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1)
991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8)
제갈아연은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모용군 역시 놀랐지만,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물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가?”
“남궁가주는 탐욕스러운 자입니다.”
연호정이 한 모금 물로 목을 축이곤 말을 이었다.
“한 성(省)의 패주를 자처할 만한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완이 좋고 명문가의 피를 이었으며, 심지어 그 가문의 주인이기까지 하니까요. 당장 무력만 해도 구파일방이나 여타 육가 수장들에 비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남궁가주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위대한 아버지를 둔 자식은 대개 둘 중 하나의 길로 빠지게 되지요.”
연호정은 당관을 떠올렸다.
그리고 연위를 떠올렸다.
“아비의 그늘에 삼켜져 뭘 해도 부족함을 느끼게 되거나, 그늘을 찢고 날아올라 아비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하늘로 날아오르게 됩니다.”
연위는 대단한 가주였다.
엄격하고 신상필벌이 확실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지독하게 답답했지만 그가 전통적인 정파 무가의 주인이자 위대한 검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동생의 재능을 질투하여 엇나갔지만, 실상 연호정이 어린 시절 망가졌던 이유는 연위의 그림자가 컸기 때문이다. 연지평의 존재는 시발점이 되었을 뿐, 근본적인 원인은 환경 그 자체에 있었다는 말이다.
연호정은 무너졌고, 가문이 몰락한 후 세상에 나와 신선과 같은 스승 덕에 재기하였다.
당관은 어떠했나.
타고난 성정이 독하고 강한지라, 연호정처럼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아비와 싸우기까지 한 그였다.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후 기어이 당가의 주인이 되었지만, 스스로 이룬 위치와 강력한 무공에 대한 자신감을 제외하면 당관 역시 망가진 채로 자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자신을 돌아본 그는 기어이 아버지와 화해하고 크게 성장하여 비로소 무극을 열었다.
그렇다면 남궁인은?
“남궁가주는 스스로의 재능이 부족하다 여겨, 그 이상의 경지로 오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자식들에게 꿈을 맡겼지요.”
“…….”
“중요한 건 남궁가주가 포기한 사실이 아닙니다. 남궁가주의 상황 자체에 있지요. 그 상황이 남궁가주의 욕망이 향하는 방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욕망이라 함은?”
“그는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대 무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궁인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남궁세가의 검법은 강호 일절입니다. 검학만 놓고 보면 천하제일을 다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검제가 등장했으며, 천하제일검가라고도 불렸지요.”
“그랬지.”
“하나 남궁인 대에 이르러 그러한 평가는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검제 노선배의 현역 은퇴를 기점으로 그러했지요. 말하자면, 검제 노선배 한 명의 위명이 천하 무림인들의 인식을 바꿔 버린 겁니다.”
제갈문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만큼 될 수 없다는 걸 자각한 남궁인은 자식에게 그 길을 걷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지요. 그는 가주입니다. 자신의 치세 아래, 세상 사람들의 평이 달라지는 것을 묵묵히 참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즉, 남궁인의 욕망은 남궁세가의 위명을 천하제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천하제일이든 고금 제일이든, 남궁인은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권력이어도 좋고, 단순한 명성이어도 좋습니다. 그는 최고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한데 그의 욕망이 이 대화에서 왜 중요한가?”
“욕망에도 선(線)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지요.”
“선.”
연호정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가주께서는 왜 삼교와 손을 잡지 않았습니까?”
느닷없이 민감하고 위험천만한 질문을 던진다.
모용군은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그깟 놈들과 손을 잡을 바에야 차라리 무림맹주 자리를 포기하는 게 나으니까.”
“가주께서 품었던 욕망은 엄청났습니다.”
“얼마나 엄청났으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네. 공공대사를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갈 뻔했지. 이제는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생겼는데도 당장에 쓰러트리고 맹주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네.”
모용군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력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그 정도로 원하는 자리인데, 어찌 물러나셨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 때문이지. 무림맹이 사라지면, 앞으로도 맹주가 될 기회는 없어. 설령 맹주가 된다 하더라도…….”
모용군의 눈이 서늘해졌다.
“중원은 내 터전일세. 차라리 칼을 물고 엎어질지언정 그런 놈들과 손을 잡고 중원이 멸망하는 꼴을 볼 수는 없어.”
연호정이 제갈문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이겁니다.”
“남궁가주도 비슷한 마음이라 생각하나?”
“모르지요. 다만 모용가주께서 최후의 선을 넘지 않도록 만든 것이 더 강한 증오라면, 남궁가주가 최후의 선을 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검제 남궁승.”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가주가 깨달음을 얻기 전이었다면, 아마 암왕 노선배를 무시하고 멋대로 일을 처리했을 겁니다. 애초에 절연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싸웠으니까요.”
“…….”
“남궁가주는 다릅니다. 그는 검제 노선배를 미워하고 껄끄러워하는 동시에 존경하고 아비로서 사랑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애증이지만, 증오보다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훨씬 크단 말입니다.”
제갈문호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쉬쉬하고 있을 뿐, 남궁인을 한 번이라도 주시해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사람 자체를 분석해 본 이라면 말이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의 근원에는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은 아들의 몸부림이 있었다…….”
“군사님께서도 알지 않으십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알고 있네. 다만,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네. 남들과 대화하기에 좋은 주제도 아니고.”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네. 자네 말마따나, 나는 남궁가주를 그런 사람으로 보았네. 아닌 말로 남궁가주는 누구 못지않게 최고를 노리고 있지만, 그것은 인정 욕구의 발로일 뿐 온전한 권력욕의 소산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즉, 남궁인이 야심한 시각에 제갈문호를 찾아와 흑도와는 어울리지 못하겠다, 회의를 열지 않으면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탈맹하겠다고 폭탄선언을 던진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남궁인이 도리를 알거나 선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멍청해서가 아니라, 아예 고려해 보지도 않았을 사항이기 때문이다.
삼교와 손을 잡는다?
삼교와 손을 잡다가 무너지는 이들을 봉공들은 많이 봐 왔다. 오히려 실무진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교를 우습게 볼 가능성이 높다. 내내 승전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남궁인이 제정신이라면 삼교와 손을 잡았을 리 없다. 또한, 흑도와의 연합을 해제하자는 말을 할 수도 없다.
흑백 연합을 깨 버리자는 것은 곧 숱한 봉공들에게 엄청난 정치적 압박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일뿐더러 최고를 바라는 남궁인의 욕망상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선택지란 말이다.
결국 답은 하나다.
“남궁가주는 삼교의 세작, 혹은 삼교와 연관된 모종의 일로 협박을 받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연호정의 결론이었다.
짧은 순간 곧바로 거기까지 생각해 낸 그 두뇌가 참으로 두렵고도 든든하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부주 말이 맞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로군요. 삼교의 세작이 마지막 발악을 할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연호정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그전부터 이 점을 우려한 모용가주는 세작 잡는 전문 부대까지 양성했지요. 그런 부분은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숨어서 정보를 빼돌리는 이만이 세작인 것이 아니다. 회유, 협박, 사상 주입 등등 적의 조직에 온갖 분탕질을 치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세작이라고 한다.
현재 강호 무림과 삼교를 위시한 새외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삼교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전술은 뻔하고도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무림 연합의 분리다.
전략 전술의 최고봉은 이겨 놓고 싸우는 것이요, 차선은 약하게 만든 후 싸우는 것이다.
이겨 놓고 싸우는 건 실패했으니 최대한 약화시킨 후 싸우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방식 때문에 연호정은 삼교의 노림수를 남들보다 훨씬 더 잘 알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면, 군사님께서 계속 두고 보신 연유가?”
“그렇다네.”
제갈문호의 눈에 은은한 분노가 일었다.
담담함을 유지했지만, 이 사태 자체에 화가 나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남궁가주가 찾아온 다음 날, 정보원들에게 맹 내 분위기를 더 예의 주시하라 명했네. 오래 걸리지도 않더군. 다음 날 저녁쯤부터 여러 술자리에서 흑도에 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네.”
애초에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치를 취할 시간도 없이 곳곳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그렇게나 빨랐다.
“성명을 낼 생각도 했네. 완곡하게 돌려 말할 생각도 했었지. 하지만 한번 불타오른 여론에 그런 발언은, 자칫 가르치려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네. 평소라면 모를까 당장 그런 대응을 선택할 수는 없었지.”
“이해합니다.”
“그래서 나는 중도를 선택했네.”
중도(中道).
심상치 않은 단어였다.
“사람들을 풀어 삼교를 잊었냐는 둥 경각심을 일으키며 싸우게 만들지 않았네. 오히려 기다려 보자고, 삼교가 언제 날뛸지 모르니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함께 참아 보자는 식으로 얘기를 풀려 했네.”
연호정과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범적인 대처다.
불타는 이들을 잠재우자고 반대 의견을 뿌려 버리면, 오히려 더더욱 불타오르게 될 것이다.
차라리 ‘너희를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라는 식의 대처가 훨씬 더 유연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미봉책일 뿐입니다.”
“나도 아네. 하지만 당장에 방법은 없었네. 변명 같겠지만, 맹 내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열두 시진이 부족한 판국이라네. 제일 우선순위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막상 고민해 봐도 방법은 떠오르지 않더군.”
순간 제갈문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래서 판을 갈아엎기로 했네.”
“……?”
“불이 타오를 대로 타오르기를 기다리자. 폭발 직전까지 인내하자.”
담담한 목소리에 강력한 분노와 답답함이 깃들었다.
“어차피 전쟁은 코앞일세. 더는 유연한 대처로 여론을 다독이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그러다가 정말 다 죽어.”
“그래서 어떻게 하시기로 했습니까?”
“현재 그 분위기에 동조하는 세력 중 삼 할이 나와 거래를 한 문파들일세.”
연호정과 모용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전 공작입니까?”
우둑.
제갈문호가 쥔 잔에 금이 갔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을 공포로 다스리고자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