩍 팔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도…….”
“연가주께서는 자리를 지켜 주시면 안 되겠나?”
탁무자의 말에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따로 볼일이 있으신 것 같지는 않은데…….”
“볼일이 왜 없나? 볼일은 차고 넘친다네.”
“예?”
탁무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자네 아들이 나를 찾아왔던 거, 말 안 해 주던가?”
“아…….”
“처음 그놈을 보고 대체 이런 망아지 같은 녀석은 어떤 씨에서 나왔나 궁금해했다네. 지금 자네를 보니 알겠군. 부자가 쌍으로 괴물 같은 재능을 안고 태어났어.”
연위가 쓰게 웃었다.
“다소 거칠지만 좋은 녀석입니다. 아무쪼록 좋게 봐 주십시오.”
재능이 좋다는 얘기를 하는데도 아들 걱정부터 한다. 그것만으로도 연위가 어떤 사람인지, 탁무자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때, 기천웅이 입을 열었다.
“이런저런 얘기는 그쯤 하도록 하고.”
탁무자가 무거운 분위기를 웃음소리 하나로 깨트렸다면, 기천웅은 그 반대였다.
그의 목소리, 그의 존재감이 부드러워진 방 안의 공기를 단숨에 냉각시켰다.
“강호 무림의 최고 어른이자 시대의 패자 소리를 듣는 두 사람은, 이 사람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자리까지 만드셨는가.”
일국의 황제에게도 존대하지 않는 그였다. 그런 걸 떠나, 먹은 나이만 봐도 무허대사나 탁무자에게 꿀리지 않는 그였다.
무허대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화교주.”
“말씀하시게, 소림의 권신.”
“그대의 마음에 진정 이곳 중원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없으시오?”
“그럴 리가 있나?”
기천웅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 마음에 중원 정벌에 대한 욕구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지. 천하를 내 손아귀에 쥐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폐한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해서, 그 욕망을 활짝 개화해 보고 싶으시오?”
기천웅이 쓰게 웃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그 표정, 그 행동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밝힌 그였다. 새삼스레 일신일선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하여, 했던 얘기를 또 줄줄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만히 기천웅을 보던 무허대사가 한 번 더 물었다.
“중원 무림과 손을 잡고 삼교를 멸하러 오셨소?”
“아니.”
“하면?”
“본교에 자유를 주기 위해 온 것이지.”
무허대사는 기천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그의 사상이 중원에 있어서 독이 되지 않을 것임은 확신했다.
그것은 무허대사가 똑똑해서도, 기천웅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흐음.”
무허대사가 연위를 힐끔거렸다.
“충만한 정의감과 드높은 협심으로 그득한 강동의 신검(神劍)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연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일개 필부에 불과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연가주께서 얼마나 정(正)한 사람인지는 만인이 알고 있소이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무허대사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래도 그대 입으로 다시 듣고 싶소.”
“…….”
“삼교에 관한 얘기는 됐소. 목적이 무엇이든, 손을 잡는다면 함께 싸우게 될 터이니. 다만 한마디 확답을 듣고 싶소. 당신은 우리와 힘을 합쳐 앞으로의 전쟁에 힘을 보태 줄 생각이 있소이까?”
기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어차피 거래란 그런 거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이 거래는 이미 성사된 셈이지.”
“마지막으로 묻겠소. 마지막이니만큼 나 역시 더 확실한 질문을 드리리다.”
“…….”
“신화교를 맡아 주겠소?”
“나아가.”
기천웅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사음교주도 내 것이다.”
무허대사의 얼굴이 풀어졌다.
탁무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봐라, 땡중. 답은 나왔다니까.”
“나도 아네. 그래도 직접 말하는 걸 듣지 않고서야 어찌 ‘그 일’을 하겠는가? 빈승 혼자 일이라면 몰라도 천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거늘.”
연위가 의아한 눈으로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그 일이라 하심은……?”
“허허.”
나직이 웃음을 터트린 무허대사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편안한 자세, 눈은 여전히 기천웅에게 닿아 있었다.
“무척이나 불안정하구려.”
“…….”
“당신의 상단전 말이오. 뒤틀려도 그리 심하게 뒤틀리기는 쉽지 않소이다.”
기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탁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기천웅의 물음에 탁무자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대와 빈도의 상황이 비슷하단 말이오. 상단전이 파탄 나지 않았소이까.”
“……!!”
영안이 흐려진 건 물론 상단신기의 흐름까지 제멋대로인 기천웅은, 탁무자가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탁무자가 쓰게 웃었다.
“다만 가지고 있는 걸 잃지 않기 위해 선산에서 오랫동안 수양을 했소. 만약 선대가 풀어 놓은 선기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대와 비슷한 지경에 이르렀을지 모르겠소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탁무자가 무허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땡중의 힘으로 새어 나가는 상단신기를 막고 있소이다.”
“……?!”
“물론 영원하진 않소. 영원은커녕 한 번 주입해 주면 보름이나 갈까. 거기에 동급의 무사와 싸움이라도 벌이면, 그 기간은 확 줄어들겠지.”
기천웅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구멍이 난 상단전을 막았다고?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무허대사가 피식 웃었다.
“소림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소. 다만 각파마다 쌓아 온 역사와 공부가 다르니, 그대들에게 불가능한 일이 우리에게는 가능하고, 우리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을 그대들은 행할 수 있지.”
“…….”
“공부라는 것이 다 그렇지 않소이까.”
기천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무너진 상단전을 잠시나마 복구할 수 있단다. 그 힘은 금세 소실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소. 그대에게 확답을 받고 싶었던 것은, 만약 그대가 진정 우리와 힘을 합쳐 이 전쟁을 이끌고자 한다면 최소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기반 정도는 다져 줘야 하기 때문이오.”
“……!”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건가.”
“그대의 상단전은 여기 말코보다 훨씬 더 피폐해졌소. 확실한 건 직접 손을 대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어떻게든 가능이야 하겠소이다.”
“그럼……!”
“황제 폐하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들으면 되니 일단 미뤄 두도록 하고.”
“……?”
“조건이 있소.”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술법인지 무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대단한 조치를 맨입으로 취해 줄 수는 없을 터였다.
무허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 조건에 동의해 준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시술에 들어갈 수 있소.”
“조건이 뭐지?”
“무림맹으로 가 주시오.”
“……뭐?”
기천웅은 물론 연위도 깜짝 놀라서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무허대사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며 말했다.
“무림맹으로 가서 또 다른 무상이 되어 주시오. 말하자면, 황궁 소속이 아닌 무림맹 소속이 되어 달라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