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8)
998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5)
항요는 잠시 숨을 골랐다.
연호정의 공격적인 언사는, 단순히 모욕을 가하거나 사람을 무시하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 봤다.’
연호정은 묵룡부의 소부주다.
강동의 명문, 연씨세가의 장남으로 볼 것이 아니었다. 묵룡부의 소부주로 대하긴 했지만, 태생이 백도 명문의 자손이니 과격할지언정 최소한의 예의와 선은 지킬 줄 알았다.
틀렸다.
연호정은 지금 수틀리면 이 자리에서도 주먹을 휘두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항요는 연호정이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무림맹 한복판에서 흑도 연맹의 작은 주인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면 정국이 요동칠 것이다.
상대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제로 힘을 쓸 일은 터지지 않는다. 그럴 것이다.
항요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흔들릴 정도로 연호정의 눈빛은 마주하여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어제 적창문과 갈등이 있었다고 들었소.”
“그렇소.”
“일 처리가 너무 과격했다고 생각하오.”
‘생각하지 않소?’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하는 답을 듣고 싶어서 온 것이오?”
“무슨 뜻이오?”
“내가 그대에게, 적창문 일로 사과라도 해야 하냐는 거요.”
항요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소. 그러나 모두에게, 사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보오만.”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뭐라?”
“적창문과 내 형제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들으셨소?”
“그렇소.”
“하면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도 아시겠구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온 것이오. 그대의 동료들이 처세를 잘못한 것이 시발점 아니었소이까.”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항요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보았다. 흑도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가 기본이지만, 적어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형제들이 처세를 잘못했다?”
“아니오?”
항요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적창문의 젊은이들이 다소 과격한 언사를 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오. 그러나 먼저 시비를 걸고, 대놓고 무시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대화가 이어졌고, 이후 끝까지 상대를 무시해서 적창문의 젊은이들이 혈기를 참지 못한 것 아니었소이까.”
진양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미친……!”
저도 모르게 쌍욕을 퍼부으려던 진양을 막은 것은 연호정이었다.
손을 들어 그를 진정시킨 연호정이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계시오?”
“하면 아니란 말이오?”
“누구에게 들었소?”
항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왜 묻는 것이오? 설마하니 그자를 찾아가 해코지라도 하려는 것이오?”
“누구요?”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당신이 이성을 잃고 손을 쓴다면 누가 있어 당신을 막겠소이까.”
적어도 상대의 무력을 명확하게 인지하고도 이런 언사를 내뱉는 배포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시오?”
“만에 하나를 위해 조심하겠다는 것이오.”
“하면 분노 가득한 내 무공을, 그대가 다 받아 보시겠소?”
항요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왜 얘기가 그런 쪽으로 가는 거요? 물론 당신이 합당한 이유로 내게 공격을 가한다면, 설령 죽는다 한들 당당히 맞설 것이오. 무림인으로 살아가면서 천수를 누릴 생각 따위는 없소이다.”
재미있는 말장난이었다.
의도했다면 의도했고, 버릇이라면 버릇이다.
연호정이 보기에 항요는 언제나 이랬을 것이다.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구구절절 설명치 않고 강압적으로 찍어눌렀을 것이며, 자신과 동등하거나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당함을 앞세워 칼부림이라도 나면 절대 옹호받을 수 없을 거라고 압박하며 상대의 언행을 제한하려 들었을 것이다.
은근히 흔하게 보이는 부류다. 강성의 성격일지언정 괜찮은 수완을 지닌 사람이라는 평가를, 주변에서 끊임없이 받았을 것이다.
‘애석하군.’
상대를 자극하면서도 원하는 걸 뽑아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언변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항요는 그러질 못했다. 그저 상대를 자극하는 데에만 능했고, 어쩔 수 없이 상대가 물러나면 본인이 이겼다며 득의양양하게 웃는 천박한 습성을 지녔다.
“보시오, 삼도문주.”
“말씀하시오.”
“당신이 나를 연가의 장남으로 보든 묵룡부의 소부주로 보든 아무 상관 없소. 다만, 당신은 이 사람을 어지간히 모욕하고 싶었던 모양이오.”
“사실을 알자고 하는 것이 모욕이오? 도대체 무엇이 그리 걸려서…….”
“내가 당신에게, 내 형제들과 적창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기이하게 포장하여 그대에게 말한 사람을 묻는 것이 그리 큰 문제요?”
“물론 그렇소.”
“내가 그를 해코지할까 싶어서?”
“그렇소.”
“당신 말은, 강호 최고 명문이라는 육대세가의 일원이자 흑도 역사상 최초의 연맹인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 앞뒤 안 가리고 사람 해코지나 하는 무뢰배라는 것이로군.”
순간 항요의 눈이 흔들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도 침을 꿀꺽 삼켰다.
연호정의 말을 보자면, 항요는 지금 강호 육가의 적통이자 흑도 연합의 작은 주인에게 모욕을 가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봤다는 뜻이니까.
항요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다만 소부주의 형제와 얽힌 일이니만큼 다소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는…….”
“당신은 왜 여기에 왔소?”
“……?”
“앞뒤 사실을 명확히 알고 왔다면, 감히 내 앞에 서서 그따위 요언을 뱉지는 못했을 터인데?”
“말을 삼가시오! 요언이라니!”
“당신 말인즉슨, 내가 당신처럼 앞뒤 재지도 않고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저 기분이 나빠 그자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뜻인데.”
“내가 언제……!”
“사과도 없고.”
“……?!”
“예의도 없고, 자기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반대로 정곡을 찔리니 자신을 돌아보기도 전에 화부터 내고.”
연호정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사소한 일도 커지고 무마할 수 있는 일도 칼부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보시오!”
“적창문주의 말을 듣지 못했나? 무림맹이 그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나?”
“…….”
“내 형제들이 먼저 잘못했다고? 무림맹이라는, 흑도 출신에게는 언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곳에서 그동안 잠잠했다가 느닷없이 시비를 걸었다고?”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형제들이 고약한 짓거리를 했다면 덮어 놓고 사실 취급이고, 적창문주의 아들내미가 가한 느닷없는 폭언은 오해일 수 있다고 보는가?”
“……!”
“그리고 그걸 내가 직접 가서, 힘으로 찍어 눌렀다고 의심하는가?”
“소부주.”
“무림맹은 정의롭지 않은 단체라, 나와의 사적인 인연 때문에 적창문을 토사구팽했고?”
“이, 이보시오.”
“당신은 뭘 원하나? 분란을 원하나? 아니면 진실을 원하나? 진실이라면 이미 낱낱이 드러났고, 분란을 원한다면 조용한 곳에 숨어서 나와 내 형제들을 욕하며 흑백 연합에 한 줄기 금이라도 가게 하면 그만인데.”
항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왜 출처가 불명확한, 진실이 아닌 헛된 소문에 휩쓸려 안 그래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비수를 찍어 대는 건데.”
“……!”
“내가 당신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게 맞나? 내가 당신에게, 그 헛소리로 선동 비슷한 걸 행한 놈의 정체를 알려 달라 말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보나?”
“소부주. 나는 그저…….”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질 각오가 되었으니 그따위 허실도 파악 안 된 소문을 들고 와서 살기까지 피운 것이렷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나는 그저 모두를 위해……!”
“모두를 위해?”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
“무림맹은 언제나, 어떤 결과라도 투명하게 내기로 이름이 높았지.”
연호정이 턱으로 군사부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와 함께 가지. 가서 그 신중하지 못하고 저열하기만 한 안목을 정화해 보는 게 어떤가? 어떤 일이 있었고,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분명하게 확인해 보겠나?”
“그럴 수는 없소.”
“왜지?”
“그거야 당연히……!”
순간 항요는 입을 다물었다.
무림맹의 일 처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자신은 물론 삼도문 전체가 빼도 박도 못하는 불순분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거기에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나댄 머저리가 되는 건 덤이다. 어떤 의미로는 후자가 더 문제다. 그 정도 머리도 없는 사람이 좌장으로 있는 문파에, 누가 있어 들어가고 싶겠는가.
삼도문의 명성이 바닥을 칠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해 보자니 겁이 나나?”
“…….”
“하면, 무림맹은 무섭고 묵룡부는 무섭지 않은 건가?”
화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한 줄기 뜨거운 바람이 솟구쳤다.
“네놈이 정녕 우리를 무시하려고 작정을 하였구나.”
“소, 소부주!”
“내 그간 무수히 많은 협잡꾼과 소인배, 강력한 난적들과 싸웠으나 네놈처럼 어설프고 천박한 무인은 처음 본다. 원하는 것이 명성이요, 사태를 주도하여 자존감을 채우려는 목적이었다면 그저 무인답게 진실을 요하며 칼 한 번 받아 내면 그만인 것을.”
항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내 형제들은 그 일로 밤잠까지 설쳤다. 한때나마 적이었던 조직으로 들어와 사는 것만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일일진대,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모욕을 입에 올렸으니 이는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시비다.”
“……!”
“네놈 같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네놈처럼 어설픈 놈은 나조차 보지 못했지만, 언제고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소부주.”
“적창문을 붙잡지 않은 무림맹이 너무했다고 생각하나?”
연호정의 그 말은 항요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는 주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오히려 난 무림맹의 처사에 불만을 느낀다.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더 강하게 처벌치 아니하고,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하니 선뜻 보내 주는 것은 제 식구 감싸기가 아니면 무엇인가? 내 비록 연씨세가의 장남이지만, 이런 부분은 정말이지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이 복잡한 얼굴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느긋하게 사람들을 살피던 연호정이 항요를 보며 말했다.
“내 발언은 철회토록 한다.”
“……?”
“비무를 청하지 말라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궁금해서 찾아와 진실을 청했다면 기분은 나빴을지언정 짧게라도 설명해 줬을 거다. 하지만 네놈은 선을 넘었다.”
“……!!”
“감히 연가와 묵룡부는 물론, 소속되어 있는 무림맹의 일 처리까지도 모욕했으니 이는 백도 정파 출신으로서도, 연합의 수뇌로서도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스릉.
연호정이 흑룡부를 꺼내 들었다.
항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강호인이라면 응당 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구구절절 말싸움도 싫고, 너 같은 소인배에게 더 설명하는 것도 싫다. 무인이라면 무인답게 칼을 뽑아라. 내 형제들과 적창문의 소문주가 그간의 사태를 비무로 종결시켰으니 나 또한 그리하리라.”
“소, 소부주.”
“비무가 끝난 후, 무림맹 형법당으로 가 네놈에게 확인되지도 않은 일을 진실인 양 알려 준 사람까지 전부 불도록 하라. 그 정도면 소부주로서 충분히 무림맹을 존중했다고 본다.”
연호정이 흑룡부로 항요를 겨누었다.
“자세 잡아.”