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5)
985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2)
“…….”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형제 주변으로 어색한 침묵이 일었다.
공공대사 앞에서 화끈한 어조를 남발했던 모용군도, 다시 만난 동생 앞에서는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서신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니, 굳이 어색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묵직한 것은 전적으로 모용군 자신의 문제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꿈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 나갔던 그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맹을 나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자신이 만든 세상조차도 개인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 세상을 위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힘을 보탠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변신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의 행위를, 모용우가 어떻게 볼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맹을 떠나기 전에도 몇 번 만남을 가졌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을 고려하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먼저 입을 뗀 것은 모용군이었다.
“그간 잘 지냈느냐?”
“예. 형님께서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사실 모용우 역시 나름대로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군이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얼마나 무진 애를 썼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 과정에서 도의적인 문제가 컸기에 연호정과 함께 맹주가 되는 것을 방해하려 했지만, 어찌 되었든 모용군의 꿈은 무림맹주였다.
또한, 마음을 달리 먹었다 한들 미련이 남지 않았을 리가 없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미련까지 없진 않을 거라고 모용우는 확신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무림맹주 후보가 되었다.
모용세가의 가주가 되어 가문을 바꿔 보겠다고 한 사람은 맹주 후보가 되었고, 가문을 놓고 맹주가 되겠다고 한 사람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장강 이남으로 내려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다.
‘운명이란 참으로…….’
모용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모용군은 맹주 등극에 실패했다. 다만 결과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그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모용군은 스스로 꿈을 포기하고 천하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미련이 남았을 사람 앞에서 차기 맹주 후보가 된 동생이 있다.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모용우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가주가 되고 싶으냐, 맹주가 되고 싶으냐?”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그래.”
“…….”
“이놈아,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왜 그렇게 굳어 있는 게냐. 이 정도 질문도 못 할 만큼 우리 사이가 어색했던 것이더냐?”
“저는…….”
“너와 여러 후기지수가 맹주 후보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모용군이 차를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가 그 자리를 원한다고 다 후보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공대사와 군사의 의지가 있었기에 너희가 후보 자리로 올라설 수 있었겠지.”
“…….”
“내가 보기에 공공대사는 최소한을 추구한다. 최소한의 운영을 하고 있어. 말하자면 후대를 위해 기반만 닦아 놓고 말끔하게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단 것이다.”
모용우는 모용군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그러했고, 심지어 공공대사 스스로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남들은 공공대사를 무림맹의 초대 맹주라고 하지만, 공공대사 자신은 초대가 아닌 임시 맹주라고 말한다.
그러한 발언 자체가 맹주의 권력을 뒤흔든다. 그건 공공대사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본인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후대에 건 기대가 큼과 동시에 후대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 대의 맹주를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것,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욕심 없는 사람이 오르기도 싫은 맹주위에 올라 기반을 닦아 놓겠다는 것 자체가 이 대 맹주에게 강력한 힘을 실어 주겠다는 조용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모용우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자칫 맹이 흔들릴 수도 있을 텐데요.”
어색함을 떨쳐 내고 순수한 궁금증이 일어 묻는다.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맹의 분위기가 요새 시끌시끌하다더구나. 임무에 나가 오늘 들어온 너는 듣지 못했겠지만.”
“……?”
“군사가 이 사태를 가만히 두고 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예?”
“해서, 네 생각은 어떠냐?”
칼같이 말을 돌리는 모용군이었다.
가만히 모용군을 바라보던 모용우는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진지하게 노려 볼까 합니다.”
“…….”
구구절절한 설명 따위는 없다. 자신의 마음만을 담아 간결하게 얘기한다.
모용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우 역시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차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모용군의 안색을 살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네가 맹주 후보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다만, 화가 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화가 났다.”
“……예.”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가 당장 맹주직을 포기했는데 내 동생 놈이 맹주 후보가 되어 질투심에 화가 난 줄 아는 모양인데, 실은 그렇지 않다.”
“…….”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예?”
모용군이 의자에 등을 묻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보는 것인지, 그 너머 하늘을 보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원하는 게 다가온다는 말이 있다.”
“…….”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니더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곧 욕심이 나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인데, 정작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목표를 이룰 수가 없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말장난이냐?”
“…….”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할 수가 없었지. 욕심을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에게 비로소 얻고자 했던 것이 온다면, 이는 하늘이 사람을 기망하려 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모용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믿지 않았다. 그리고 증명했지. 나는 가주가 되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온갖 악업을 지고 나아갔다. 결국 난 가주가 되었다.”
“…….”
“하지만 맹주는 될 수 없었다.”
“…….”
“아마 그 상태 그대로 노력했다 한들 맹주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정적에게 역공을 당해 무림에서 매장되었을 확률이 더 높았겠지.”
모용군이 모용우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놀라운 것은, 나는 욕심을 내려놓기 전까지 그런 가능성은 요만큼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
“내 비록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는 안 되더라도 어디 가서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데도 세상을 모르는 젊은이들조차 알 만한 일을,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나는 무시하고 배제하고 있었단 말이다.”
“…….”
“이유를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내 노력의 방향성이 틀렸기 때문이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노력의 방향이 틀렸단다.
모용군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을 법한 소리였다. 그전에도 많이 느꼈지만, 정말 형님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덕망 있는 사람만 맹주가 되란 법은 없다. 오히려 이런 시대에는 강단 있고 때로는 비정한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는 철혈(鐵血)의 맹주가 낫다고 본다.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세상을 이끌 만한 재목이 필요하지.”
“…….”
“하지만 나는 반대로 진입했다. 비정함을 넘어 치졸하고 악랄한 행위를 쌓고 쌓아 맹주가 되려 했다. 맹주가 되고 나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 모두를 이끌고 세상을 변혁하고 싶었다.”
“……!”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모용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를 이루겠다는 말에 한정하면, 나의 방법으로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 방법이 옳지 않았다.”
“…….”
“그래서 나는 내게 분노를 느꼈다. 일생일대의 목표를 위해 인생을 걸었던 놈이, 정작 출발선에서 점점 멀어지는 결단을 하루하루 내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지.”
“……그러셨군요.”
“욕심을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지금도 싫다. 옳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을 넘보려 했거나, 노력의 방향성이 틀렸거나, 혹은 제대로 노력해 보지 않은 자들의 자기 합리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나는 패배했다. 그러나 패배를 구실 삼아 어쩔 수 없었다고, 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도, 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자격도 없고.”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 목표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가 맹주 후보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잘못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형님.”
“축하한다.”
“……!”
“나 스스로에게는 화가 났지만, 너를 생각하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모용군이 자신을 지지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넌 능력이 있는 놈이다. 재능이 넘치는 인재지. 그런데도 재능을 활짝 펼치지 못하고 절강지부에서 허송세월이나 했다.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였고, 모용세가였다.”
“형님.”
“본가를 바꾸겠다고? 그것도 좋지. 하지만 무림맹주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오랜 인내로 뜻을 펼쳐 보지 못한 너에게 있어, 그 자리는 한을 풀고 더 높이 비상할 기회가 아니더냐?”
순간 모용우는 가슴 속에서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한.’
한이 있었는가?
내 마음에, 내가 가진 무기들을 세상에 펼쳐 내지 못한 아쉬움과 좌절감이 존재했는가?
모용우는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답은 바로 나왔다.
‘있다.’
그에게는 한이 있었다.
무림맹으로 들어와 모용군의 지지를 받고 탕마군, 의정군의 대수가 되어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를 이끌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다. 아니, 경험을 넘어 신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많은 전우를 사귀었고,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부족했는가?’
연호정에게는 절대 맹주가 되지 않겠다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여러 사람을 사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며, 모용우의 마음에도 열망의 씨앗이 고개를 들었다.
‘해 보고 싶다.’
무림맹주가 되고 싶은 욕구?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욕망은 무림맹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해 보고 싶다.
한 번 사는 생, 강호 무림에서 태어난 칼잡이로서 무림맹주는 물론 지금껏 내가 겪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아 보고 싶다.
책임 있는 자유를, 내 목숨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하루하루 누려 보고 싶다.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는 모용우를 보며, 모용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처럼 올바른 욕망을 품지 못했다. 하지만 너라도 올바르게 일어났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나대로 내 길을 찾을 것이니 너도 너만의 길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하하, 핏속에 들어찬 천성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이지. 너도 어쩔 수 없는 모용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