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8)
988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5)
끼이익.
문이 열렸다.
좌우로 열리는 문 너머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의 발걸음은 묘하게 느릿해 보였다.
실제로도 느렸다. 하지만 그것이 답답하거나 미적지근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다만 그 여유 속에서도 은근한 긴장이 엿보였다.
기묘한 분위기.
거리낄 것 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타인은 알 수 없는 상념을 품었다. 그 상념을 떨쳐 내지는 못했으되 그 상태 그대로도 괜찮다. 걸음이, 눈빛이, 기도가 스스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이군.’
보자마자 알았다. 직감했다.
지금 자신이 보는 모용군은, 과거의 그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야. 정말 그 모용군이 맞나?’
성격은 똑같을 것이다. 평생을 그리 살았다. 쉽게 달라질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그로 인해 드러나는 행동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칼은 칼일 뿐이다. 살인마의 손에 들리면 사람 죽이는 살도(殺刀)가 될 것이요, 백정 손에 들리면 고기를 써는 육도(肉刀)가 될 것이고, 의원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살리는 생도(生刀)가 될 것이다.
칼의 날카로움은 변하지 않는다. 모용군의 성격이 그러했다.
그러나 칼의 쓰임은 변할 수 있다. 모용군의 변화가 그러했다.
그렇게 과거의 자신을 품은, 동시에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돌린 올바른 변절자가 나타났다.
“…….”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겁고 기묘한 분위기에 강량과 진양조차도 주춤했다. 특히 강량은 과거 연호정과 모용군의 사이가 어땠는지 잘 알았기에 더더욱 어색함을 느꼈다.
잠시 후.
“경이적이로군.”
모용군의 한마디는 강렬했다.
“패왕이라…… 그 별호를 처음 들었을 때, 참으로 자네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적어도 나의 시선에서 자네는 흑도도, 백도도 아니었거든.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전진하는 자라, 패도(覇道)라는 말이 그처럼 어울릴 수가 없었네.”
“…….”
“하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자네와 패왕이라는 별호는 묘하게 안 어울리는구먼.”
“그렇소?”
왠지 연호정의 목소리가 잠긴 듯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한창 날뛸 때의 자네는 마귀보다도 더 사납고 무서웠지.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군. 망나니 같던 과거와 달리 묘한 품격까지 보여.”
“당신도 많이 달라졌소.”
“그런가?”
연호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당신의 변화를 듣고도 설마설마했소. 내가 믿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모용가주의 변화를 말했지만, 쉬이 믿기 힘들 만큼 화려한 악행을 자랑하던 사람이 당신 아니오?”
“악행이라…… 그래, 악행이었지.”
바로 이 부분만 봐도 그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모용군은 과거 자신의 행동이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악행이란 자존심을 꺾는 일이었고 외세에 굴복하는 일이었으며, 한 번 사는 인생을 불태워 볼 시도조차 못 하는 패배자들의 자기 합리화 따위였다.
빈말로도 자신을 악하다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악행이라고 말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게. 나는 달라지지 않았어. 그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했을 뿐.”
“사람들은 그걸 변화라고 하오.”
“내 기준에서는 변화가 아니야. 그저 내가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더 제대로 살아 보려는 시도에 불과할 뿐. 나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네.”
“미화가 지나치시군.”
“남들 앞에서는 이런 소리도 못 하거든. 서로 욕을 퍼부어 대도 다음날 웃으며 볼 수 있는 자네 같은 사람 앞에서나 이런 말을 하지.”
“웃기는 했지. 속으로는 칼을 갈았지만.”
“그래서, 지금도 내게 칼을 갈고 있나?”
“당신을 향한 비수는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있소. 뽑아 드느냐, 가만히 놔두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애석하군.”
애석하다면서도 모용군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제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정말 적응이 안 되오. 여하간 여기까지 오셨는데 안으로 들어오시오.”
“내가 들어갈 게 아니라 자네가 나와야지.”
“……?”
“군사부로 갈 거 아니었나?”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 아셨소?”
모용군이 강량과 진양을 바라보았다.
“말 안 했나?”
두 사람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연호정은 두 사람이 제게 말하지 않은 뭔가가 또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자신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용군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대사님께 들었네. 두 사람의 일, 중재한 것은 군사라고 하더군.”
“…….”
“물론 군사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저 둘은 칼을 뽑지 않았을 거라고 했네. 대신 속이 말이 아니었겠지.”
“그렇군.”
연호정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제갈 군사님을 이해합니다.”
“그러냐.”
“무림맹은 거의 국가 조직에 준할 만큼 거대한 연맹체입니다. 그런 곳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하는 것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겠지요.”
“…….”
“저희는 그걸 이해했습니다. 속이 쓰리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
“남들도 다 그렇게 삽니다. 오히려 무림인들이 비정상일 수도 있어요. 칼부림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냥 넘길 만한 일도 생사를 두고 싸우지요.”
“틀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인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논하기 전에 행위의 옳고 그름을 논해야겠지. 화를 억누르고 참아 준 너희에게 고맙긴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놈들이 옳다거나 잘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압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너희는 어쩔 수 없어도, 군사는 어쩔 수 없어선 안 되었다.”
군사님이 아니라 군사다.
제갈문호에게 실망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위해서 일부러 싸늘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림맹은 국가 조직에 준할 만큼 커졌지만, 국가는 아니다.
오히려 군벌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그리고 어떤 군벌이든 규율이 중요한 법, 신상필벌이 확실하다면 규율을 어기는 자에 대한 처벌도 확실해야만 한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제갈문호의 대처는 아쉬운 면이 있었다. 일부러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실수가 명백한 것이다.
연호정이 모용군에게 물었다.
“군사부로 갈 거요?”
“지금쯤 자네도 움직일 것 같아서, 마침 같이 가면 되겠다 싶었지.”
막상 군사부에서 처음 마주했다면 꽤 어색하긴 했을 것이다.
연호정이 강량과 진양에게 말했다.
“다녀오마. 푹 쉬고 있어.”
“형님.”
“부끄러워할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니다. 너희의 대처는 성숙했다. 다만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만든 모두의 책임이 클 뿐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모두를 안심시키는 그 웃음이었다.
“갔다 와서 술이나 마시자.”
* * *
군사부로 향하는 길.
절반이나 왔음에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길을 걸을 뿐.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지만, 그럼에도 어색함은 없었다.
사람 관계에서 어색함이란 본디 관계 자체에 신경을 쓰는 이들이 관계가 삐걱거릴 때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그런 면에 있어서 두 사람은 평범한 이들과 달랐다.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위치지만, 상대가 누구라도 나만의 길을 고수하는 고집불통들이라 이럴 때는 오히려 좋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말없이 걸을 수는 없는 노릇.
먼저 입을 연 것은 모용군이었다.
“무림맹에 불순분자들이 많아졌다고 하더군.”
“불순분자?”
“흑도를 몰아내고 본래의 백도로 돌아가자고 난장을 피우는 것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불순분자라기보다는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겠지.”
“그게 불순분자지. 적은 아군의 패망을 원해. 하지만 그게 꼭 적일 필요는 없지. 아군이 위험에 처하길 원하는 자뿐만이 아니라 생각 없이 그 길로 인도하는 이들 모두가 불순분자야.”
확실히 모용군은 모용군이다.
변화했지만, 그 성격까지 변하진 않았음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소.”
“자네 생각은 다른가?”
“사람 감정이라는 것이 어제 다르고 오늘 또 다른 법 아니오? 내 형제들이 겪은 사건은 나도 화가 나지만, 이해하려면 못할 것도 없소.”
형제라는 표현이 참으로 살갑다.
연호정이 모용군의 변화에 놀랐다면, 모용군 역시 연호정의 변화에 놀랐다.
물론 연호정은 모용군만큼의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준마와도 같았으니까.
다만 모용군은 과거의 연호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연호정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보검이다. 다만 그 보검은 천변만화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 적을 향할 때는 마검(魔劍)으로 변하지만 내 사람을 향할 때는 휘두르기도 힘들 만큼 맹한 나뭇가지로 변한다.
모용군은 연호정의 날 선 모습만 보았을 뿐, 유순한 면모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하지 않겠다, 이것인가?”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오. 말이 나온 김에, 가주께서도 온갖 협잡을 저질렀지만 기어이 삼교와는 손을 잡지 않았잖소?”
“…….”
“흑도라고 통칭하지만, 그 안에는 범죄를 예사로 저지르는 악인이 수두룩하오. 힘만 믿고 설쳐 대는 잡배도 많지. 그런 이들에게 피눈물이 날 만큼 당한 백도인도 많을 거요.”
“……그렇겠지.”
“어쩌면 너무 일렀는지도 모르겠소. 흑과 백의 연합 말이오.”
“이르지는 않았지. 다만 조금 말랑말랑했을 뿐이야.”
“그걸 군사님께서도 모르진 않으셨을 터.”
“당연히 그렇겠지.”
모용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는 한산했다. 하지만 이 한산한 거리를 걷는 몇몇 무사들이 연호정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힐끔거리는 눈가에 말 못 할 감정이 드리워져 있음을 모용군은 알 수 있었다.
증오, 동경, 회한, 아쉬움, 분노, 질투, 경탄…….
모용군이 혀를 찼다.
“거창하게 대의 따위 들먹일 필요는 없지만, 참으로 답답한 위인들이로세. 감당치 못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맹을 나가 버리든가 하지.”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지.”
“쉽지 않은 선택이 아니라 쉽게 살려고 저러는 것이야. 흑도가 그렇게 싫었다면 차라리 탈맹하는 것이 나았어. 무림맹과 함께하지 않아도 삼교와 싸울 방법은 많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모용군이 하는 말이기에 그 발언은 설득력을 얻는다.
“탈맹하면 문파의 권리를 잃을 것 같고, 그러다 전쟁이 벌어지면 제대로 참전하지 못해 손가락질을 받을까 무섭고, 나아가 참전 문파라는 간판을 올리지 못하면 겁쟁이로 오인당할까 걱정했겠지.”
“…….”
“멍청한 인간들이야. 참전 문파로서 목숨 걸고 싸우려 하는 이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하거늘.”
“그런 단순한 문제만은 아닐 것이오.”
“당연히 아니겠지. 이 사태를 일으킨 자들, 그리고 그에 선동당한 자들은 권력의 중추로 나아가려 할 것이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노 자체가 아니야. 진짜 분노했다면 맹을 나갔거나 울며불며 소리라도 질렀을 터.”
모용군의 눈이 암흑을 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이용해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네.”
“…….”
“만에 하나 성공한다면, 나중에는 말하겠지. 본인들의 길은 옳았다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
“나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멍청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네. 삼교를 제외한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