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4)
994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1)
잠시 말이 없던 하번이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보시오, 소부주.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그림이 좋지 않소이다.”
“무슨 그림을 말함이오?”
“소부주는 최연소로 성천에 이름을 올린 강자요. 아닌 말로 당대 무림에서 맞붙을 만한 사람이 몇 없는 이가 직접 찾아와 그리 말하면, 이는 지나치게 과격한 협박으로 들릴 수 있지 않겠소?”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뻔뻔하기도 하고, 무(武)를 추구하는 무인의 입에서 쉽게 나오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아닌 말로 당신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그런 당신이 약자인 우리를 찾아와 한판 붙자고 하면, 이것은 불합리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번의 말은 그와 같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들은 홍화칠수들이 입을 쩍 벌리며 하번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모시는 적창문주 하번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강골의 무사였다. 되레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불같은 면모를 지닌 고수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하번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 혼자라면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는 성천의 일인이요, 무림맹과 묵룡부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무림 최고의 기린아였다.
심지어 황제 폐하조차도 연호정을 탐낸다는 말이 나도는 판국에, 연호정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적창문 백 년 역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사람만 죽어 나가는 게 아니라 문파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있단 말이다.
죽음이 숙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창문이라는 이름에 오물이 묻게 되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다. 선조들을 뵐 낯도 없는 것이다.
“핍박이라 하였소?”
“그렇소.”
“하면, 흑백 연합이라는 대의 아래 평생을 적으로 여겼던 무림맹 안에 들어온 흑도의 두 고수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모욕을 가하고 낄낄대며 떠나 버린 적창문도들의 행위는 무엇이오?”
“……!”
“핍박이라는 단어는 그럴 때 쓰는 것이오. 아닌 말로 모욕을 가한 가해자는 물론 적창문주께서 직접 나서도 그들에게는 십초지적도 되지 않소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참았소.”
그때, 홍화칠수의 막내인 칠인창(七刃槍)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씀이 심하십니다.”
연호정이 칠인창을 바라보았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칠인창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본 문에 찾아와 문주님께 그런 모욕을 가하다니, 성천의 이름이 높다 한들 이건 너무한 것 아니오?”
“내 말의 어느 부분이 모욕이오? 문주의 무력이 두 고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 말이오?”
“그렇소!”
“하면, 비무를 해 보면 될 일 아니오?”
칠인창의 얼굴이 굳어졌다.
옆에 서 있던 사인창(四刃槍)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부주. 맹 내에서는 사사로운 비무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말 한번 잘했소. 그래서 동맹을 맺은 흑도인들에게 모욕만 가하고 떠났소? 어차피 덤벼들지 못할 걸 알아서?”
“그것은!”
“당신들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연호정의 목소리가 한결 차가워졌다.
더 뜨겁게 타오르지 않고, 외려 차가워진다. 그 차가운 목소리가 하번은 물론 홍화칠수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무림맹은 분명한 기치를 내세웠소. 흑과 백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동맹을 맺겠다는 것이지. 동맹이라는 글자의 뜻을 모르시오?”
“…….”
“사사로이는 무사들끼리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소. 그러나 이 문제는 절대 사사로이 볼 수 없는 문제요. 단순히 생각해서, 그대들이 묵룡부에 들어왔는데 소속 흑도인이 입에 담지도 못할 모욕을 가하고 떠났다면, 그대들은 어찌할 것이오?”
아무리 뻔뻔해도 이 말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하번을 보며 말했다.
“실망이오, 문주.”
“…….”
“모욕을 가한 자가 젊은이라고 알고 있소. 그래, 젊은 나이에 넘치는 혈기로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하나 시국을 알고 대의를 알고 나아가 조직의 방향을 알았다면, 문주께서 직접 그 젊은이를 데리고 와 머리 숙여 사과해야 옳았소이다.”
하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연호정의 말은 분명 옳다. 그러나 흑도에 대한 강력한 분노는 그의 이성을 흔들 때가 많았다.
흑도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 발언 자체가 하번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보시오, 소부주.”
“대의가 무엇이오? 주관이 무엇이오?”
“…….”
“당신들의 대의는 상대를 봐 가면서, 내 마음대로만 발휘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었소?”
“말씀이 심하시오!”
“그게 아니라면 어찌 데리고 와 사과하지 않았소?”
“그것은!”
하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제 아들이 다소 무례한 짓을 저질렀음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흑도인들이었다. 흑도인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할 행위였다. 그래서 아들에게 약간의 주의만 주었을 뿐, 그 이상의 대처는 하지 않았다.
연호정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아시오? 문주께서는 그 미숙한 대처로 인해 흑백 연합에 금이 가게 만들었소. 자잘한 실금으로 무너질 만큼 만만한 조약은 아니지만, 그대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열이 되고 백이 되면 결국 연합은 무너지게 될 것이오.”
“…….”
“그 책임을 떠안을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맹에서 나가시오.”
“나, 나가라니!”
“당대 무림맹은 흑도와 손을 잡고 외세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그런 상황에서, 사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란을 일으킬 만큼 성숙하지 못한 문파까지 안고 가는 게 옳다고 보시오?”
“이보시오!”
“아니면!”
처음으로 연호정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렸다.
“당신들, 설마 삼교의 세작이라도 되오?”
“그 무슨 망발이오!”
“삼교는 오랫동안 중원을 노려 왔소. 그 잔인무도한 놈들도 전략을 모르지 않기에, 상대를 망가트린 후 싸우는 것이 이득임을 잘 아는 것이지.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소. 무림맹, 그리고 묵룡부의 많은 열사가 목숨을 바쳐 그들을 저지했기 때문이오.”
“……!”
“하면, 지금 삼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소? 당연히 흑과 백이 갈등을 겪고 힘이 약해지는 것이외다.”
연호정이 하번을 노려보았다.
“적창문주 그대가 한 짓이 어떤 짓인지, 정말 몰랐단 말인가.”
말투가 달라졌다.
기세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달라진 말투만으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내 정녕 이 일을 맹주님께 건의하여 봉공회의의 안건으로 올려 달라 요청해야겠나?”
하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홍화칠수들 역시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개인 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조직의 흥망성쇠를 논한 시점부터 그들에겐 명분이 사라졌다. 애초에 명분 같은 것도 없었지만, 정말로 봉공회의에 이 안건이 올라가면 적창문은 무림맹에서 제명될 수도 있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 성질머리가 제법 고약해. 나는 지금껏 남녀는 물론이거니와 노소도 구분치 않고 못난 짓을 한 사람은 직책을 버리면서까지 때려잡았어.”
“……!!”
“그런데도 이 자리에 와서, 굳이 무림맹을 들먹이고 삼교를 들먹이는 이유를 알겠나?”
화아악!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공적으로 처리하길 원하나? 사적으로 처리하길 원하나?”
“소, 소부주. 일단 진정하고…….”
“공적으로 처리되면 그대들은 제명이고, 사적으로 처리되면 그대들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그야말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연호정의 강렬한 눈빛과 단단한 명분 아래, 하번과 칠수들 모두에게 무시무시한 공포를 일으키고 있었다.
연호정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무서운 발언이었다. 어느 쪽을 골라도 적창문은 끝장이다. 백 년 역사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내, 직접 찾아와 가해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오히려 그대들에게 좋은 일이다. 비무로 뒤끝 없이 끝내자는 뜻이니까. 그것은 내 형제들도 받아들였지.”
홍화칠수들의 안색은 이제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형제라고 표현했다. 말하자면 적창문은 맹부는 물론 황궁에서도 존중하는 무림 최고의 인사를 간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데려와. 너희가 무사라면 무사답게 해결해라.”
하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데려와라.”
잠시 후.
저 멀리서 일인창(一刃槍)과 함께 젊은 청년이 걸어왔다.
두 자루 단창을 등에 멘 청년은 헌앙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기도가 상당했고, 연마도 제법 잘 되었다.
눈빛이 하번과 판박이였는데, 전체적인 생김새가 조금 더 날카로웠다.
그리고 지금, 그 날카로운 눈빛은 꽤 흔들리고 있었다.
하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사하거라. 이분은 묵룡부의 소부주이시자 당대 성천의 일인인 연호정 대협이시다.”
하정웅이 침을 삼킨 후 포권을 취했다.
“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적창문의 하정웅이라 합니다.”
가만히 하정웅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강량과 진양이 들어왔다.
하정웅을 보는 강량의 얼굴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반면 진양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막상 비무가 가능하다고 하니, 오히려 힘이 빠진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먹질 한 방에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격차가 심했다. 그런 애송이와 거창하게 비무씩이나 하려니 힘이 안 빠질 수가 있나.
연호정이 하정웅을 보며 말했다.
“내 형제들에게 모욕을 가했다고?”
“그, 그것이……!”
“네 아버지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제법 강단은 있더군.”
“……!”
“네가 적창문주의 피를 이었다면 네가 했던 일을 축소하는 소인배 같은 짓을 벌이진 않을 거라 믿는다.”
연호정이 턱을 들며 말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형제들에게 들었다. 다만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너의 발언도 들어 볼 것이다.”
“…….”
“설명하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정웅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강호에서 가장 위험하고 난폭한, 그러면서도 고금을 논하는 천재 앞에 서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끔찍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 그 공포심이 하정웅의 심신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그,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정웅은 그날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딱히 축소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것은 하정웅이 솔직해서가 아니라, 감히 연호정 앞에서 거짓을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호정의 무공은 극에 이른 상단전의 영향을 받는다. 분노한 그의 언어는 언령(言令) 수준의 힘을 발휘한다.
하정웅 정도의 힘으로는 연호정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정웅의 말을 전부 들은 연호정이 하번을 바라보았다.
하번은 당황했다. 자신이 들어도 심한 수준의 모욕을 가한 것이다.
강량에게는 죽은 부모를 언급했고, 진양에게는 덩치를 가지고 비꼬았다.
진양은 특유의 덩치 때문에 평생 설움에 받쳐 살았지만, 그거야 남들이 알 수 없는 일이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부모와 멸문한 귀철검문까지 들먹였다면, 이는 흑도가 아니라 백도라도 생사결이 벌어질 만큼 끔찍한 모욕이었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네가 한 발언이, 얼마나 치졸하고도 모욕적인 발언이었는지 알고는 있는가?”
“저는…… 저, 저는 그저 흑도가…….”
“나도 묵룡부의 소부주이니 내 앞에서도 어디 똑같이 말해 보아라.”
하정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무사답게 해결할 준비는 되었나?”
“예, 예?!”
“준비하라.”
차앙!
강량이 검을 뽑았다.
연호정이 자리를 비켜 주자, 강량의 검기(劍氣)가 사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