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6)
986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3)
공공대사에게 간략히 인사를 하고 청해 건에 대해 보고를 마친 연호정은 곧장 연가의 거처로 향했다.
묵룡부 소부주의 신분이지만, 이제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희한하군.’
감시하는 사람은 없지만 흘겨보는 사람은 많다.
연호정은 이상함을 느꼈다.
‘적대적인 시선이 꽤 늘었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 싫은 걸 넘어서 역겨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가.’
대다수가 그의 귀환을 환영했지만, 여전히 흑도로 이적한 연호정의 판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건 당연하다. 흑도인에게 목숨을 잃은 백도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것은 누가 더 피해를 보았느냐 따위의 말로 증오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죄송했는데.’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이름은 중원에서도 유명하다. 육대세가의 가주인 동시에 최연소 성천의 아비이며, 나아가 그 자신이 무극에 올랐다는 소문도 천하로 퍼져 나가는 중이다.
당연히 지금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연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연가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무림을 상대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당장 연가에 무극을 뚫은 초고수만 둘이 있다. 연가 자체의 병력도 상당하지만, 두 고수가 작정하고 움직이면 대문파 두세 개가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 연가 자체가 무림맹의 봉공 가문이고, 장남은 묵룡부의 소부주다.
말하자면 흑백 양쪽에 있어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가문을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평생을 올곧게 산 가문의 주인으로서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증오로 얼룩진 시선을 받는 것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으로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마음은 좋지 않으실 게 분명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이지 불효만 하는구나.’
그래도 아버지께서 이해해 주셨으니 다행이다.
연호정은 믿었다. 자신의 판단이 흑백의 두 세력을 완전히 하나로 합치지는 못할지언정 삼교를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그렇게 씁쓸하다면 씁쓸한 마음을 안고 거처로 들어갔을 때였다.
쉬이이익!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위협적으로 쏘아진 검이 연호정의 목을 노렸다.
티잉!
빠르게 손등을 쳐올려 검을 튕겨 내니, 어느새 묵직한 대도(大刀)가 열화와 같은 힘을 품고 횡격으로 짓쳐들어왔다.
연호정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아무런 기세도 없다가 일순간 화기를 방출하며 휘둘러지는 칼날의 위세가 대단했다.
나아가, 그 찰나와도 같은 순간 기세의 수급을 벼락처럼 해낸다. 이런 것은 구파의 장문인들조차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쩌엉!
광룡부를 내려 칼날을 막았다.
창봉을 타고 오르는 울림이 굉장했다. 그 울림 속에는 수천 개의 바늘로 나뉘어 찌르고 들어오는 침투경이 섞여 있었다.
‘……!’
연호정은 또 한 번 놀랐다.
빠르고 화끈한 칼질로 단숨에 적을 쪼개 버리는 것이 이 도법의 요체였다. 화기(火氣) 그 자체로 위력을 내기보다는 화기의 응축된 폭발로 도력(刀力) 자체를 끌어올리는 게 상천뇌화도(翔天雷火刀)의 핵심인 것이다.
한데 지금은?
‘이렇게 정교하고 날카로운 침투경이라니!’
치이이익!
광룡부로 침투한 화기가 허연 아지랑이가 되어 흩어졌다.
일순간 침투하는 화기의 공격에 놀랐지만, 그것은 상대의 도법이 이전과 다르고 그간 보여 주지 않았던 능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 침투경 싸움은 연호정에게 지극히 익숙했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크게 휘둘러 상대를 튕겨 내려 한 순간.
훅!
날카로운 바람처럼 접근한 검객이 삼검(三劍)을 내쳐 왔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검기?’
흩어지는 검, 환상처럼 세 개로 나뉜 검 하나하나에 소름 끼치는 검기가 담겨 있었다.
무형의 검기로 검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베려는 것이 아니라, 검신 내부에 강력한 검기를 심어 놓았다. 검기를 응축시켜 검력(劍力) 자체를 크게 키워 낸 것이다.
연호정의 왼손이 움직였다.
쩌정! 쾅!
오른팔에 쥔 광룡부로 도객을 튕겨 내고, 왼손 번천장으로 삼검을 쳐 냈다.
“……?!”
연호정의 눈이 또 한 번 부릅떠졌다.
황룡기가 실린 번천장으로 쳐 냈는데도 검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검에 실린 검기는 사라졌다. 번천장의 장력과 부딪쳤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검에서 사라진 검기는 어느새 검객의 몸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세 줄기 검기가 몸을 휘감아 돈다. 반투명한 회색빛 검기는 마치 이승에 떠도는 유령과 같았다.
‘저게 뭐지?’
그간 보여 준 적 없던 능력이었다.
궁금한 것은 유지 자체에 내공 소모가 상당한 저 행위를 왜 굳이 지속하고 있냐는 것인데.
화르륵!
하늘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든 연호정의 얼굴에 흥분이 깃들었다.
‘이놈들 봐라?!’
튕겨 나간 도객이 재차 달려오며 태산압정의 일도를 내리치는데, 놀랍게도 칼 주변에 이글거리는 화기가 그득했다.
넘쳐나는 화기는 공기를 잡아먹고 눈 깜짝할 시간마다 더 화려한 힘을 뽐냈다. 내력이 부족한 고수는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을 만큼 강력한 밀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불이 하늘을 가렸다면, 귀신은 대지를 휘젓는다.
유령인지 귀신인지 모를 무언가를 몸에 휘감던 검객이 낮은 자세로 검을 휘두르는데, 참격(斬擊)의 투로 끝으로 휘어진 검기가 크게 살아났다.
마치 거대한 낫을 연상케 하는 검기였다. 목숨을 수확하는 사신의 일검이었다.
연호정의 양손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광룡부로는 승공세의 힘을 대폭 감소시켜 올려 치고, 왼 주먹으로는 진악권의 힘을 넓게 퍼트려 짓누르는 방식으로 내려쳤다.
콰쾅!
화려한 폭음이 울렸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경력이 색색의 빛을 발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찬탄이 절로 나오는 화려한 부딪침이었다.
그때, 연호정의 눈이 검객에게 닿았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밀려 나갔지만 눈빛은 더 날카롭게 빛난다.
날카롭게 빛나는 것은 눈빛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낫 모양의 검기가 그의 몸 주변으로 다가오더니, 기존의 세 검기와 나란히 회전하며 주인을 보호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연호정의 눈이 진지해졌다.
검객의 몸을 휘감은 검기가 많아질수록 검객의 기세는 더 어둡고 강력해졌다.
특유의 단단하고 뾰족한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밤하늘보다도 어둡고 차가운 강철보다도 단단한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빠르다!’
느슨하게 서 있다가 검을 내치는데, 어느새 코앞 반 자 거리까지 다가왔다.
이 정도로 빠른 쾌검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쾌검, 쾌공의 영역으로만 봤을 때 물리적으로 이만한 속도로 휘두르는 고수는 성천을 제외하곤 몇 명 본 적이 없었다.
강호 정상급의 쾌검이었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검첨에서 흘러나오는 검기가 천돌혈을 노리고 있었다. 정교함까지 갖추고 있단 뜻이다.
쩌어엉!
처음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연호정이 손가락으로 검날을 튕기며 검객에게 광룡부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대기가 숨을 죽이는 듯했다.
태산이라도 가를 듯 휘둘러지는 광룡부는 앞선 도객의 일도양단과 차원이 다른 기세를 담고 있었다.
실제 위력은 기세보다 낮다. 연호정의 의지가 그러했기에, 광룡부는 위력보다 훨씬 더 강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하지만 고수들 간의 격전에서는 기세 자체가 또 다른 공격과 같다. 파멸적인 기세로 마음이 흔들리면 무공 전개에 이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검객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해일처럼 다가오는 기세를 보고 순간 눈이 흔들렸지만, 곧장 다리와 검을 움직였다.
쩌어어엉! 화아아아악!
연호정이 탄성을 질렀다.
순식간에 외측으로 돌아가 검첨으로 도끼날 면을 찌르는데, 그 찌르는 부위가 발경의 맥점이었다.
도끼의 기세가 확 쪼그라들고, 쪼그라든 만큼의 기세를 검에 담은 검객이 역동적으로 이검(二劍)을 휘둘렀다.
쩌저정!
묵직한 진악권으로 검객을 튕겨 냈는데, 주먹에 남은 충격량이 상당했다.
‘놀랍군.’
검기를 몸에 두른 만큼 검력이 강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끼에 실린 무형의 기세를 빼앗아 와 또 한 번 검력을 끌어올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검기는 내 일부나, 상대의 기세는 상대의 것이다.
한데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휘감아 폭발적인 힘을 자아내는 검법을 보여 준다. 성장 이전에, 이런 식의 검기(劍技)가 존재한다는 걸 상상도 못 했다.
파바바박!
허공 세 방위에서 돌풍처럼 일어난 화기가 뾰족하게 날을 세워 연호정을 노렸다.
찌르고 들어오는데도 베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 칼을 휘두르지 않았는데, 세 갈래 도격이 쏟아지는 듯했다.
쩌어어엉!
광룡부를 휘둘러 화기를 소멸시켰지만, 뒤이어 다가온 대도는 어느새 연호정의 쇄골을 내리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벼락처럼 공격하는 이 수법은 귀검(鬼劍) 중 귀신검(鬼神劍)의 요체와 비슷했다.
반대로, 검객의 무공은 화기의 폭발력으로 도력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상천뇌화도와 비슷했다.
퍼억!
대도를 휘두르기도 전에 품으로 들어가 어깨로 들이받았다.
그렇게 검객과 도객 모두 후방으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둘 다 안색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내상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한 공력을 소모한 듯했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뜨거운 공기가 흩어지고, 순식간에 차가운 한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대단하다.”
연호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크게, 그것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어.”
검객, 강량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역시는 역시군요. 상처 하나 내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애써 가꾼 무공이 이렇게 쉽게 막힐 줄은 몰랐습니다.”
도객, 진양이 투덜거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괜히 낯짝 부끄럽게 이따위 짓 하지 말자고 했잖아. 언감생심 성천을 어떻게 이기냐?”
“이기자고 싸웠으면 독이 든 술이라도 건넸수다. 이건 증명이잖수, 증명.”
“뭘 더 증명해, 저 인간 같지 않은 양반한테.”
강량이 연호정을 보며 웃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최소한 누님 수준까지는 올라오라고 했었지요?”
“……!”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로 달성해 보려고 노력한 거냐?”
“숙제를 내 줬으면 어떻게든 풀어야지요. 그래서, 이 정도면 어떤 것 같습니까? 장소가 협소해서 다 보여 주진 못했지만, 형님이라면 우리 기량을 다 알아볼 거 아닙니까.”
“솔직히 묵비한테는 아직 안 돼.”
“……시불, 역시 그런가.”
“다만,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한다.”
“……!”
“특히 두 사람이 서로의 무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거의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겠어.”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숙제는 다 못 풀었지만, 몇 단계 앞까지 예습을 해 놨구나.”
강량과 진양의 얼굴에 뿌듯함이 어렸다.
쿵.
광룡부를 내려놓은 연호정이 두 사람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고생들 했다. 다시 봐서 반갑다.”
느닷없는 포옹에 당황한 강량이 헛기침과 함께 투덜거렸다.
“이 정도도 안 보여 줬으면 반갑지도 않았죠?”
“오자마자 피 터지게 수련시켰지, 인마.”
“…….”
“어쨌든 발전했잖아? 그럼 된 거지.”
“같이 다니기 힘들어, 이래서.”
강량도 진심을 담아 연호정을 안았다.
괜스레 어색해진 진양은 슬그머니 빠져서 팔짱을 낀 채 몸을 돌렸다.
‘사내놈들이 왜 저러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