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3)
983화. 공백을 만들다 (8)
보름이 지났다.
산서로 나갔던 병력은 하남 대별산 인근에 접어들었다.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워낙 고생들을 해서 그런지 무사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당상아가 무사들을 힐끔 보며 말했다.
“피곤이 많이 쌓였군요.”
“보통 싸움이 아니었으니까.”
경험 많은 무림인이라고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더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유인즉 싸움은 익숙해질 수 있어도 살인은 익숙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살인이 익숙해지면 마인이 되는 것이고, 살인의 부담을 정신력으로 이겨 내는 사람은 또 하루 무림에서 살아갈 수 있다.
“부대원으로서 신념을 갖고 싸운다고 해도 결국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이상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오. 그것을 얼마나 잘 이겨 내는가가 무인의 숙명이고, 그들이 잘 이겨 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상관의 책임이겠지.”
남궁표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생각은 저마다 다른 법. 나도 내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 않소.”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팽대호가 은근슬쩍 물었다.
“남궁 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번 전투에서 남궁표의 활약은 대단했다.
적병을 많이 죽여서가 아니라 아군을 잘 보호해 주었기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하여 그 정도 정신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사람 나름의 주관과 신념이 똑바를 터.
남궁표가 말했다.
“나의 주체는 부대장도,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오. 상황에 휩쓸려 피로를 느낄지라도 이겨 내야 하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하오.”
“음.”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무너지면 거기서 끝이 아니겠소. 누군가가 도와준다면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결국 내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다면 도움도 무소용이오.”
다른 듯하면서도 따져 보면 비슷한 말이었다.
남궁표는 조부 남궁승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예전의 경박함과 질투 가득했던 그 자신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용우의 말이 옳다. 누군가의 작은 도움만으로도 엇나갈 뻔했던 사람이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게 되니까.
그러나 도움을 받았다 한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맴돌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니, 그렇게 보면 남궁표의 말도 옳았다.
남궁표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변화를 가장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곧 그 자신의 깨달음을 기반으로 했다.
“신념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제갈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도움을 받든 혼자서 일어나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깨달음 이전에 내가 살아야 무언가를 고칠 기회라도 있는 법, 저는 제가 더 성장하지 못한 채로 죽는 것이 무섭습니다.”
참으로 제갈준다운 말이었다.
산서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딱히 답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정할 필요도 없는 화두를 던지며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것은 일견 한가로워 보이지만, 기실 아주 중요한 대화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부대원들도 잠시지간 힘듦을 잊고 대의를,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런 대화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 훗날 위대한 사람을, 위대한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연호정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화합이로군.’
내심 걱정이었던 남궁표도 표현이나 성격이 다소 날카로울 뿐, 타인의 말을 잘 수용할 줄 알았다.
성장은 그럴 때 탄력이 붙는다. 임무를 달성하고 돌아오며 그들은 한 단계 더 성장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연호정은 만족했다. 차후 강호의 기둥이 될 사람들이 빠르고 깊게, 올바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형님은 어떠세요?”
제갈준의 뜬금없는 물음에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예.”
“뭐가?”
“무공에 관해서야 저희와 원체 차이가 크니까 딱히 여쭤볼 것도 없고, 궁금한 건 그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어떻게 스스로를 잃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모두가 흥미로운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딱 잘라 말했다.
“많이 잃었다, 나는.”
“예에?”
“몇 번이고 잃었고,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그리고 되살아난 나는 잃어버리기 전의 나와 명백히 달라졌지.”
“……!”
“같아 보여도 보는 눈과 돌아가는 머리는 달라져. 나는 그랬다. 계속 변했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칼집에 꽂힌 칼도 십 년이 지나면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다 삭아 버리지 않느냐.”
“…….”
“사람의 변화도 그와 같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언행은 같아도 생각이 다르다면, 결국 달라진 것이다.”
“……그렇군요.”
“다만 그것을 남들이 이해해 줄 필요는 없지. 내가 나를 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
“좌절과 공포를 어떻게 이겨 내는가는 문제가 아니야. 이겨 내는 것 자체는 당연한 거다. 중요한 건 이겨 내는 게 아니라, 이겨 낸 이후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다.”
한 차원 너머를 생각한다.
그들의 고민은 이미 연호정에게 있어서 시작점에 불과한 것이다. 연호정은 변화된 나를 어떻게 통제하는가, 달라진 주관으로 지금의 나를 어떻게 증명하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고 연호정이 이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부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었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 연호정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면 그의 무공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할 터.
사람들은 연호정의 말을 곱씹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별 대단한 말은 아니니 신경들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내 눈에는 그대들이 훨씬 더 대단해 보이니까.”
제갈준이 피식 웃었다.
“진심이죠?”
“나는 화합을 모르는 사람이야. 의도하지 않은 화합은 이뤄 봤지만, 대개 강압적인 결속을 유도하려 했지. 그게 내 단점이다.”
“으음.”
“이런 대화는 좋아. 그러나 누가 옳은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니, 다른 의견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나답게 발전시킬 것인가가 중요하겠지. 무림인의 무공처럼, 학자의 사상처럼.”
유연함이 돋보이는 발언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 걷는 이들을 일별한 모용우가 연호정 옆으로 다가왔다.
“이런 오글거리는 대화, 질색하지 않느냐?”
“오글거리는 대화라는 건 인정하십니까?”
“너한테 오글거리는 거지. 우리는 좋다.”
“그러면 됐지요.”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가벼워 보인다. 싸우기 전보다.”
“그렇습니까?”
뭔가를 털어 냈다는 것일까?
연호정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모용우 말대로, 나각뢰와 싸우기 전보다 확실히 마음이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왠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무림맹으로 들어가는 거 말입니다.”
연호정의 눈은 대별산의 여러 봉우리를 훑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작은 왕국과도 같은 규모를 자랑하는 무림맹은 여전히 활기가 가득했다. 적어도 신마림이나 묵룡부, 황궁과는 많이 달랐다.
“생각해 보면 청해로 떠난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
“좋으냐? 무림맹으로 가는 것이.”
“원래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무림맹이야말로 화합의 장이 아닙니까. 그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욕심 있는 사람도 많지요. 아마 음험한 계략을 꾸미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이들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환한 빛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다행이지요.”
“그렇구나.”
“그러니 더더욱 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음? 그게 무슨 말이냐?”
“수백 년을 살아온 게 아니라서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만, 당대 무림맹은 과거 어떤 무림맹보다 밝고 기운찬 힘을 발하고 있습니다.”
“음.”
“하지만 공백이 너무 컸어요.”
“공백이라니?”
“지금껏 무림맹은 여러 일을 했습니다. 이것도 막고 저것도 해결하고, 상상치도 못한 영역으로 무사들을 파견해 어떻게든 화해시키고 진압하길 반복했지요.”
“그랬지.”
“우리도 우리지만, 그 과정에서 손실되고 보충된 무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일이 따지기 어려울 정도지. 다행히 천하 무림인들이 본 맹을 좋게 봐 주어서 지원자가 넘쳐난다는 것이 다행이야.”
“다행이면서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위험?”
“세작입니다.”
모용우의 눈이 살벌한 광채를 발했다.
“무림맹에 세작이 활동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병력의 공백, 시간의 공백. 무림맹은 공백 그 자체였습니다. 당장 지금만 봐도 그렇습니다. 무림맹 정예 부대인 육룡 중 두 개의 부대가 산서까지 다녀왔지요.”
“다른 조직들도 다 그러지 않느냐?”
“문제는 무림맹이 강호의 중심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환영할 만한 일이나, 세작들이 활개 치기에 이만한 잔칫집이 또 없을 겁니다.”
모용우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일전에 세작은 전부 잡았다고 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부 잡은 것이 아니라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잡았고, 만에 하나 남아 있어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압도해 버린 것일 뿐입니다.”
“……!”
“세작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또 세작이란 말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세작입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상, 아니 표면적인 전쟁이 끝나도 세작은 어디에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다 알고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맹주님과 군사님께는 진즉 말씀을 드렸지요. 물론 그분들도 알고는 계셨습니다만.”
“그렇구나.”
모용우가 탄식을 토해 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처리해서는 안 되었어. 별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나 역시 거기까지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형님 정도면 엄청난 도움이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익숙하지 않은 영역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니, 그래도 떠올렸어야 했다. 상정했어야 했어.”
모용우가 담담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담담하되, 동시에 의지로 빛나는 눈이었다.
“제대로 달려 보기로 했거든.”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제대로 달려 보기로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맹주 후보인 모용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이상, 그 뜻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형님.”
“네 녀석에게 강제로 등 떠밀려 앉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렇고.”
“…….”
“하지만 누가 그랬든 내가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내 삶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지.”
연호정의 얼굴에 격동이 일었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차기 맹주가 되고자 노력해 볼 것이다. 능력이 안 되어서 못 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
“…….”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다. 높은 곳을 바라본다는 놈이, 정작 양지만 보고 음지는 보지 못했다니.”
“괜찮습니다.”
연호정이 마주 웃었다.
“앞으로 배워 나가면 됩니다.”
“벌써 맹주가 된 것처럼 구는구나.”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배워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네 말이 옳다.”
가볍게 나눈 대화였지만, 연호정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대화였다.
“한데 이전에는 왜 잡으려 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것도 잘 모르겠구나.”
“잡는다고 잡을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슬슬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