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5)
995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2)
“……!!”
하번을 비롯, 이곳에 모인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후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매서운 한기가 실렸다.
검을 뽑자마자 수백, 수천 줄기의 검기가 사위를 휩쓸었다. 작정하고 기파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요, 그저 발검(拔劍)만으로도 이 정도 압력이 나왔다.
검을 뽑은 순간, 이 영역은 오롯이 강량의 영역이 되었다. 심지어 연호정조차도 강량의 살벌한 귀검기(鬼劍氣)에 집어삼켜지는 듯했다.
연호정이야 기세의 조절이 자유자재라 한 발 물러난 것에 그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하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상대가 고수인 줄은 알았다. 애초에 패왕과 함께 다니는 이들 중 고수가 아닌 이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하번 역시 강서의 절정고수로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역전의 용사였다.
그러나 강량은 절정고수의 수준을 넘어, 대문파 장문인급의 무력을 넘보고 있었다.
한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고수 정도가 아니라 종사급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 강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들리는 명성은 실제 무력의 삼 할도 쫓아가지 못했다.
이런 고수도 못 알아보고 모욕을 가했다니, 정말이지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추태다.
비록 흑도인이지만, 저 나이에 이 정도 경지를 구축하려면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수련과 고행이 뒤따랐을 것이다.
‘설마 마공?!’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저와 같은 경지를 구축하려면 아무리 천재라도, 운이 따라 줬대도 불혹은 넘겨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
하번은 무인으로서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설령 사마공을 익혔다 한들 이 검기는 진짜였다. 사이한 무공 따위로 이 정도로 굴강하고 촘촘한 기도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단 한 번 검기를 드리우는 것만으로도 모두를 무릎 꿇게 만든 천재 검사의 역량이 대단할 뿐이었다.
“창을 들어라.”
강량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떤 분노도, 증오도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목소리였다. 그 담담한 얼굴로, 그 담담한 기세로 단박에 목을 날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르르.
덜덜 떨던 하정웅이 저도 모르게 하번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 달라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철부지 창술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
홍화칠수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대가, 심지어 흑도인이 검을 뽑아 겨누고 있다. 어떤 사정이 있든 창을 뽑고 마주해야 했다. 그것이 무사다.
한데 하정웅은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제 아버지를 보는 모습은, 그 자신이 그렇게나 욕을 했던 오만하고 방자한 명문 무가의 망나니 자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는 것이냐!”
“아, 아버지!”
“비무 상대가 검을 뽑았거늘 어찌하여 응수하지 않는 게냐! 적창문의 정신을 이었다는 창술사가 그따위 추태를 부리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정웅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적창문의 정신이야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신을 제대로 발휘할 만한 상황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인근에서도, 나아가 무림맹에서도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과거 산적 토벌을 하러 갔을 때 처음 살인을 경험했지만, 그 뒤로는 박빙의 무사와 생사결을 나눈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적창문의 명성이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스르륵.
두 자루 단창을 쥔 하정웅이 이를 악물며 강량의 앞에 섰다.
“……허이구.”
팔짱을 낀 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진양은 하정웅의 창을 보며 혀를 찼다.
낮춘 하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로 인해 손에 들린 두 자루 창날도 떨리고 있었다.
허초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떠는 거다.
강량의 검기는 대단할지언정 정작 살기 따위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거늘, 스스로 만든 죽음의 공포가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저런 머저리 같은 놈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힘이 빠진다.
수준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다. 젊은 혈기에 분을 참지 못하고 지랄하는 거야 이해라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사로서 저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무공 경지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진양은 차마 못 볼 꼴을 보는 듯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막상 하정웅이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니 쌓인 울화도 다 사라져 버렸다.
강량이 입을 열었다.
“백도 정파의 비무에선 본디 고수가 하수의 삼 초를 받아 주는 것이 예의라고 알고 있다.”
“……!”
“그러나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한 번의 칼부림으로 뒤끝 없이 감정을 풀어내자는 의미의 비무이니, 선공 삼 초 양보는 허용치 않겠다.”
삼 초가 아니라 삼백 초를 허용해도 옷깃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다.
번쩍!
강량의 눈빛이 돌변했다.
순간 하정웅은 저도 모르게 먼저 땅을 박찼다.
파아악!
본능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여기서 선공을 날리지 않으면 아예 부딪칠 수도 없다.
성격이야 어찌 되었든 나름대로 피땀 흘리며 노력했음을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공포는 이겨 내지 못했으나, 뼈와 살에 새겨진 그간의 노력은 그가 무의식의 영역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공격 수법이 문제였다.
하정웅의 단창이 단숨에 강량의 미간을 노렸다.
하번과 칠수들의 낯빛이 돌변했다.
생사결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비무였지만, 상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살초를 써 버린 것이다.
“안 돼!”
누군지 모를 외침과 함께.
강량의 검이 움직였다.
서걱!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도 없었다. 사선으로 올려 친 강량의 검이 단창 한 자루를 통째로 잘라 버렸다.
적창문에서도 애지중지하는 쌍단창은 그 강도가 강철을 능가함에도 단 일검에 베여 날아갔다. 무시무시한 절삭력이었다.
하정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전진하는 힘을 이기지 못해 계속 나아가는데, 어느새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파악!
혼신의 힘을 다해 전진을 멈추고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남은 하나의 창으로 방어초를 구사하려는 몸짓은 그가 제대로 연마되었음을 다시 한번 알려 주었다.
그러나.
‘……!!’
하정웅의 입이 쩍 벌어졌다.
검을 치켜든 강량의 모습이 보였다. 한데 어느새 그의 눈에 강량은 사라지고, 고루거각처럼 거대한 팔비(八臂)의 괴물이 나타났다.
포효하며 여덟 자루의 검을 내리치는 괴물의 환상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물 그 자체였다.
“으아아아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하정웅이 창을 놓고 몸을 웅크렸다.
양팔을 교차한 채 고개를 묻는다. 힘이 풀린 두 다리는 그대로 접혀 버렸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웅크린 그의 모습은 도무지 일파의 작은 주인이라 믿기 힘들 만큼 유약해 보였다.
화아아아악!
살기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뜨거운 열풍이 아닌 습기 가득한 음풍이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롭고 음험한 살기는 영역 안의 모두를 베어 넘길 것처럼 무자비했다.
치리리링!
홍화칠수들이 저마다 창을 꺼내 들었다. 강량의 무자비한 살기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하번은 그러지 않았다. 손이 몇 번이나 움찔했지만, 그 살기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후우우우웅.
진하게 번져 나가던 살기의 폭풍이 씻은 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따스한 바람이 채웠다.
“헉! 허어억!”
웅크린 하정웅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다. 파랗게 질린 얼굴,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날카로운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죽음의 공포 앞에 신체가 알아서 반응한 것이다.
스륵.
하정웅이 움찔했다. 목덜미에 차가운 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패배를.”
강량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인정하겠나?”
하정웅이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
태양을 등지고 선 강량의 모습은 환상처럼 보였던 괴물과 달리 호리호리했지만, 새파랗게 빛나는 한 쌍의 귀안(鬼眼)은 괴물보다도 더 무시무시했다.
하정웅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정하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렇군.”
강량의 검이 하정웅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그럼.”
강량의 기세가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사과는?”
“죄송합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다.
하정웅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제, 제가 경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과연 그 사과가 진심일까.
연호정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강량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짓눌러 버리지 않았다면 과연 하정웅은 사과를 했을까?
‘의미 없다.’
애초에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 정신머리가 있는 놈이었다면 그 사달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주둥이로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듣는 것으로 족하다. 쉽게 풀릴 분노는 아니지만, 그 정도면 개한테 물린 셈 치고 넘어가 줄 수 있는 것이다.
강량이 검을 거두었다.
검첨에 목이 찔렸는데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검기의 조율이 엄청난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스르릉, 탁!
납검한 강량이 하번을 바라보았다.
하번의 얼굴은, 정말이지 뭐라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 치욕, 걱정, 공포, 좌절 등 수많은 감정이 묻어났다.
강량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아들은 제대로 대답할 만한 상태가 아닌 듯하니 그대가 말해 보시오.”
실제로 몇 번 헉헉거리던 하정웅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하정웅의 정신력이 나약하다기보다는 강량의 살기 조절 능력이 지나치게 빼어났다고 봐야 했다. 물론 이 정도 공포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다면, 근골은 몰라도 그 정신력은 차기 일문의 주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많다.
“아드님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시겠소?”
하번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에 불만이 있으신 모양이오.”
“…….”
“나는 당신들 모두와 비무를 치러도 괜찮으니,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직접 창을 드시오. 혹여 내 몸 상태가 걱정이라면, 괜찮소. 운기는 필요 없으니 정당하지 못한 대결이라고 빼실 필요도 없소이다.”
차아앙!
강량이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후우웅!
동시에,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하정웅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공기였다. 상대의 무공 수위에 따라 압력을 조절하는 것이다.
‘…….’
하번은 눈을 감았다.
그 섬세하고도 광범위한 기세 조절 능력에, 마침내 하번은 깨달았다.
‘졌다.’
모든 것에 졌다.
무사로서도, 명분에서도 그리고 실력에서도.
잠깐 사이 하번의 얼굴이 십 년은 더 늙은 듯했다.
하번이 입을 열었다.
“이번 비무는 내 아들의 패배요.”
“…….”
“또한…….”
정말이지 쉽게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하번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본 문의 대응이 올바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겠소.”
“…….”
“추후 적창문은 이 건에 대해 명백한 잘못을 인정하겠다고 공표하오.”
강량이 다시 납검하며 말했다.
“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런 말이야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
“인정하고 물러나도 좋고, 다시 생각해 봐도 아닌 것 같으면 찾아와 비무를 청하시오. 내 검은 언제나 열려 있소.”
강량이 몸을 돌렸다.
“가시지요, 형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