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0)
990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7)
“혹시 남궁입니까?”
제갈문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차를 마시며 목을 축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부주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일부러 중심 화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대답부터 하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소부주는 삼교를 증오하지?”
무슨 의미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연호정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삼교를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문호도 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 터다. 그 또한 궁금했지만, 연호정은 잠자코 답했다.
“간단합니다. 그들의 침공이 내 터전, 내 가족, 내 고향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것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렇지.”
“나아가 그들의 방식도 문제입니다. 새외의 침공은 언제나 있어 왔고, 우리는 언제나 싸워 왔습니다.”
“음.”
“우리 입장에서야 중원을 침공하는 이들은 누가 되었든 적입니다. 이해를 넓혀, 그들도 사람이니 우리가 잘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는가 따위의 대답은 의미가 없지요. 차라리 공식적으로 힘 싸움을 벌이자고 천명했다면 모를까, 놈들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최소한의 도리도 없이 온갖 악업을 일삼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천 낙원소의 일이 있었다.
거기에 넘어간 놈들도 문제지만, 사람을 납치해 성욕을 해소케 하거나 인육을 제공하는 등 입에 담기도 힘든 짓거리를 벌이게 했다.
실제 행동도 그렇고, 그러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도 문제다.
전쟁에 선은 없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저질러야 하는 것이 전쟁이라면,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전쟁 역시 사람이 벌이는 것.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라면 응당 알고 있는 무의식의 선을 넘었다면, 이는 분명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고로,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게 중요했다.
“그것이 제가 삼교를 증오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중언부언할 것도 없습니다. 공격이 들어온 순간, 우리에게는 적입니다.”
“…….”
“적과 어떻게 싸울지, 싸움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를 고민해야지, 진정 그쪽이 적인가에 대한 물음은 의미가 없지요.”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동감이오. 아니,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해야 하오.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진짜로 죽이는 사람은 많지 않소. 진짜로 죽이는 그 순간, 관계는 변하는 거지.”
즉, 삼교는 실질적으로 중원 무림을 타격해 왔기에 적인 것이다.
이보다 더 간단하고 확고한 논리는 달리 없다. 삼교가 무엇을 했고, 어떤 사상을 가졌으며,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따위는 논할 가치가 없다.
삼교는 침공을 선택했다.
고로 적이다.
그것이 연호정의 말이었고, 모용군의 마음이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부주의 말이 맞네. 모용가주의 말씀도 옳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리 몰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지요.”
“그렇습니다.”
“나아가 실질적으로 숱한 교전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입으로 중원으로 진출하겠다 천명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적이 없겠지.”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흑도는 어떤가?”
“백도 입장에서는 명백한 적이겠지요.”
“그렇지. 또한 흑도 입장에서도 백도는 적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도 정파를 자처하는 만큼, 우리 입장에서 말해 보겠네. 우리에게 흑도는 사실상 삼교보다도 더 위험천만한 적이라네.”
적이었다가 아니라 적이란다.
확정적으로 말하지만, 연호정은 제갈문호가 냉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으나, 동시에 제삼자의 눈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었다.
“시작이 언제인지, 어디서부터였는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네. 흑도와 백도는 오랜 시간 반목했고,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로 발전했지. 중원 무림 전체로 본다면야 내분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서로의 영역이 너무나도 확고하여 쉬이 뭉칠 수가 없었네.”
당장 백도 문파 출신 무사의 칼에 죽은 흑도인들도 많고, 흑도 문파 출신 무사의 창날에 죽은 백도인들도 많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서로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서로를 왜 증오하는지조차 모호했다. 물론 사적인 원한이 깊은 이들은 제외해야겠지만, 대다수는 그저 백도라는 이유로, 흑도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선입관이란 인간 사회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것일세.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수양과 이 세상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필요할 것이네.”
“일정 부분 동감합니다.”
“즉, 백도와 흑도가 연합하여 삼교를 치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현실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보시오, 군사. 설마하니 지금 흑백 연합을…….”
“하지만 그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성사되었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일이, 작금의 무림에서 현실로 일어났다는 말이야.”
제갈문호가 연호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바로 소부주, 자네 덕분일세.”
“…….”
“물론 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동조하였고, 현실을 받아들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했네. 그중에는 맹주님도 계시고 나도 있으며, 여기 모용가주께서도 그러하셨지.”
연호정은 말없이 제갈문호를 바라보았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백하겠네. 나는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연합이 실제로 이뤄진 것을 보며, 며칠 동안 쉬이 잠들지 못했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그만큼 흥분되는 일이었네. 나 역시 소싯적부터 흑도 사파를 멀리하고 나아가 제거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어린 내 마음에 그들은 미지의 존재였을 뿐이야. 그때는 흑도인들을 본 적도 없으니, 막연히 머리에 뿔이 있고 둔부 위에 기다란 꼬리가 달린 줄 알았네.”
심각한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분위기가 더 무거워지지 않게 조율하는 능력이었다.
제갈아연이 살짝 미소를 지었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후 세상에 나와 숱한 흑도인들을 보았네. 과연 품격이 없고 잔혹하며 온갖 범법 행위를 당연하다는 듯 저지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네. 그러나 흑도를 자처하면서도 호협하고 의리가 있어, 어떤 백도인보다도 무사다운 이들도 적지 않음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네.”
“흑도 무림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요.”
“그래,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저런 사람들도 있는 법이지. 그러나…….”
“…….”
“모두가 그처럼 냉정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연호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성사된 것을 목도하며 밤잠을 설쳤지만, 이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걱정이 깊을 수밖에 없었네.”
“…….”
“백과 흑, 흑과 백의 연합은 너무나도 빠르고 부드럽게 성사되었다네. 아는 사람 눈에는, 그토록 평화로운 과정을 위해 무수히 많은 희생이 뒷받침되었음이 보였을 걸세.”
“애석하게도,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요.”
“정확하네. 심지어 아는 사람이라도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들은, 이성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거부감을 느꼈겠지.”
“사람은 감성적인 존재이니까요.”
“그렇다네. 나는 그 부분에 집중했네. 그리고 생각했네.”
제갈문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만에 하나 곧 전쟁이 터진다면 흑과 백이 진정 손을 잡고 삼교와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부로 느낄 만큼 전쟁이 가시화되지 않는다면 흑과 백 양쪽 모두에 필경 불만이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갈문호는 오랫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이어 왔다.
연호정은 제갈문호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진심을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제갈문호는 백도 무림 연맹의 총군사다. 그 정도는 당연히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민이 깊었네. 만약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겉으로는 평화롭고 부드러웠던 이 연합에 어떤 문제가 터지게 될까? 아니, 문제가 터지는 것은 필연이야. 그렇다면 언제가 될까? 얼마나 심해질까?”
“…….”
“그렇다고 대뜸 우리의 주적인 삼교를 상대로 당장에 전면전을 선포할 수도 없었네. 벌레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 불만들을 잠재울 수 있을까?”
“…….”
“사실, 답은 간단했네.”
모용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여론 몰이.”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 정치학의 기본이지요. 적의 적은 친구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적이 존재함을 인식해야 내 다른 적과 손잡을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위험하지.”
제갈문호가 빙긋 웃었다.
그렇게나 야위었는데도 웃음에 힘이 담긴다. 연호정이나 모용군이나, 중원 정점을 논할 정도로 뛰어난 안목과 두뇌를 지닌 이들이다. 그런 이들과 대화를 나누니 군사로서 절로 힘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여론 몰이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되,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 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흑백 연합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무림맹 수뇌부를 향한 강력한 불신마저 생기게 되겠지요.”
“그렇지.”
하나가 되어 상대해도 승패를 장담키 어려운 마당에 분열되어 싸운다면 패배는 확정이다.
철천지원수와 같던 흑백이 손을 잡았다. 연호정을 위시한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그것이 가능했다.
제갈문호는 절대 이 관계가 깨지게 놔둘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부도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둘 사이의 결속을 단단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일로 고민이 깊어만 갈 때,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네.”
“누구입니까?”
“남궁인.”
순간 연호정과 모용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궁인. 남궁가주.
당대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검제 남궁승의 아들이요, 무림맹 봉공의 일원이자 장강 이남 안휘성의 패자로 이름을 날린 뛰어난 수완가.
“야심한 시각이었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동시에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불안과 체념을 두 눈에 담은 채 나를 찾아왔었네.”
“…….”
“그가 말하더군. 흑백 연합은 옳지 않다고, 당장 봉공회의를 열어 달라고 했지. 그 안건에 대해 반드시 논의를 해야 한다고.”
모용군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반대로 연호정의 눈은 신중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했을 때, 그는 말했네. 만에 하나 그 안건으로 회의가 열리지 않는다면, 남궁가를 비롯해 뜻을 함께하는 문파들은 전부 무림맹을 이탈하겠다고 했네.”
“…….”
“자, 소부주에게 묻겠네. 남궁가주 남궁인이 왜 갑자기 날 찾아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했을까?”
연호정의 볼이 꿈틀거렸다.
“진심이 아니었군요.”
“…….”
“남궁가주, 남궁인이 삼교 측에게 모종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