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3)
993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0)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은 두 사람에게 제갈문호와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물론 명백한 직책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가 왜 두 사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진 않았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일이 마무리되면 훗날 찾아와 사과할 거라는 말을 전했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만, 굳이 전달 안 해 주셔도 됐습니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양이 투덜거렸다.
“성인군자 납셨네. 말 안 해 줬으면 나는 계속 씹었을 거다. 백도 놈들은 어쩔 수 없다면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유순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그는 흑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였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워낙 거친 세상에서 살았다 보니, 자연스레 백도에 대해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평상에서 일어났다.
“병장기들 챙겨라.”
“예?”
두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비무 한 판 더 하자고요? 하긴, 우리의 환영이 좀 거칠긴 했지요? 그래도 그렇지 재승부까지는…….”
“승부랄 것도 없는 승부였는데 뭔 소리야.”
“혹시라도 두들겨 패려나 싶어가지고요.”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 깽판 치러 가자.”
깽판을 치러 가자.
참으로 연호정다우면서도 이 시점에 어울리지 않는 무자비한 한마디였다.
진양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뭔 소리요? 깽판이라니?”
“화 안 풀 거야?”
“……?”
“너희 앞에서 대놓고 모욕을 준 놈들이 있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둬? 한칼 시원하게 먹여 줘야지.”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 안 그래도 됩니다!”
“아니…… 그래도 되기는 하는데…….”
강량이 비난 가득한 눈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왜? 내가 뭐 못 할 말 했냐? 솔직히 칼 뽑고 생사결 나눠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고.”
“그게 지금 할 말이오!”
“야, 너 귀검의 후예라며? 귀검은 흑도 명문 아니야?”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나와야지, 새꺄! 그래도 흑도 명문 출신이라는 놈이 자존심도 없어? 백도 샌님들도 모욕을 받으면 칼로 푼다고 했다. 흑도는 사돈에 팔촌까지 두들겨 패는 게 상식이야.”
“세상에 그런 무지막지한 상식이 어디 있소?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림맹에 있소! 사고 치면 안 된다고!”
“말 한번 잘했다. 네가 뭔데 사고를 치니, 안 치니 구분을 해? 네가 대장보다 똑똑하냐?”
강량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대장이라는 말에 움찔했고, 연호정이 자신보다 똑똑하다는 핀잔에 대꾸할 말도 없었다.
진양 역시 연호정을 스스럼없이 대장이라고 부른 자신에게 놀랐는지 ‘씨펄.’ 한마디를 중얼거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으니까 가자고 했겠지. 안 그렇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 괜찮다.”
“거보라지.”
“그런 걸 떠나서라도 아무 이유도 없이 모욕을 당했다면, 무사답게 칼로 푸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야.”
연호정이 강량을 보며 말했다.
“무림맹도 무림의 일부다. 진양 말마따나 백도 정파의 무사들도 모욕당했다고 느끼면 사과를 종용하며, 사과하지 않을 경우 비무로 잘잘못을 따지기도 한다. 그건 강호의 상식이야.”
그래도 강량은 불안해 보였다.
연호정은 그런 강량을 이해했다.
강량은 본디 강한 성품의 검사였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연호정과의 관계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강량에게 있어 연호정은 늪지대에서 자신을 꺼내 살려 준 은인이었다. 연호정과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해질 수도 없었을 것이요, 진즉 양천의 손에 죽어 고혼이 되었을 터였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지언정 연호정에게 손해가 가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러한 마음이 강량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연호정이 강량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이놈아, 수습을 해도 내가 하지 네가 나를 걱정할 때냐? 분하지도 않아?”
“물론…… 분하죠.”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해 힘을 키우는 이들도 많지만, 대개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살지 않기 위해 힘을 키운다. 그건 힘의 본질이야.”
연호정이 턱으로 강량의 검을 가리켰다.
“검이 울고 있다.”
“…….”
“충분히 잘 참았어. 이제는 울화통을 풀어낼 때가 왔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강량이 이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기랄, 그 새끼들은 왜 하필 우리를 건드려가지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제야 강량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맺혔다.
당연히 그도 진양처럼 속풀이를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자신에게 모욕을 가한 그 작자들에게 직접.
그 기회가 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 갑시다. 가서 감히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린 그 썩어 빠진 눈알들을 뽑아 봅시다.”
진양이 툴툴거렸다.
“왜 또 그렇게 막 나가? 눈알은 안 돼. 저거는 중간이 없네, 진짜.”
“그럼 혓바닥을 뽑읍시다.”
“미친 새끼.”
* * *
적창문(赤槍門)은 대대로 강서 의춘 인근에서 활동하던 백 년 역사의 문파였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파가 탄생하고, 또 그만큼의 문파가 사라지는 게 강호였다. 그런 곳에서 무려 백 년을 넘게 버티며 지역에 명성을 떨쳤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보유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명성이라는 것은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응당 그에 걸맞은 주변 관리와 자금력, 나아가 민심을 보듬을 줄 알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 적창문은 또 특이한 문파라고 할 수 있었다.
적창문은 백도 정파 소속이었지만, 인의(仁義)를 앞세워 민심을 바로잡지 않았다.
의창 인근 민초들은 적창문의 보호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일정 액수의 보호세를 바쳤다.
그 금액은 결코 크지 않았다. 민초들 입장에서 봐도 안전을 생각한다면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이었다.
공과 사가 확실한 문파. 그것이 적창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공사 구분이 뚜렷하면 단점보다 장점이 크다. 다만, 그것이 다소 안 좋은 면모를 발휘할 때도 있었다.
일차로 인정 없는 문파라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보호세를 내지 않는 민초들의 아픔에는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거래 관계가 성립되면 도적, 혹은 뒷골목 무뢰배들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차단해 준다. 차단하는 걸 넘어서 본거지까지 쳐들어가 몰살시키는 것이 적창문이었다.
민초들은 환영했다. 누구나 적창문과 계약을 맺길 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악인들이 모인 곳이 파탄이 나면, 그곳에 또 다른 악인들이 기웃거리며 세를 형성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뿌리 뽑을 수 없는 문제였다. 적어도 당금 무림에서는 그러했다.
적창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의창 뒷골목까지도 직접 손을 뻗었다. 문파의 창술사들을 파견하여 지부를 설치한 것이다.
그로 인해 어중이떠중이들은 감히 의창을 노리지 못했다. 적창문의 세력이 무척이나 커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차 한계가 가까워졌다.
문파가 강성하기 위해서는 자금력과 인망도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이 강해야 했다.
적창문은 충분히 강한 문파였으나 그 이상을 넘보기에는 애매한 무력을 갖고 있었다. 한 지역에 이름을 날릴 정도는 되지만, 지역을 대표할 만한 무공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무공이 강한 흑도인들이 적창문의 지부를 급습했다.
하필 흑도인들의 의형제들을 적창문도들이 죽였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이유는 민초를 건드려서가 아니었다. 싹을 자르겠다는 의도로 끌고 와 처형을 감행했다.
당연히 절친한 흑도인들이 복수를 감행했고, 하루아침에 적창문의 지부 세 개가 무너졌다.
적창문은 전쟁을 준비했다.
그렇게 흑도의 고수들과 적창문은 보름이 넘도록 싸웠고, 결과는 적창문의 승리였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남랑오살도(南狼五殺刀)라 불린 흑도 고수들의 힘은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지부 여럿이 무너졌고, 많은 문도가 죽었다. 적창문의 원로 셋과 문주의 장성한 자식들까지 죽었다.
그 일로 적창문의 세력은 확 줄어들었다. 민초들 역시 계약 관계인 그들의 피해에 안타까워했지만, 동시에 하나의 생각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적창문도 안전하지 않다.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으로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결국 더 강한 고수들의 침공에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어 계약을 못 했던 민초들은 오히려 적창문의 피해를 보며 자비도 없고 인의도 없는 무사들의 말로라며 손가락질했다.
의창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 뒤, 인고의 노력으로 다시 성세를 키웠지만 적창문의 힘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았다. 그저 흔한 중소 문파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민초들 역시 적창문과 굳이 계약하지 않으려 했다. 계약한 민초들 중에서도 그 전쟁 때문에 여럿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흑도 사파를 향한 적창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선조부터 이어져 내려온 원칙과 무공으로 세를 키웠는데, 무뢰배 출신인 흑도인들과 얽혀 영광을 잃었다.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적창문은 백도 정파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경한 반(反)흑도파로 자리매김했다. 흑도와 관련된 일에는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무사들을 파견할 정도였다.
나아가 반흑도 성향의 무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금의 적창문은 흑도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무림맹에는 적창문주와 휘하 최고수들인 홍화칠수(紅花七手), 나아가 서른 명의 젊은 고수가 집결해 있었다.
사고를 친 것은 바로 그 젊은 고수들의 수장인 하정웅(河定雄)이란 자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적창문주 하번은 치솟는 울화를 참고 되물었다.
연호정의 말은 간단했다.
“모욕을 가한 무사를 데리고 오라 하였소.”
하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상대는 연가의 장남이자 묵룡부의 소부주였으며, 나아가 최연소 성천으로 이름을 날린 패왕 연호정이었다.
적창문주가 아니라 적창문주 할아버지가 와도 몰살이다. 마음만 먹으면 적창문 지부 세 곳의 병력이 합심해 달려들어도 몰살일 것이다.
인외의 강자, 천외천의 고수가 나타났다.
자연재해와 같은 고수 앞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이겨 내고 오히려 분노를 느낀다는 점에서 하번의 정신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것이오?”
“무슨 일?”
연호정이 짧게 되물었다.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하번은 물론 그 뒤에 서 있던 홍화칠수들의 얼굴에도 불안함이 일었다.
“말하지 않았소. ‘모욕’을 가한 무사들을 데리고 오라고.”
“…….”
“모르고 계셨다면 실망이오.”
“이보시오, 소부주.”
“흑백 연합이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사자들끼리 칼부림으로 그간의 분노를 풀어 보자고 온 것이오. 설마…….”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적창문주께서는 삼교와의 전쟁이 코앞인 지금, 흑도와 백도의 연합이 깨지기를 바라는 분이시오?”
“……!”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분은 아니라고 알고 있소. 공과 사는 분리되어야 하니까. 그것은 적창문이 탄생했을 때부터 지켜 온 가장 궁극적인 가치 중 하나가 아니었소이까?”
하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연호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데려오시오.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