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2)
992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9)
대화가 끝난 후, 식사까지 마친 두 사람이 군사부를 나섰다.
군사부 정문까지 따라 나온 제갈문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소부주에게는 내 참으로 할 말이 없네. 두 사람에게는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지 못했어. 그럴 수도 없었지만, 그것이 변명이 되지 않음을 아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다만, 확실히 서운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괜찮다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을 해야 한다. 제갈문호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든, 피해받은 사람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들어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제갈문호는 전략을 세웠고 두 사람은 그 전략 때문에 마땅한 사과는 물론 위로조차 받지 못했다.
당연히 이 부분은 제갈문호가 미안해해야 했다.
“면목이 없네. 달리 무슨 말을 하겠나. 내, 일간 두 사람을 찾아가 직접 사과토록 하겠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군사님이 움직이시면 누구인지 모를 세작 놈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겁니다. 괜한 행동으로 일을 망치게 되면, 지금껏 참고 기다려 온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허어.”
“제가 잘 말해 두겠습니다. 어쨌든 서로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정도 있었으니.”
“미안할 뿐이네.”
“대신, 소부주로서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습니다.”
연가의 장남으로서가 아니라 묵룡부의 소부주로서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말씀해 보시게.”
“시비가 붙었던 이들을 직접 찾아가려 합니다.”
“……!”
“개입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갈아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호정.”
그때, 제갈문호가 손을 들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제갈문호가 되물었다.
“소부주로서?”
“예, 묵룡부 소부주로서요.”
“연가의 장남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최연소 성천인 패왕으로서도 아니고?”
“참 버리고 싶은 별호입니다.”
한참 동안 연호정을 바라보던 제갈문호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는 참으로 많은 빚을 지는구먼.”
“모두가 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터전을 위해서라도.”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묵룡부의 작은 주인인데, 무림맹이 도움을 많이 받네.”
“도움이라고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수틀리면 저도 도끼를 휘둘러 볼 생각이니까요.”
“제발 부탁인데, 자네만은 그러지 말아 주게.”
“상황 봐서요.”
제갈문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더니 말했다.
“그러시게. 대신…….”
“죽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죽도록 괴롭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요.”
그 대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지만, 제갈문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연호정이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걸어간다 싶은 순간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고절한 보법이었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괜찮겠소?”
“괜찮을 거라고 하니 믿어야지요.”
가만히 제갈문호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군사가 무척 힘들었다는 것을 아오. 힘든 와중에도 일 처리에는 큰 막힘이 없었으니, 목숨 걸고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소.”
“과찬이십니다.”
“대신, 조언 하나만 해도 되겠소?”
모용군의 얼굴은 진지했다.
제갈문호가 허리를 폈다.
“물론입니다.”
“연호정 저놈만큼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되오.”
지금껏 제갈문호는 한 번도 연호정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둘 간의 신뢰는 누구 못지않았으며, 목숨을 걸고 뒤를 봐주는 사이였다.
모용군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미 한 번 건드렸잖소.”
“……?”
“놈의 의형제인 두 녀석이 이 일에 연관되게 했으면서 후처리는 미흡했소. 그게 건드린 거요.”
제갈아연은 사태의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떠나, 이 말 자체는 억지라고 생각했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당금 무림을 움직이는 폭풍의 핵들이 있소. 놀랍게도, 그중에 중원 최강을 논하는 성천은 몇 끼어 있지도 않소이다.”
당연하다.
그들은 최강의 반열에 오른 이들일 뿐, 정국을 주도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개인의 힘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한번 움직일 때마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으나, 정국을 주도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면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무림맹주 공공대사와 연호정, 투왕 양천과 황제 최측근 인사인 광혼귀군 곡경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항상 주시는 해야 한다. 누구라도 한번 날뛰면 재앙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러나 재앙은 재앙으로 끝날 뿐,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연호정은 달랐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내 다시 한번 말씀드리오. 그놈은 구주명가를 시작으로 꾸준히 삼교의 끄나풀들을 제거해 나갔소. 그놈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온 중원이 전화(戰火)에 휩싸였을 것이오.”
“예.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오욕을 뒤집어쓰고 묵룡부에 투신, 스스로 부주의 제자를 자처하며 흑백 연합의 연결 고리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진정 인정하고 싶지 않소이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소. 연호정 그놈은 이미 중원을 몇 차례나 구한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
“전쟁은 끝나지 않았소. 그러나 연호정 그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전쟁다운 전쟁은 벌어지지도 못했을 것이오. 이미 침략당하고 유린당했겠지.”
“…….”
“솔직히, 그놈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위기에서 강호를 구해 낼지 나는 판단이 서지 않소이다.”
제갈문호는 모용군의 발언에 놀랐다. 그의 변화가 또 한 번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원래 그랬던가.’
모용군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데 있어 상당히 솔직한 편이었다. 다만 그것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차이.
본래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또한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나는 놈과 대립했을 때도 놈의 천재성을 인정했소. 심지어 그놈은 천재라는 칭찬에 우쭐해져 오만의 늪에 빠지는 흔한 재인들과도 다르오.”
“그렇습니다.”
“그건 그놈이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서가 아니오.”
“예?”
“삼교를 무너트리는 것, 삼교를 몰아내는 것은 강호의 안녕과 직결되는 사안이오. 그리고 연호정은 삼교를 멸망시키는 데에 인생을 걸었소.”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마치, 과거의 내가 무림맹주 자리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것처럼.”
“……!”
“솔직히 말하겠소. 내가 실패하면 무림맹주가 되지 못할 뿐이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있지.”
“…….”
“하지만 연호정이 실패하면 강호가 흔들리게 되오. 나와 그놈의 차이요.”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군의 눈빛이 깊어졌다. 말 못 할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눈빛은, 그 똑똑하다는 제갈문호의 이성을 흐트러트릴 정도로 강렬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과 날카로운 안목, 비할 데 없는 통찰력으로 삼교를 상대하는 놈이오. 만약 그런 놈이 삼교에 있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됐겠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연호정의 파멸적인 전투 능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속여 내는 전술가적 면모는 그야말로 전략 병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다.
“나아가, 삼교가 그런 인재를 품고 있었다면 놈들이 어떻게 대우해 주었을 것 같소?”
“……!!”
모용군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다.
“삼교, 아니 세상 어떤 조직이라도 그런 놈을 건드리지 않소. 대우하거나 망가트리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 그럴 수도 없소. 망가트린다고 망가질 놈도 아니며, 그 능력이 너무나도 탐이 나기에 다들 극진히 대우해서 데려올 생각만 하지, 언감생심 망가트릴 작정은 하지도 못한단 말이오.”
“…….”
“놈은 중원을 몇 차례나 구했소. 지금 군사가 비쩍 말라서 건강을 잃을 ‘기회’라도 준 것이 그놈이오. 내 말이 틀렸소?”
“……맞습니다.”
“군사만이 아니라 모두의 은인이라면…… 그래, 은인일 수 있지. 한데 은인에 대한 처우를 그따위로 했단 말이오?”
제갈아연은 탄식을 뱉었다.
그제야 그녀도 모용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이다.
“세상 어떤 조직이라도 영웅이자 은인은 특별 취급을 해 줘야 하는 거요. 그자의 혈통이 뛰어나서도, 돈이 많아서도, 권력이 강해서도 아니오. 그자의 능력이, 그자가 걸어온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외다.”
“…….”
“녀석에 관한 일은 어떤 일보다 우선해도 이상하지 않소. 다른 사람을 차별하라는 말이 아니오. 아니, 설령 차별하더라도 그 정도 가치가 있는 놈이오. 차별에 질투심이라도 느낄 수 있는 ‘현재’를 만들어 준 은인이니까. 내 말이 틀렸소?”
“맞습니다.”
“무림맹이 아니라 다른 조직으로 갔으면, 평생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을 놈이오. 그건 나도, 군사도 마찬가지겠지.”
“…….”
“우리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 같이 이 난리를 치고 있소이다. 미래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연호정 저놈도 서운함을 표하고는, 뒤끝 없이 또 한 번 무림맹을 위해 날뛰겠다고 하는 것이오.”
제갈문호는 묵묵히 모용군의 말을 들었다.
이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호통에 가까운 질책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질책할 수 있지만, 모용군의 질책은 그 느낌이 달랐다.
백도 무림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다가 스스로 추락하여 올바른 길을 보기 시작한 남자의 말이었다. 그간 들었던 어떤 질책보다도 뼈아프고 강렬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야 깨달았소. 미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현재라는 걸. 현재가 중요하다면, 현재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준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
“이왕지사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두 번 다시 놈을 서운하게 하지 마시오. 인생을 송두리째 전쟁에 거는 놈이오. 그런 잡다한 문제로 사람 속 뒤집히게 만들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게 하지 말란 말이오.”
“모용가주의 말씀,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열변에 가까운 말을 토해 낸 모용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내가 그 망할 놈을 위해서 왜 이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구려.”
답은 명백했다.
모용군 역시 삼교를 물리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생의 꿈을 포기할 정도로 증오하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그놈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연호정이라는 존재가 필수 불가결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하는 이들이다.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지만, 과거의 악연 정도는 묻어 두어야 했다.
“내 말 기억하오? 군사는 무림맹을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결국 나나 군사 당신이나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예, 기억합니다.”
“연호정 그놈은 무림맹이 아니라 강호 전체를 보고 있소. 무림맹이 강호에 속한 조직임을 생각하면, 단순하게만 봐도 녀석에게 더 큰 대의(大義)가 함께하고 있는 거요.”
“…….”
“이번 사태가 안정화되면 가서 두 번, 세 번 더 사과하시오.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인재요.”
모용군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제갈문호는 멀어지는 모용군을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