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4)
984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
“어떻소?”
“좋습니다.”
“허허, 다행이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차를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들풀도 끓여 마시면 맛나다고 느끼는 막입이라 좋은 차 끓이는 법을 모르외다.”
“그런 것치고는 향이 아주 좋습니다.”
“오랜만에 벗을 보는 자리라, 군사에게 직접 배웠소이다.”
“어쩐지 군사의 차 맛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 보고 배울 만한 실력이 아닌데, 대단하시군요.”
“허허, 그런 금칠은 안 그래도 수양 부족한 땡중을 더더욱 자만하게 하지요.”
“솔직한 말도 자만으로 알아들을 만큼 조심하면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렇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모용군이 맹주전을 둘러보았다.
넓고 웅장하지만, 달리 어떠한 치장도 없다.
공공대사의 검소함은 맹주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용군은 맹주전에서 단순히 검소함만을 느끼지 않았다.
언제든 자리를 비워 줄 수 있다는 넉넉함.
자신은 초대 맹주로서 길만 닦아 줄 뿐, 진정한 맹주를 위해 많은 것을 비워 두었다는 인상이 강하게 묻어 나왔다.
“여전하십니다.”
“음?”
“여전히 담백하십니다. 그래도 천하제일 무림맹의 맹주이신데, 너무 삭막한 것 아닙니까?”
공공대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 몸을 가릴 정도만 입으면 되는 것이고, 배고픔이 가실 정도만 먹으면 되는 것이 인생 아니오.”
“동의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허허허.”
“그렇다 치더라도 무림맹주라면 달라야지요. 맹주 자리는 공석(公席)입니다. 이곳은 맹주전이라고 하기에 너무 빈하지 않습니까?”
대놓고 빈하다는 말을 하는 모용군도, 그 말을 듣고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 공공대사도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니, 이 자리도 오래는 못 해 먹을 듯싶소이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그럼 어서 내려오시고 저에게 물려주시지요.”
민감할 법한 얘기를 잘도 하는 그였다.
공공대사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의 모용가주라면 빈승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오.”
“예전에는 달랐습니까?”
“예전에는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한 열 살배기 아이보다도 못했을 것이오.”
꽤 매콤한 말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런 식이었다. 편안하고 친분 있어 보이면서도, 한 번씩 듣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런 대화에 지극히 익숙해 보였다. 실제로 이런 자극적인 대화는 처음인데도 서로의 말에 전혀 상처받지 않는다.
상황이 이쯤 되면, 두 사람의 매운 말들은 날카롭게 포장된 진심이라고 봐야 했다.
두 사람은 그 뾰족하게 포장된 말로 상대를 이해했고, 동시에 상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진심을 전했다.
모용군이 차를 다 마시고 말했다.
“대사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빈승 역시 마찬가지요.”
“이 대화가 꽤 재미는 있습니다만, 자리가 길어지면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속앓이를 할 겁니다. 그러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빈승은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그 전에 이것부터 보시지요.”
모용군이 품에서 반듯하게 접힌 문서 몇 장을 꺼내 공공대사에게 전했다.
문서를 펼쳐 읽은 공공대사의 눈이 대번에 번뜩였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대사님께서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셨군요.”
“그래서 이 자리가 부담스럽소. 안 그래도 불법에서 멀어진 땡중을 나락으로 보내는 자리 같아서.”
“덕분에 맹원들의 마음은 편안해졌으니, 뭘 안 하셔도 그 자리에 있을 가치가 충분하십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고생이 많으셨소.”
“예. 많았습니다.”
모용군은 습관처럼 찻잔을 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미 빈 잔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공대사는 잠시 말없이 문서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면, 세작 색출 부대의 부대원들은 대부분 묵룡부 소속이겠구려.”
“그렇습니다.”
모용군이 의아한 눈으로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이미 보고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과거 연호정의 출정을 앞두고, 모용군은 직접 양천을 찾아가 병력을 붙여 달라고 말했다.
그때 무림맹 세작 건에 관해서도 얘기를 했는데, 세작 색출의 전문가가 있으니 쓸 만한 이들을 붙여 짧지만 빠르게 색출 전문가로 키우자는 것이었다.
양천은 그것을 허용했고, 모용군은 곧바로 일에 착수했다.
이후 두 달.
고작 두 달 만에 오십여 명의 부대원들은 상당한 지식을 지닌 색출가가 되었다.
그것은 교관의 능력이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양천이 고르고 고른 인재들의 재능이 원체 대단했던 덕분이었다.
교관에게 보낸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암살에 능한 정보원이었다. 단순한 살수가 아닌 정보를 다루는 이들로서, 두뇌 회전이 빠르고 안목이 날카로우며 자신을 잘 숨길 줄 알았다.
당연히 배우는 것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달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당장 실전에 투입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의 숙련도를 보여 주었다.
모용군은 진행도와 부대원 하나하나의 성향, 나이, 성별, 버릇 등 모든 것을 공공대사에게 보냈다. 양천이 용인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새삼스레 묵룡부 출신이라는 걸 물어보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물론 빈승은 알고 있소. 그저 한 번 더 확인해 보려고 그랬소.”
확인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공공대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다시 물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뭔가 문제가 생겼군요.”
“문제라고 할 건 아니지만…… 그래,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겠소이다.”
“무슨 문제입니까?”
“모용가주께서도 아시겠지만.”
공공대사가 맹주전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림맹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소. 심지어 몇 달 전에 검제와 도제 선배님들께서 맹의 무상으로 들어오셨소이다.”
“천만다행이지요.”
“그렇소. 다행이지. 은거했던 거인들이 힘을 보태고자 직접 오셨으니, 이야말로 무림의 홍복이라 할 만하오.”
“한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설마하니 그 늙은이들이 대사님의 권한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까?”
모용군은 스스럼없이 두 사람을 늙은이라고 불렀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원로이고 무상이니 대우는 확실히 해 주어야겠지만, 그들 역시 맹주보다는 아래외다. 두 분이 맹으로 들어오는 것을 고민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지 않겠소?”
한번 들어온 이상 맹주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는 뜻이리라.
“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맹 내에, 흑도에 대해 불만을 지닌 이들이 많소.”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평화를 위해 흑백이 손을 잡았지만, 두 집단은 수백 년 동안 서로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며 살았다. 당연히 그러한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여론은 꼭 필요했다. 그래야 수뇌부가 최대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다만, 그런 이들이 맹력(盟力)을 뒤흔들어 내란까지 일으킬 정도면 문제가 될 겁니다.”
“…….”
“설마 그 정도입니까?”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나오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간의 일을 지금 설명해 주기에는 너무 많은 사건이 있었소이다. 모용가주께서도 알지 않소? 이토록 거대한 집단을 운영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무림맹은 작은 국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거대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한데 그 집단에 속한 이들은 하나같이 혈기가 왕성한 무림인들이다. 속된 말로 대화보다 칼부림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 능한 이들인 것이다.
물론 백도 정파인 만큼 그런 사건들이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 전부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무림맹은 묵룡부처럼 수장이 절대 권력을 지니는 구조가 아니었다. 맹주의 권한은 막강하지만, 애초에 여러 조직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일은 진행하는 형식이라 힘으로 짓누르면 오히려 반발이 터지고야 만다.
여러모로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런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맹을 뒤흔들면, 가혹할지언정 모두 검거하여 죄를 물을 수 있소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슬아슬한 선을 지켜 가며 여론에 불을 지피고 있소.”
“왜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까?”
“음?”
“왜 당장 검거하여 죄를 묻지 못하냐는 말입니다.”
공공대사가 탄식을 토해 냈다.
“그들의 분노가 죄는 아니잖소?”
“그 분노 때문에 조직의 힘을 깎아 먹고 있다면 그것은 죄이지요.”
“명분이 부족하오.”
“명분은 만들기 나름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명분이 존재합니다.”
모용군의 눈에 무시무시한 뇌광이 이글거렸다.
“지금은 전시(戰時)입니다.”
“…….”
“당장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당장 오늘 아침에도 해가 떴다고 전쟁 중이 아니랍니까?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봐주다가는 어떻게든 잘 화합된 무림맹의 결집력이 무너져 내릴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전시라는 명분은 아무래도 애매할 수 있다.
모용군은 공공대사를 이해했다. 화가 나서 강하게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라도 힘으로 짓누르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 봤자 내부 분열만 일어날 것이 뻔하니까.
그래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리가 텅텅 빈 놈들이로군.”
모용군의 얼굴에 확연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지금의 평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감히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짓거리는 하지 못했을 터인데.”
공공대사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모용군은 희생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원래 모용군은 똑똑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다만 그 안목과 머리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썼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린 지금의 모용군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쌓아져 왔는지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성격은 그대로다. 그러나 욕심을 내려놓고 세상을 주시하며 외면해 왔던 걸 이해하니,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대사님의 생각은 알겠습니다. 하면 군사는 이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습니까?”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군사는 오히려 지금이 괜찮다고 하더군.”
“……?”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이다. 뭔가 방법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빈승은 상상도 할 수 없구려.”
“방법?”
눈살을 찌푸렸던 모용군의 얼굴이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방법이라…… 일부러 놔두었다?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알면서도?”
공공대사가 은근히 물었다.
“모용가주께서는 군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소?”
“모르겠습니다.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지요.”
“흐음.”
“대사님께서는 맹주시니 직접 물어보면 다 토해 낼 텐데, 어찌 물어보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까?”
“허허, 방법이 있다고 말했으니 그저 믿을 따름이오. 말해 줄 거라면 진즉 말해 줬겠지.”
속이 편한 건지, 절대적인 신뢰인지 알 수가 없다.
모용군은 피식 웃었다.
“그 여우 같은 양반이 수가 있다고 한다면, 나름대로 대책이 있겠지요.”
“허허.”
“그나저나 애매하게 되었군요. 그런 놈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럼 당장 세작 부대를 투입하기에는…….”
그때였다.
“맹주님!”
“무슨 일인가?”
“산서로 향했던 맹주 후보들과 창룡, 대룡의 두 부대가 돌아왔습니다!”
“오, 그러한가?”
“그리고…….”
“음?”
“묵룡부의 소부주도 함께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