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7)
997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4)
“청사자문이 움직였어요.”
“소부주의 대처는?”
“거절했어요. 직접 찾아오라고 한 모양이에요.”
“소부주답구먼.”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쿡 찌르고 들어가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부주는 흑도의 이인자 자격으로, 우리 백도 정파가 가장 중요시하는 명분을 들고 찾아갔다. 누구도 소부주에게 대놓고 잘못했다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다만, 청사자문은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구나.”
“사자문주는 신중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다만 그 신중함과는 별개로, 흑도를 무척 증오한다고 했죠.”
“그래.”
“아무리 그래도 상당한 거물인데, 곧바로 움직일 줄은 몰랐어요.”
“신중하기 때문에 소부주에게 먼저 사람을 보낸 것이다. 그 사람은 연호정이란 걸물을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 아닌 연가의 장남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갈아연의 눈이 흐려졌다.
“호정이 뭘 노리고 있는지 짐작은 하지만,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무공만 생각한다면 연호정이 위험할 일은, 적어도 무림맹 내에선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이 벌이는 일은 무공이 아닌 명분과 분위기로 싸우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연가의 장남이요, 묵룡부의 소부주라지만 이곳은 무림맹이었다. 그 많은 문파가 연호정을 성토하기 시작한다면 그라도 난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사태가 급박해지면 무림맹으로서도 다소 강압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 조치가 합리적이지 못하면 자칫 진짜 내란이 터질 수도 있다. 제갈아연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문서를 들추던 제갈문호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하나 물어보자.”
“네.”
“우리가 지금껏 흑도를 향한 강한 반발이 실린 여론을 억누르지 않고 참아 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군사로서가 아니라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묻는 것이다.
제갈아연은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이것이 삼교의 세작에게서 시작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이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구나.”
“더하여, 꺼트린다고 꺼질 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맹이 시끄러워지고 심할 경우 분열될 수도 있겠지만, 한판 승부로 선동가들을 잠재워 버리기 위함입니다.”
“선동가들을 잠재우고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며, 나아가 그들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참아 왔던 것이지.”
“네.”
“하지만 호정은 그럴 필요가 없다.”
소부주가 아니라 호정이다.
제갈아연이 되물었다.
“왜요?”
“호정은 연가의 장남이자 묵룡부의 소부주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외적인 직책과 출신을 볼 뿐, 그 너머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너머라면……?”
“차기 육대세가의 가주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
실제로 가주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장남인 데다가 무공 또한 출중하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또는, 차기 묵룡부주가 될 수 있는 사람.”
“……!”
“묵룡부주가 아닌 성천의 일인이 꼽은 제자이며 그 자신도 성천에 이름을 올린, 절대 무적에 한없이 가까운 초고수.”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막상 그렇게 풀어서 들으니, 연호정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존재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감정이 격해지면 더더욱 그렇지. 해서, 호정을 대단한 인재로 볼 뿐 천하를 움직이는 핵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요?”
“머리로는 알지. 하지만 마음으로는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지.”
“아!”
“이번 적창문주를 보아라. 그는 강량과 진양 두 사람이 호정의 동료라는 것을 알고도 사태를 방관했다. 듣자 하니, 호정이 직접 왔을 때도 처음에는 제법 당당했다고 들었다.”
“어이가 없을 뿐이죠.”
“하지만 적창문주는 끝까지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지. 호정이 적창문주를 ‘이해’시켰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
“이상하지 않으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간 호정이 벌인 일이 있고 수습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지 말이다.”
“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너와 내가 일반 대중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호정을 보는 것은 지인이라서 그렇다.”
“……?”
“당장 무림에 소문이 나기를, 호정이 삼교와 관련된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알려졌다. 실질적으로 삼교가 무림을 침공하지 못한 이유는, 호정이 발 빠르게 대처하여 그들의 전략 전술은 물론 고수진들을 모두 깨부쉈기 때문이다.”
“사실……이잖아요?”
“사실이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호정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사건마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맞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네?!”
“호정이 뛰어난 인재라는 건 안다. 호정이 삼교의 침투를 물리쳤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게 전부다. 호정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얼마나 희생했고 얼마나 정신없이 대륙을 횡단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
제갈아연이 탄식을 터트렸다.
제갈문호가 쓰게 웃었다.
“가득상 후개에게 넌지시 말해 두었다. 호정에 관한 소문을 자세하게 내지는 말아 달라고.”
“네, 알고 있어요.”
“애비가 왜 그랬는지 아느냐?”
제갈아연은 그제야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믿질 않을 테니까요.”
“정확하다.”
연호정은 한 사람이 처리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을 수두룩하게 해냈다. 천하에 다시없을 영웅 열 명이 모여도 가능할까 싶은 일을, 사선을 거닐며 용인술까지 발휘하여 거의 모두 성공시킨 것이다.
과장도 적당해야 믿는 법이다. 그 과장이 심해지면 사람들은 불신하며, 그보다 더 심해지면 뜬소문으로 여기는 걸 넘어 배척하기까지 한다.
“소부주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맹에 들어왔을 때, 많은 무사가 호정의 입맹을 환영했다. 그의 이적 아닌 이적에 분노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은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
“호정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외교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나는 그 사실이 더 부각되도록 노력했다. 물론 그간 호정이 천하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정보 부각에도 무사들은 시큰둥했겠지만.”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영웅을 잊고 자신의 감정만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그들이 호정에게,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고수인 호정에게 눈을 치켜뜨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그리고, 나 또한 그랬지.”
“아버지.”
“모용가주의 말이 옳다. 나는 호정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 하여, 녀석이 언제까지나 희생이라는 선택지를 내놓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 무의식중에 분명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놔둔 것이겠지. 무림맹을 위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제갈아연은 아버지의 담담한 자기비판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더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호정과 모용가주의 등장 덕분에 그것을 빨리 깨달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지. 그들은 서로를 지지해 주는 강력한 증오의 쇠사슬로 묶여 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호정이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네 생각은 어떠냐?”
“호정의 능력이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요. 다만, 호정의 선택이 다소 위압적이고 파격적이기 때문에 큰 결과는 좋을 수 있어도 불만을 가진 이들이 아예 없어지진 않을 것 같아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대다수를 만족시킬 뿐.”
“…….”
“또한, 나는 대다수를 만족시킬 생각이 없다.”
제갈문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저 현실을 알려 줄 생각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호정 역시 다시 한번 더럽고 추잡스러운 야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 * *
“항요라 하오.”
길을 걷던 연호정과 진양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대로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걸 알고도 수하들을 이끌고 와 연호정 앞에 섰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소?”
“삼도문(三刀門)이라는 방파를 이끌고 있소.”
삼도.
세 개의 칼이라는 단순한 이름답게 항요의 허리춤에는 무려 세 자루나 되는 곡도(曲刀)가 달려 있었다.
“내게 볼일이라도 있소?”
“소개를 했으면, 응당 그쪽도 예의를 차려야 하지 않겠소?”
“통성명을 하잔 말이오?”
“그렇소.”
“내가 누군지 모르고 오셨소?”
항요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표정이나 기도를 보아하니 웃고 떠들자고 온 건 아닌 듯하고,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씀이나 하시구려.”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항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무사들은 다소 경직된 표정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다혈질에 예의도 부족한 이로, 느닷없이 흑도로 전향…….”
“묵룡부의 소부주가 어느 정도 위치일 것 같소?”
“뭐요?”
“일파의 문주급일 것 같소? 아니면 그보다 아래일 것 같소?”
“……?”
“사실 나도 잘 모르겠소. 예전엔 괜히 사고 치지 말자고 그런 것에 집착했는데, 지금은 아니오. 문주급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위치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 아니겠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냐는 거야 내가 할 말이고.”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느닷없이 길 막아 가면서 목에 힘주고 얘기할 거면, 응당 그에 맞는 심각한 사안이어야 할 것이오.”
“물론 심각한 사안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또한, 당신이 말한 것처럼 예의를 잘 차려서 얘기해야 할 거요.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예의로 포장된 오만함은 내게 통하지 않소이다.”
항요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지금 협박하시는 것이오?”
“이걸 협박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당신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겠소.”
연호정이 손을 까딱였다.
“길을 비켜 주시겠소? 갈 곳이 있어서.”
“…….”
“내가 치워 드리리까?”
담담해서 더더욱 위압적인 말이었다.
항요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이지…….”
“셋일지 다섯일지, 아니면 열일지 궁금하지 않소?”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일까?
“하나.”
순간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둘.”
항요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우리와 함께 가 주시오.”
다급하게 말을 내뱉은 항요는, 순간 상한 자존심에 얼굴을 붉혔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싫소.”
“……?!”
“다음 숫자 세면 되겠소?”
항요가 이를 악물었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오? 얘기 좀 하자고 온 사람에게 다짜고짜 공격적인 언사로 무안을 주는 것이 당신의 예의요?”
“말 한번 잘했수다. 살기등등한 기도를 풍기며 길을 막고 볼일이 있다고 하면, 누가 있어 고운 말이 튀어 나가겠소?”
“누가 살기등등……!”
“내가 누군지 아시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족한 무력이나마 성천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나요. 설마하니, 섬세한 기도 한 줄기 못 읽고도 그 자리에 오른 줄 아시오?”
항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뿐 아니라, 그 광경을 보는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만히 항요의 얼굴을 보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좋소. 마음이 바뀌었소. 우리 대화나 해 봅시다. 흑백 연합의 한 축인 묵룡부의 작은 주인 앞에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타나, 칼자루까지 쥐고 얘기나 하자고 한 그대의 속내가 무엇인지 나도 한번 확인하고 싶구먼.”
“……!!”
“혹시라도 비무 같은 거 하자고 하지 마시오. 무림맹 살림 빠듯한데 건물 다시 지으려면 골치 아플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